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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파주 토박이 강돈희 어른의 삶과 우리 현대사

경기학광장Vol.2 _ People & Life

< 파주 토박이 강돈희 어른의 삶과 우리 현대사 >


- 경기학광장Vol.2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살고 있는 강돈희씨의 구술을 통해 경기도 현대사를 복원하기 위한 또 한 걸음을 걸었다. 86세의 강돈희씨는 일제 강점기 당시 소학교에 다녔을 때의 기억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청방으로 창녕까지 갔던 일, 전쟁 후 이장을 보며 새마을운동에 동참했던 이야기 등 생생한 증언을 해주셨다. 증언 그대로 수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되어 증언을 그대로 기록, 정리했다.



증언을 해주신 강돈희씨


이름 : 강돈희

생년월일 : 1933년 8월 1일

주소 : 파주시 조리읍 새능안길 66-14



학교생활

소하8년 초등학교 5학년 때 해방이 됐다. 학교에 다녔지만 공부가 다 뭐야... 봄이면 유안이라는 비료와 흙을 섞어서 공처럼 만들어서 말리는 일을 했다. 그걸 말렸다가 못자리할 때 사용한다고 했다. 못자리 할 즈음이면 볏뿌리를 뽑으러 다녔다. 볏뿌리에 충이 있다고 해서 못자리할 마른 논에 들어가 볏뿌리를 뽑는 일이다.
도로가에는 피마자를 심었고 이 일이 끝나면 버드나무 열매를 따러다녔다. 버드나무 열매는 꽃이 피기 전 꽃송이를 따는 일이다. 이 버드나무 열매로 해군잠수복을 만든다고 했다. 따온 버드나무 열매를 강당에 널어놓으면 하얗게 꽃이 폈다.
고령산으로 나물 캐러도 다녔다. 취나물 고사리 등을 뜯어오면 수집해갔다. 우리는 그 나물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여름방학이면 퇴비를 해가야 했다. 퇴비만드는 일은 아이들이 하기 어려워서 대부분 부모님들의 숙제가 됐다. 아버지나 머슴이 한 지개 지고 가서 학교 퇴비장에 모았다.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공습 경보가 울리면 아카시아가 많은 산으로 뛰어가 숨었다가 해제되면 집으로 돌아왔다. 가을이 되면 관솔을 따고 뿌리를 캤다. 관솔기름이 얼지 않는다고 하여 일·러전쟁 때 비행기 윤활유로 썼다고 한다. 관솔은 소나무 옹이에 소나무 진이 응고한 것인데, 불에 아주 잘탔다.
뭐든 할당량이 있었는데 그 할당량을 못채우면 고통이 심했다. 사카히라라고 창씨 개명한 한국 선생이 있었는데 이 선생이 할당량을 못채운 학생들 이마를 커다란 콘파스(컴퍼스) 뾰족한 부분으로 찍어서 몹시 괴로웠다. 그 선생은 자신이 한 일이 있어서인지 해방되고 나서 도망갔다. 하지만 일본인이었던 가네다 교장은 선량했고 해방되고서도 주민들이 한동안 해코지를 안했다.
학교에서 닭도 키워서 당번이면 닭 모이도 가져가야 했다. 그래서 할머니가 해놓은 수수를 훔쳐가서 야단 많이 맞았다.

공릉우시장

우리 동네 앞에 봉일천이 흐르고 그 봉일천을 건너야 학교가 있었다. 당시 봉일천 다리 부근에서 열리는 우시장이 있었는데, 장이 열리는 날이면 흰옷에 흰 메꼬 모자를 쓴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면서 참 멋있었다. 그래서 학교에 가다가 그리고 퇴교할 때 여기 둑에 서서 보면 참 볼만했다.


오른쪽 아파트 단지가 우시장이 섰던 장터였다.

어쩌다보면 황소가 코뚜레가 끊어질 때가 있는데, 그러면 연쇄작용을 해서 옆에 소 코뚜레가 끊어지고 옆에 소 코뚜레가 끊어지면서 저희들끼리 싸우는데 그래도 사람 다치는 걸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소들이 저희들끼리 싸우다보면 코뚜레가 없어지는데 키가 잘막하고 다부진 어떤 사람이 싸우는 소들을 다 제지했다. 그 사나운 소 싸우는데 들어가서 소 코를 잡고 손을 위로 쭉 뻗으면 그 사나운 소가 절절맸다.
사방 백리에서 소 사고팔 사람이 여기로 다 왔다. 능곡, 일산 등에서 밤새 걸어왔다. 의정부, 황해도 다음으로 여기가 컸다. 음식값이 일산이 제일 비쌌다. 금촌도 역은 있었지만 초라했다. 공릉장은 매출이 많으니까 여기가 음식 값이 쌌다. 음식값이 많이 팔려야 싼데 일산은 십년띠기로 하나씩 파니까 비쌀 수 밖에 없었다.
소도 팔고 일반 생활용품도 팔았다. 봉일천이라는 말을 안쓰고 공릉장 공릉장 했다. 받들 봉자 날일자인데 봉일천이 왜놈들이 만들었는지 그 전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농민들이 보를 막아 농업용수를 사용했던 봉일천

공릉물이 교하로 나가는데, 능안리하고 쇄재하고 벌판의 농수를 이 물로 다 썼다. 여기에 보를 막았다. 한참 가물면 보의 물도 준다. 중천이라고 해서 가래 등을 동원해서 모래를 판다. 요 넘어 능안리에 도랑이 있다. 중간에 수문이 있어서 가능했다.
가래가 오목이라고 해서 가래 두 개를 묶어서 사용하는데, 장부꾼 하나에 양쪽에 두 사람씩 있는 것으로 총 5명이 하는 가래였다. 5인 1조로 사용하는 가래였기 때문에 능률이 좋았다. 이 모래를 퍼서 둑을 만들었다. 봄이면 아무래도 유수량이 적어서 보를 막기 쉬웠다. 봄농사 다 짓고 나서 6~7월 장마지면 이 개울로 돼지, 집, 볏단이 떠내려 오고 다리 위에서 볏단 건지는 사람 뭐 그런 일이 많았다. 그렇게 되면 일부러 허물지 않아도 보는 자연 유실되는 거였다.

조수가 금릉리 유래가 쇠금자 언덕릉자 해서 금릉리라고 불렀고, 또 쇠재라고도 불렀다. 왜 쇠금자에 언덕릉자를 썼을까 생각했는데 배가 임진강에서 쇠재앞에까지 왔던 거였다. 거기가 나루터니까 돈이 그렇게 끓었다고 한다. 그렇게 돈이 끓어서 쇠재라고 불렀을 것 이다. 지금은 교하강변까지 밖에 못오는데 옛날에는 조수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1990년 한강둑 터질 때 이 동네도 다 물이 찼다. 자유로가 안 생기고 통일로 쪽으로 발전이 됐으면 여기 봉일천도 많이 발전됐을 것이다. 지금 기대하는 것은 구파발 삼송리에서 금촌으로 지하철이 오는 것이다. 딱히 보상해줄 사람도 별로 없으니 좋다. 그렇게 하면 발전이 될까 그렇지 않으면 요연하다.
1960년대만 해도 행주하면 웅어고, 웅어하면 행주였다. 내가 58년도에 제대를 했는데 내 누이동생이 행주서씨한테 시집을 갔다. 누이 결혼식에 오질 못해서 휴가 와서 찾아갔는데, 가니까 사장 어른이 한의를 하고, 매재 큰 형이 양의를 하셨다. 한쪽에는 한약장이 있고 또 한 쪽에는 양약장이 있었다. 그 동네가 성동마을이었다. 매재 큰 형이 서강민인데 술을 무척 좋아하고 화술이 좋아 재미가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5~6세 더 먹었는데 행주에서 웅어를 사다가 떠서 먹었다.
여기 주민들이 죽원리로 원상복구 해달라고 해서 대원리에서 대죽자 집원자 해서 죽원리가 됐다. 흥선대원군이 여기와서 노름을 많이 했었나봐, 그래서 죽원리로 바꿔달라고 했다고 성사됐다.

12월 8일 싱가폴을 점령했다고 요만한 공하나 주고 운동화를 배급줬다. 운동화는 하나 앞에 하나씩 안주고 선생님이 신발장을 봐서 짚세기 신고 게다 신은 애들만 찾아서 제비 뽑아서 줬는데 내가 당첨이 됐다.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녀야 되는데 아침에 신고나면 운동화가 다 젖어서 아침에 나올 때는 책보에 운동화를 싸갖고 나왔다. 맨발로 학교까지 걸어와서 학교 앞 있는 펌프에서 발 씻고 교정에서만 운동화를 신고 들어갔다.

한국전쟁

18세 되던 해에 한국전쟁을 겪었는데, 25일날 우리 집 논에 모내기를 했다. 오산리 사람들이 와서 모를 내는데, 논에서 보니 금촌무 네미고개(현 흰돌아파트 옆 도로)로 사람들이 하얗게 넘어왔다. 그 사람들이 오면서 난리 났다고 하자 오산리 사람들이 모내다말고 집으로 갔다.
나는 1.4후퇴 때 청방이라고 청년방위대로 해서 경남 창녕 창낙까지 갔었다. 내가 청방으로 갔기 때문에 가족들이 어떻게 피난갔는지는 잘 모르지만 4살 어린 14살 먹은 동생이 소를 끌고 한강을 건넜다는 거를 들었다.
전쟁이 나자마자 집에서 나와 아버지는 숨어서 지냈다. 광에도 숨고 콩밭골에도 숨고 땔감으로 쓰려고 묶어다 놓은 보리짚 속에도 숨고, 말도 못했다. 당시 동네가 서로 협조해서 의용군 잡으러 오면 미리 통보해줬다. 내무위원이라고 하는 본의 아니게 부역해야 했던 사람들이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동네 사람들 관계가 무사했다.
6.25 발발해서 연령순으로 청방에 가입했다. 지역에서 훈련받았고, 1.4후퇴가 나니 단체로 남하했다. 서울 아현초등학교에서 하루를 묶었고, 보름 동안 계속 걸어서 창녕 창락까지 갔다. 남아 있으면 의용군이 되니까 단체로 데려간 것이다.
창락이라는 곳에 가서 머물렀는데 장티프스가 돌았다. 창락초등 학교에는 환자들만 수용됐다. 간호원과 군의관이 오면 흰 장갑끼고 환자를 만지지도 않고, DDT를 어깨쪽으로 해서 옷 속에 펌프로 살포 하고 갔다. 그러고 나면 바지에 이가 몇 되씩 나왔다.
처음 죽은 이들이 나오자 관에 입관하고 예포도 쏘면서 장례를 치러줬는데 둘, 셋 나오니까 관이 아니라 쌀가마로 들것을 만들어 옮겨 매장하다가 그것도 부족하니까 10~20여 평 정도 되는 구덩이를 깊이 파고 거기에 죽는 대로 매장했다. 자고나면 수십 구씩 죽는 이들이 생겼다. 이 구덩이에 겹겹이 묻었는데 구덩이가 다 차면 위로 흙을 덮었다. 당시는 추운 겨울이니 충분한 흙을 덮지 못해서 시체의 무릎이 보이기도 했다.
먹을 것과 의약품이 부족하자 솔잎을 삶아서 그 국물을 마셨다. 솔잎이 좋다는 소리를 듣고 그랬던 거였다. 당시 사령관이 원영덕이란 사람이었는데 후에 총살당했다고 들었다. 3월 달에 청방이 해산됐고 쌀을 2되씩 나눠줬다. 그걸 들고 각자 귀향했는데 집으로 가면서 병들어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청방 나가면서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동생의 주소인 ‘평택군 청북면 복길리’를 적어주셔서 그걸 갖고 찾아갔다. 초행길에 날이 어두컴컴해서 도착했는데 송장을 묻으러 가는 사람들이 보여 오싹했다.
거기서 둘째 당숙을 만났고, 사흘 만에 내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다 살아났다. 죽지도 않은 나를 윗목에 밀어놓고 죽었다고 다들 통곡했다. 보리싹이 파릇할 때 평택에 도착했는데 추수할 때쯤 병이 나아서 나를 데리러 파주에서 온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올 수 있었다.
파주 집에 돌아와 보니 토담집이 한 채 불에 탄 것 말고는 동네가 전쟁 피해 없이 말짱했다. 우리집 뒤뜰에 물이 잘 나는 우물이 있었는데 국군이 뒷동산에 와서 진을 쳤다가 물이 필요하자 나뭇가지로 만든 울타리를 부수고 들어와서 물을 퍼가고 야단법석을 벌이기도 했다. 나는 후에 국군으로 발탁되어 장교의 당번으로 일한 덕분에 고생을 덜했다.

유섬이라는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1960년, 5.16 군사쿠데타가 끝났을 때였다. 광화문 옛 경기도청 부근에 유섬이라는 정부기관이 있었다. 유섬에 근무하는 미국인들이 거주하는 사택이 이태원에 있었고 나는 그 주택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1970년대 초반 유섬은 문을 닫았고, 그 후 건축일을 하다가 1973년 무렵 파주 고향으로 돌아왔다. 5.16 쿠데타가 나고 마을 이장을 군인출신으로 바꿨다. 1959년도에 제대했기에 나도 군인 출신이어서 이장을 보게 되었다.

리동조합 구성

1960년대 초에 새마을운동과 함께 리동조합 구성하는 것이 시급했다. 조합 기금을 조성한다고 쌀 걷고 야단법석이었다. ‘삼대출자 행방불명’이라는 말이 있었다. 왜놈시절 식산조합이다 뭐다해서 출자금이 없어지니 출자금 내기를 기피해서 애를 먹었다. 당시는 이 동조합 육성을 적극 장려했다. 무조건 가구당 다 출자 대상으로 삼았다. ‘절대 믿고 출자해달라’며 설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시큰둥했고, ‘어느 한 놈 배불릴 걸 왜 하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출자금은 현물로 냈는데, 당시 쌀이 금보다 나았을 때여서 쌀로 받았다. 감자만 먹고 땅을 사려고 할 때였으니 더욱 그랬다. 농협구성은 형편이 좋은 곳과 그렇지 못한 곳이 나뉘었다. 예를 들어 당시 교하읍은 곡창지대여서 다른 면보다 형편이 좋았다.
이렇게 구성된 리동조합이 성장하여 단위조합이 되었고 부실조합이 통합되며 각 읍면마다 1개씩의 조합만 남았다. 우리 동네는 봉일천 단위농협이다.
당시는 군사정권이라 통폐합 하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리동조합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불이익을 따질 수준이 아니었다.
출자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리동조합은 농민들 삶에 큰 보탬이 됐다. 돌아보면, 농협이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품 판매에 적극 일해야 하는데 금융사업에만 치중했다. 농협은 금융사업으로 성장했지 경제사업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농협에는 영농자금 제도가 있어서 신청하면 저리로 대출받아 1년간 사용하고 농사지은 후 갚았다.


처음 만들어진 히동 협동조합에서 새로 이전한 농업협동조합 봉일천지점

새마을운동

1960년대 초,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새마을운동은 부락에서 선출한 새마을지도자가 나서서 했는데, 새마을지도자도 이장의 지도 하에 있었다. 새마을지도자는 자원봉사였다. 이 당시 정기적 급료를 받아가며 일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후에 거마비 정도를 받았다.
당시 새마을운동의 첫째 목표가 도로확장이었다. 리어카 지나갈 길도 없이 동네마다 대부분 좁은 소로였다. 소를 끌고 다닐 정도여서 농사지을 때 소 등에 짊어 얹어 이동하거나 지게에 지고 다니는 것이 전부였다. 혁명 후 리어카를 대대적으로 보급하면서 이런 좁은 길을 리어카 다닐 정도로 넓히는 일이었다.
길을 넓히려면 지주한테 허락을 받아야 했다. 새마을지도자와 이장이 지주한테 가서 살다시피 하며 애원해서 땅을 얻어냈다. 상황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의 땅에 길이 넓어지면 좋을 것을 생각하고 흔쾌히 희사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땅구두쇠 같은 사람들은 한 평 내놓는 것이 영원히 땅을 빼앗기는 거라고만 생각하고 안 내놨다. 하지만 매일 마을사람들과 얼굴보고 살아가야 하고, 다른 곳은 다 넓혀졌는데 자기 땅 있는 곳만 넓혀지지 않게 되면 결국 내놓았다.

땅을 넓힐 때 배수로 복개 등 애로가 많았다. 배수로 복개를 위해 서는 노깡이라고 하는 것을 묻어야 했다. 하지만 노깡을 사려면 돈이 필요해서 고향을 떠나 서울 등에서 사업하는 사람이나 회사 다니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듯 협조요청을 했다. 그렇게 마을에서 노력을 하면 정부에서 지원을 해줬고 그런 노력 없이 지원만 요청하는 곳은 지원해주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했고, 점심은 각자 집에서 먹고나왔다. 새참으로 막걸리나 빵을 공동으로 준비할 때도 있었다. 점심 먹는다고 집에 갔다가 나오지 않고 쉬는 경우도 가끔 있었지만 늘 보는 마을 사람들 얼굴 볼 생각을 하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동네일은 그렇게 진행됐다. 도로를 넓힐 때 자갈이 필요했는데, 그것도 마을마다 할당이 있었다. 주민들은 삼태기에 자갈을 주워 모았다가 사용했다. 도로확장에 쓰이는 흙은 마을 이곳저곳에서 퍼왔다. 당시는 산에서 흙을 퍼와도 주인이 별 말을 안했던 시절이다. 조금씩 조금씩 흙 붓고 발로 다지 면서 넓혀갔다. 주민이 단결된 부락은 금세 했고, 그렇지 못한 마을은 오래 걸렸다.
도로 확장은 마을에서 했다면 지붕개량은 정부차원에서 했다. 특히 도로변 집들은 강제로 지붕 개량을 하기도 했다. 당시는 대부분 초가 지붕을 스레트로 개량했는데 원하는 사람이 많아 한꺼번에 보급을 못 해줬다.

젖소 사육

지붕 개량은 첫째 미관상의 문제와 둘째 화재 문제 그리고 3~4년 마다 한 번씩 지붕을 새로 이어야 하는 불편함과 공력과 짚을 낭비하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당시 낙농업이 시작되면서 짚을 사료로 사용해야하는 이유가 덧붙여졌다.
1960년대 중반, 젖소라는 이름만 들었지 젖소를 본 사람도 별로 없는 때였다. 수입해왔으니 가격도 비싸서 낙농을 시작하는 가구는 대부분 한 마리나 많아야 3~4마리 정도로 시작을 했다. 착유기 등도 없어서 손으로 젖을 짜야했다.
당시 봉일천 대보둑에 풀이 하나 없었다. 다 베다가 소 먹이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금 봉일천 둑 산책길 주변에는 풀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름답게 자랐다.

퇴비증산운동

퇴비증산운동을 면에서 강력하게 독려했다. 할당량이 있었기 때문에 각 집마다 퇴비장을 만들어 풀을 깎아다 쌓아 퇴비를 만들었다. 퇴비장은 사각형 형태로 만들었고 구석에 자 막대기를 세웠다, 풀을 깎아서 지게에 지고올 때 ‘전’이라고 하는 한 아름 단위로 얹어 와서 전대로 퇴비장에 쌓았다. 사각형 퇴비장에 전대로 쌓아올렸다가 뒤집어 주고, 썩은 퇴비물이 한 곳으로 흘러내려오면 바가지로 퍼서 퇴비에 되뿌려줬다. 장마철이 되면 퇴비물이 많이 흘렀다.
그렇게 만든 퇴비는 가을 김장 배추 심을 때 쓰기도 하고 이듬해 농사지을 때 주로 사용했다.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는 퇴비장에 섞지 않고, 인분과 함께 재놨다가 따로 사용했다.
퇴비증산운동이 꽤 심했다. 누구나 시켜서 하는 것은 싫어했다. 퇴비를 해서 쓰면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효과가 바로 나타 나거나 눈에 확 띠는 것도 아니고, 정부에서 강제적으로 시키니 거부감에 안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화폐개혁

1961년도에 화폐개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큰돈이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한도 안에서 교환했다. 리동조합에서 바꿔줬는데, 교환할 한도를 초과할만큼 돈이 많았던 사람들이 불안감을 느끼고 친인척을 통해 교환했을 것이다. 농촌에서 그런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킨 후 얼마 후에 실시했다.


일제 강점기 기차를 수리하고 석탄을 샇아 두었던 기관고가 있던 자리

전 교하향교 전교를 역임하신 강돈희 어르신께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기술했습니다. 시간과 지면이 허락한다면 더 많은 이야기들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쉬움이 남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주옥같은 옛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신 강돈희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글 이옥석

상명여자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고양신문 기자와 고양시향토문화보존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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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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