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역사문화탐방로 의주길

경기학광장Vol.2 _ Information & News

< 역사문화탐방로 의주길 >


- 경기학광장Vol.2 _ Information & News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경기도 옛길 역사문화탐방로 사업’(이하 경기옛길)의 시작 및 삼남길에 대한 소개는 지난 창간호에 기고한 바 있다. 경기옛길은 경기도가 조선의 간선도로망을 기반으로 하여 옛 조선시대의 길을 자동차가 아닌 두 발로 걸어서 체험할 수 있도록 조성한 역사문화탐방로이다. 옛 선인의 발자취를 체험한다는 목표 아래 이름도 역사문화탐방로로 정했다. 이번 호에서는 경기옛길 사업의 두 번째 단추인 의주길을 소개한다.


[그림 1] 조선시대의 대로

1) 경기옛길 의주길

조선시대 한양을 중심으로 각 지방을 연결하는 이러한 간선도로망이 비단 삼남지방까지만 연결되 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770년에, 신경준과 홍봉한 등이 영조 명에 따라 편찬을 시작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조선시대 전국의 도로를 총 9개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중 제1로로 명명한 길이 바로 의주대로義州大路(또는 관서대로關西大路)이다.
『증보문헌비고』의 편찬자인 신경준은 조선의 지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학자로 증보문헌비고 외 에도 개인적으로 조선의 도로상황을 집대성한 『도로고(道路考)』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다만 도로고와 증보문헌비고에서 조선의 주요 간선도로의 개수는 약간 상이한데, 도로고는 6대로 체제로 증보문헌 비고에서는 9대로 체제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6대로와 9대로 체제의 차이는 사실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다. 9대로 체제는 6대로 체제의 일부 지선에 간선도로로서의 지위만 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6대로와 9대로 체제 그 어느 체제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첫 번째 도로(제1로)는 동일한데 그것이 바로 의주대로이다. 이후 1800년대에 김정호가 정리한 『대동 지지大東地志』의 10대로 체제에서도 의주대로는 여전히 제1로의 위상을 보여준다. 그럼 여기서 의주대로의 경로를 살펴보자.

한성(漢城) – 홍제원(弘濟院) – 신원(新院) – 벽제역(碧蹄驛) – 파주(坡州) – 임진(臨津) – 동파역(東坡驛) – 장단(長湍) – 개성(開城)– 금교역(金郊驛) – 서흥(西興) – 서산발참(西山撥站) – 황주(黃州) – 평양(平壤) – 순안(順安) – 신행원(新行院) – 청천강(淸川江) – 곽산(郭山) – 전문령(箭門嶺) – 의주(義州) – 압록강(鴨綠江) 이다.

경기옛길 의주길은 위 의주대로의 노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주지하다시피 나열된 경로대로 그대로를 탐방로로 조성할 수 없었다. 민족의 분단은 의주대로의 유구한 흐름 역시 끊고 말았으 며 현재 조성된 경기옛길 의주길은 신원 – 벽제역 – 파주 – 임진까지의 경로까지만 이어진다. 임진강을 직접 건넜으면 좋았겠지만 통일시대를 대륙으로 향하는 의주길의 염원은 임진강에서 방향을 돌려 망향의 공원인 임진각으로 연결되도록 조성되었다.

[그림 2] 임진각의 철조망

2) 의주길의 중요성

경기옛길 의주길의 기반이 되는 의주대로는 그 명칭이 다양하다.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라는 의미로 제1로(第一路), 목적지의 지명을 따서 의주대로(義州大路), 고려시대 북방경계인 철령관의 서쪽으로 향한다고 하여 관서대로(關西大路), 한양에서 서북방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의미로 서북로(西北路), 중국 연경으로 향하는 연행사신단이 행차하는 길이라는 의미로 연행로(燕行路)라고 불린다. 하나의 길이 이처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이유는 의주대로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이 중요성은 대륙과의 교통로라는 특성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림 3] 한양에서 북경까지 연행노정

의주대로는 예로부터 대륙에 자리잡았던 여러 국가와의 외교 루트로 이용되었다. 삼국시대를 넘어 신라와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위치했던 우리 민족의 국가들은 대륙에 자리잡은 국가들과 다양한 외교 관계를 맺어왔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대륙의 국가는 경쟁의 대상이자 긴밀한 상호교류의 대상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 후금, 청으로의 사신을 꾸준히 보내며 외교적 토대를 쌓았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로 사신단을 파견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는데 조선은 황제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가의 중대사를 명나라에 항상 알려야만 했다. 이렇게 사신단을 파견하는 일을 사행(使行)이라 일컬었다.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로 파견 하는 사신단의 행차는 천자(天子:황제)를 알현한다는 의미로 조천(朝天) 사행이라고 칭했다.


[그림 4] 의주에서 북경까지(여지도)

하지만 우리에게 병자호란으로 익숙한 청나라의 숭덕제(홍타이지)와 그의 아들(아이신기오르)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조천사행이 끝을 맞는다. 청나라가 중국대륙의 패자로 들어서고 연경(燕京: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이후에는 조선은 연경으로 사신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을 ‘연경으로 가는 사신행차’이라는 의미로 ‘연경사행(燕京使行)’이라고 칭했고 이것을 다시 줄여서 연행(燕行)이라는 용어가 정착되기에 이른다. 경기옛길 중 의주길은 이 연행사신단이 중국으로 가던 길인 의주대로를 이용한 연행로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림3]는 당시 한양에서 연경으로 가는 노선도를 현재 지도에 옮겨본 것이다. [그림4]는 『여지도輿地圖』에 수록되어 있는 여지도 연행길[輿地圖 燕行路]이다.
조선의 의주에서 심양을 거쳐 연경(燕京)에 이르는 경로를 상세히 그린 이 지도는 18세기 말에 제작되어 당시 중국을 왕래하는 우리나라 사신들을 위하여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3) 의주길의 연행사신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동아시아의 질서는 새로운 개편의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중국대륙에 원나라를 대신해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명나라는 주변 민족들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때마침 한반도에서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조선은 태조 이성계 시절부터 친명정책을 추진하여 명나라를 통해 조선 건국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했다. 명나라 또한 주변 민족과의 관계 정립의 과제 속에서 외교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조선의 친명정책이 반가운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상호 이해가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곧 ‘조공(朝貢)-책봉(冊封)’ 이라는 외교적 형식으로 정착된다. 조선은 명나라로 조공을 보내고 명나라는 조선의 왕을 인정하여 책봉해 주는 형태의 외교이다.
이러한 외교적 관계의 실무진이 바로 연행(조천)사신단이다. 연행은 명분상으로는 중국 중심의 질서 아래 형성·유지된 제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서로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주는 조선과 명나라 간의 국제규약이다.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이러한 상호 이익 관계는 잠시 흔들리게 된다. 조선은 청을 인정하지 않았고 청은 이에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을 일으키며 강한 군사적, 정치적 압력으로 조선에 가혹하게 대했다. 당시 요구한 엄청난 양의 세폐와 60만 명에 달하는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조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청나라의 국내 정세가 안정되면서 세폐는 명나라와의 관계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 또한 전쟁으로 입었던 피해도 서서히 복구되면서 조선은 다시금 명나라 시절처럼 청나라와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고 다시금 연행으로 인한 외교적 관계가 정착되기에 이른다. 조선은 이렇듯 정기적으로 대륙 국가로의 사신을 파견하여 내정의 안정을 꾀하였으며, 나아가 대륙에서 유입되는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연행은 조선시대에 세계와 호흡하고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거의 유일한 창구였다. 조선은 연행을 통하여 서책을 비롯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끊임없이 받아들여 자기 문명의 자양분으로 삼았고 17세기 이후에는 지동설이나 천주교와 같은 서양의 과학과 사상도 연행을 통하여 도입되었다.
당시 중국 대륙과 한반도 간의 국제 무역은 연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연행 사신들에게는 개인적인 무역자금의 소지가 허용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은과 인삼이다. 당시 조선의 인삼은 세계적인 인기 상품이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조선의 인삼을 매집하려고 노력하였고 특히 인삼 1근은 은 25냥의 가치가 있었다. 연행사신단은 1인당 8포(包)의 인삼을 무역자금으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1포는 10근에 해당한다. 즉, 개인당 은 2,000냥에 해당하는 상당한 무역자금을 소지했던 것이다. 인삼 8포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팔포무역(八包貿易)이라 한다.
연행사신단은 이 팔포무역 외에도 군과 관에서 필요한 물품을 대신 수입할 수 있는 별포무역(別包貿易)에 대한 허가권도 있었다. 이를 위해 사신단에는 다양한 상인들이 함께 포함되어 교역을 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의 국제무역은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연행사신단을 통한 무역 거래는 거의 유일무이한 국제 교역의 창구였다.

무역 외에도 연행사신단은 국제적인 신지식을 조선으로 전하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특히 청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사신단이 연경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는 것이 허가되었는데 사신단 에 동행한 많은 조선 지식인들은 이 기회를 통해 청나라로 유입된 국제적 지식들을 접할 수 있었다.
연경에서는 포교의 자유가 허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신단은 자연스레 유럽에서 들어온 가톨릭 선교사와 예배당(천주당:天主堂)을 접할 수 있었고 이는 천주교가 조선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세계 지도를 비롯하여 유럽의 세계 탐험으로 밝혀진 많은 서구 문명의 지식들 또한 당시의 연경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이 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며 업신여기고 북벌과 척화를 주장하던 사람들과 달리 실사구시의 새로운 지식을 원했던 실학자들은 연행사신단에 포함되어 연경에 방문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다. 이 연행사신단으로 함께 했던 가장 유명한 실학자가 바로 연암 박지원이며 그가 남긴 연행에 대한 기록이 바로 그 유명한 『열하일기』이다.


[그림5] 열하일기 초고본이 실린 행계잡록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4) 의주길의 문화유산들

의주길은 대륙으로 향했던 제1로 의주대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만큼 길과 함께하고 있는 의미있는 문화자원이 다수 분포되어 있다. 의주길의 경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벽제관(碧 蹄館)이다. 지금은 아쉽게도 터만 남아 있지만 벽제관이 가졌던 의미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벽제관은 어떤 곳일까?
벽제관은 조선 성종 7년(1476) 11월에 세워졌다. 완전히 새로운 건물은 아니었고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것을 조선 세종 시기에 수리하여 사용하다가 성종 대에 완전히 새롭게 리모델링한 것이다.
의주길을 왕래하던 중국과 조선의 사신단은 중국 국경을 넘어선 지역에서는 주로 중국의 역참을 이용하였고 한반도 내에서는 조선에서 관리하던 역참을 이용하였다. 중국을 왕래하던 양국의 사신단에게 특히 중요한 역참이 바로 벽제역이었고 벽제역의 객사가 벽제관이다. 벽제관은 조선으로 들어오는 중국 사신이 한양에 들어서기 전에 여장과 체제를 재정비하는 곳이었고 조선의 입장에서는 중국에서 오는 사신단을 한양 이전에 환영하고 맞아들이는 역할을 하던 장소였던 것이다. 당시의 관례는 중국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하면 반드시 벽제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예를 갖추어 서울에 들어가야했다. 중국 사신들이 벽제관에 머물면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이들을 환영하고 영접하여 한양으로 안내하는 절차를 진행한다. 또한 벽제관은 중국으로 향하는 연행사신단이 한양을 나와 머무는 의주길의 첫 관문이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 사신들도 여기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림6] 현재 터만 남아있는 벽제관지

벽제관 외에도 주목할 만한 문화유산으로 덕명교비와 용미리 마애불이 유명하다. 덕명교비는 단순한 비석에 불과하지만 비석에 기록된 내용은 의주길의 가치를 보여준다. 그 내용인즉 의주길을 왕래하기 위해서는 공릉천을 건너야 하는데 이 공릉천에 다리가 자주 유실되어 튼튼한 다리가 필요했었다. 이에 관과 민은 힘을 합쳐 덕명교를 건설하고 이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덕명교비에 모두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조정의 관리뿐만 아니라 실제 돌을 나르고 쌓은 백성 돌쇠의 이름까지 이두로 기록되어 있다. 억지로 세운 지방 사또의 공덕비에 견주어 보면 국민이 하나됨을 보여준 의미깊은 유산인 것이다. 덕명교비는 의주길이 사신뿐 아니라 상인과 백성들도 이용하는 중요한 길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림7] 신원동 덕명교비

또한 파주 광탄면에 위치한 용미리 마애불은 그 위용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입상 석불이다. 의주길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었던 만큼 불심으로 세워진 거대한 마애불은 의주길의 대표 이정표이자 랜드마크였다.
유형으로 남아있는 이러한 유산들 외에도 의주길에는 사람의 마음도 녹아 있다. 의주길에 얽힌 조선시대 역관 김지남의 이야기는 듣는 이를 숙연하게 만든다. 김지남은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중국과 조선의 경계를 담판한 외교 성과를 올린 인물이다.


[그림 8]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김지남은 일찍부터 외교의 중요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외교가 주된 업인 역관들의 교육 필요성을 통감한 인물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외교의 기초가 되는 외교 실무 교재인 『통문관지通文館志』를 편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렇듯 국가대사에서 외교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던 김지남은 유언으로 자신의 묘를 의주길 옆에 써 주기를 바랬다. 그 이유는 의주길을 왕래하는 역관과 사신들이 자신의 묘를 보고 외교의 중요성을 느끼고 훌륭히 책무를 수행하기를 바랬던 마음일 것이다.
이렇게 대륙으로 향했던 우리 선조들의 자취가 묻어 있는 길은 2019년 현재 경기옛길 의주길로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선인들의 숨결을 길 위에서 되새기고 있다.



[그림9] 1929년 일본 사진집 「국경」에 실린 백두산정계비 – <월간조선>

글 남찬원

경희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옛 것과 오늘의 것이 조화된 민속과 지역문화에 관심을 두고 <파주 금촌마을의 회상과 기록>, <김포 군하리 마을지>, <고양시의 자연마을들> 등 저서를 집필했으며, 현재 경기문화재단에서 조선시대 옛길을 도보탐방로로 재해석하는 경기옛길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더 많은 경기학광장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바로가기]



 

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