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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애달픈 단조(短調)의 거리, 행궁동 점집거리

경기학광장Vol.3 _ Village & History

< 애달픈 단조(短調)의 거리, 행궁동 점집거리 >


- 경기학광장Vol.3 _ Village & Histor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어디선가 처연한 우리 가락이 들려온다. 그 가락을 따라 가늘게 받아 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외롭게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가 이처럼 칼칼하고 아련할까. 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일까. 이방인들의 궁금증을 풀어준 건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옆 화서사랑채였다. 짙은 회색 기와지붕을 머리에 얹은 엷은 고동색의 단아한 한옥 안에서 시민들이 경기민요를 배우고 있었다. 간혹 애 간장을 태우는 해금 소리도 바람에 실려 왔다. 처마 밑에 숨어있는 솟대도 정겹다.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


이곳에서 화성행궁을 거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쪽으로 이어지는 골목이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화서문로다. 어쩌면 200여 년 전 화성행궁을 찾은 정조가 중신들과 입씨름하며 격론을 벌이느라 어지러워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걸었던 산책로일 수도 있겠다. 비가 장대비처럼 퍼붓던 어느 날 밤 뒤주에 갇혀 타계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며 발걸음을 옮겼던 골목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행궁동 화서문로가 시작되는 길목에는 <왕의 골목> 이라고 적힌 팻말이 오롯이 세워져 있다. 군주의 기품 있고 의미 있는 고독이 느껴진다.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 입구 화서사랑채에 세워진 솟대가 이방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 내 한 점집 앞에서 어르신이 찬거리용 채소를 팔고 있다.


사실 이 거리는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다. 낡은 단독주택을 리모델링해 단장한 건물들이 대부분이어서 비슷한 겉모습만 보고 무작정 걷다 보면 눈앞에 카페나 식당 등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처음 이 거리를 찾는 이들은 휴대전화로 위치를 검색해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헤매가며 목적지를 찾는다. 갓 결혼한 부부의 살림살이처럼 단출하다. 파스텔로 그린 풍경화에 엷은 물감으로 덧댄 수채화 같다. 의인화되는 사물이 어찌 이것뿐일까.


젊은이들은 이 거리를 행리단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서울의 경리단길 대신 행궁동의 ‘행’ 자를 앞에 붙여 탄생된 이름이다. 행리단길은 특히, 화성행궁 돌담길을 끼고 있는데다, 화서사랑채나 행궁아 해꿈누리 같은 단아한 한옥들도 만날 수 있어 눈도 호강한다. 그래서 주위의 근사한 풍광들을 즐기면서 걷는 행복도 쏠쏠하다. 경리단길보다 더 아기자기하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소리나 먼지떨이개로 창문을 터는 소리도 가만히 들어보면 타악기와 함께 어우러지는 결이 다른 판소리 한 구절이다.

파스텔로 그린 풍경화 같은 행리단길, 그리고 점집거리


화서문 입구에서 바라다 보이는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 화서사랑채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 화성행궁으로 걸음을 옮기면 바깥으로 붉은색 깃발과 흰색 깃발을 내걸은 점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과거에는 굿을 벌이는 무당은 붉은색 깃발을 바깥에 걸었고, 점만 보는 점쟁이는 흰색 깃발을 달았다고 전해진다. 약간 내리막길이지만, 궁금증에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성명 철학관이나 액운을 쫓는다는 전통적인 점집부터 사주 카페에 이르기까지 명칭들도 다양하다. 뭔가에 쫓기며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점집은 여전히 어깨를 빌릴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간판 끝말이 대부분 신내림 받은 이들이 사용하는 ‘보살’, ‘장군’, ‘선녀’, ‘동자’ 같은 별호들이다. 무속인들이 운영하는 점집들은 중국 음식점 옆에도 앉아있고, 편의점 옆에도 서있고, 꽃집 2층에도 얹혀 있고, 철물점이나 카페, 공방 옆에도 웅크리고 있다. 어떤 점집들은 처마를 나란히 하고 앉아 이방인들을 기다리고 있다.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 내 나혜석 선생 생가터 부근에도 점집들이 들어서 있다.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로 들어가기 위해선 화서문을 지나야 한다.

붉은색과 노란색 분꽃들이 활짝 피어있는 화단 건너편 2층 건물은 통째로 점집 6곳이 들어서 있다. 백호사, 천신장군, 천왕보살, 청보살, 약사암, 대궁보살…. 이름들도 다채롭다. 직장 동료들과 이곳을 찾았다는 새내기 직장인 김 모 씨(30·여)는 이처럼 점집들이 한꺼번에 입주한 건물이 흥미로운지 동료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었다. 진 사람이 들어가 점을 보기 위해서란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한 점집 앞에서 좌판을 깔고 찬거리 채소들을 팔고 있었다. 끝 음절이 ‘소녀’로 끝나는 간판이 무척 흥미로웠다. 이 점집을 운영하는 무속인 우영숙씨(68·여)는 행궁동 점집거리로 입주한 지 10년 정도 됐다고 소개하면서 무속인이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저도 젊었을 때는 교회도 다니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을 꿨습니다. 그 꿈에 꽃상여와 늘이 보이더라고요. 조상님들도 머리맡에 앉아 계시고 말입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도 보이구요. 그렇게해서 무속인의 길을 가게 됐습니다.” 그녀는 그 이후로도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고 말했다. 단골들도 제법 많다고도 설명했다. 많은 손님들이 다녀갔는지 갖가지 사연을 적은 축원카드들이 개다리소반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수원 행궁궁 점집거리 인근에 단아한 행궁아해 꿈누리 한옥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 골목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어르신(81)의 기억을 소환해보자. “제가 지난 1960년대부터 이 골목에서 구멍가게를 열었는데, 아마 그때부터 점집들이 하나둘씩 들어섰습니다. 당시는 구도심 가운데 행궁동이 가장 외졌던 곳입니다. 많을 때는 50여 곳 남짓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한 집 건너 보살님이고 선녀님이 계셨던 셈이죠.”
이 어르신의 기억으로는 왕이 머물던 행궁이 옆에 있어 기가 세다며 전국에서 무속인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행궁동은 한때 한 집 건너 한 집이 점집과 철학관이었을 정도로 무속인의 거리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보니 인근 수원 팔달문과 건너편 통닭 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많아도 행궁동을 오는 사람들은 뜸했습니다.” 이 시점을 1990년 후반까지로 기억하고 있는 토박이 주민들이 많다.


점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 앞을 젊은이들이 지나가고 있다.

“행리단길에서 점집은 약방에 감초”

200여 년 전 정조가 산책을 했을 지도 모르는 왕의 골목에서 점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풍광은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어떤 화가가 이 거리를 수채화로 그린다고 해도 점포 사이사이에 점집들 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딱히 속담의 한 구절을 빌려 표현하자면 행리단길에서 점집들은 ‘약방의 감초’들이다. 토박이 어르신의 기억을 빌리면 언제부터인지 그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화성행 궁을 중심으로 화서문로는 물론, 장안문의 성곽 안쪽으로 무속인과 철학인의 집합소처럼 점집 간판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 건 이미 엄연한 현실이 됐다. 인터넷에 ‘행궁동’이나 ‘행리단길’을 검색어로 치면 ‛점집거리’가 연관 검색어로 컴퓨터 화면에 뜬다.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로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로 붉은색 깃발과 흰색 깃발이 걸려 있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행리단길 단골 식당을 찾았다는 이모 어르신(79·여)의 기억은 색다르다. “평소에는 몰랐는데, 우리 아들딸이 어렸을 때도 이 골목에 점집들이 있긴 있었던 것 같긴 합니다. 그때는 드문드문 있었던 같은데…. 그런데 요즘 보니 점집들이 (예전보다) 제법 많아졌어요. 어느 날 서울에 사는 아들 내외가 묻더라고요. ‘서울 친구들이 그러는데, 행궁동이 원래부터 점집 골목이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는 스스로 수원 토박이라고 강조했다.
이 어르신의 기억을 바탕으로 복기하면 점집들이 뜨문뜨문 들어섰던 행궁동 북쪽 구역이 지난 2013년을 계기로 큰 변화를 맞는다. 수원시가 개최한 ‘생태교통 수원 2013’ 페스티벌 때문이었다. 이 거리가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되면서 도로 주변 집들 외벽이 말끔하게 정비되고 간판들도 정돈됐다. 아름답고 운치 있는 소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졌다.
“행리단길에 점집들이 요즘처럼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건 아마 10여 년 전부터로 보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2층 건물에 ‘퇴마사’ 간판을 달고 영업하던 점집도 있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외지인 들이 호기심에 이용하는 경우들도 종종 있습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상인의 설명이었다. 상인들은 이 골목에서 운영되고 있는 점집들은 20여 곳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난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점집거리의 대명사는 서울 성북구 미아리고개였다. 많을 때는 점집 100여 곳이 성업하면서 전국 최대 규모의 점성촌을 이뤘다. 지금은 그 명성을 행궁동 점집거리가 잇고 있는 셈이다.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에 소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한 집 건너 보살님, 한 집 건너 선녀님…”

팔달산과 화성행궁을 끼고 있는 행궁동 골목에 이처럼 점집들이 성업 중인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을까. 무속인들은 지난 1796년 완성된 수원화성 자체가 오래된 건축물인데다, 팔달산을 등지고 있어 화서문 일대는 무속인들이 선호하는 소위 영기(靈氣)가 센 곳으로 꼽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화서문은 과거 화성 밖으로 시신을 옮기던 문으로 알려져 죽은 이와 소통한다는 무속의 성격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풍수지리적으로 기가 세다는 이유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저렴한 임대료와 민원이 적다는 점도 있다. 이곳에서 10여 년째 부동산중개업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동명씨(58·가명)의 설명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화성 성곽 안쪽은 문화재보호구역으로 묶여 개발이 어렵고, 수원시의 화성복원사업에 의해 언제 건물이 헐려 떠나야 할 지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건물은 낙후하고 유동인구는 갈수록 줄어 상가를 내놓아도 들어오려는 업종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속인들이 이곳으로 입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무속인 우영숙씨(68·여)는 그 연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원래 점집들이 옛 포교당인 수원사(수원박물관에서 지동시장까지의 수원천변 사이에 위치) 부근에 많았습니다. 그러다 차츰 그 지역이 개발되면서 행궁동 쪽으로 많이 이주를 해 왔다고 합니다. 행궁동에도 원래부터 무당이나 점집들이 없던 건 아닌데 그 숫자가 급격히 불어난 건 수원사 부근이 개발되면서 집값 등이 올랐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 입구 화서사랑채 처마 끝에서 솟대가 이방인들을 맞이하고 있다.

팔달산 기운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무속인(49·여)은 “팔달산 정기가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맑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팔달산 정기를 받기 위해 많은 사람 들이 도처에 기도처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반드시 팔달산의 약수를 길러 먹는 무속인들이 많습니다.” 라고 말한다.
팔달산의 기운이 남다르기에 그 주변으로 많은 무속인들과 점집들이 들어설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와 관련된 분석을 내놓는 이도 있다. “행궁동 일대는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순교한 곳입니다. 비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화성행궁 인근에서 신자 2천 여 명이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연유로 사자의 귀신이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하기 위해 무속인들이 굿을 펼치고 그러다 보니 굿을 의뢰하는 발길들이 늘어났습니다.”

“미려(美麗)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


젊은이들이 수원 행궁동 점집거리 입구에 위치한 화서사랑채 앞을 지나가고 있다.

일각에선 행리단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높은 임대료로 원주민 등이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이곳에서 커피와 인두화를 파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손정은 씨(53·여)는 “빈 가게는 내놓기가 무섭게 팔려 나가고 임대료도 지난해보다 많이 올랐다”며 ‟비싼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수익이 낮은 점집과 철학관이 많이 빠져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축성할 때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미려(美麗)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름다움의 힘이 적도 제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수원화성은 이처럼 아름다움에 놀라 경외감이 들만큼 아름답게 지은 성이다. 조선후기 개혁군주의 꿈이 담긴 성곽, 그리고 그 성곽을 끼면서 조성된 행궁동 행리단길, 그리고 그 거리에 보석처럼 앉아 있는 점집들도 그 아름다운 풍경화를 완결해주는 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이 거리를 지날 때 무슨 생각을 할까. 신령을 모시고 남을 위해 좋은 일을 기원할 수만 있다면 그 또한 근사하고 아름답지 않을까. 옷깃은 여미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행궁동 점집거리는 처연하고도 곱다.


글 허행윤

한국외대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했다. 경기일보에서 30년 동안 사회부, 정치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발품을 들여 경기도의 문화와 역사 등에 대해 천착했다. 은퇴 후에도 경기도와 관련된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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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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