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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의 유일한 생존 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

경기학광장Vol.3 _ People & Life

<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의

유일한 생존 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 >


- 경기학광장Vol.3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올 한해를 뜨겁게 달궜던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이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생존 독립운동가 33분 가운데 여성독립운동가는 단 세분이다. 세분 중 한분인 오희옥 지사(93)는 용인 3대 독립운동가 명문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다. 수원 보훈타운에 거주하고 있던 오 지사는 지난 2018년 3월 급성 뇌경색으로 쓰러져 현재 서울 중앙보훈병원에 입원중이다. 그녀는 고향땅 용인 원삼면 죽능리에 새롭게 지어진 독립운동가의 집에 입주 직전 쓰러졌다. 여전히 말씀이 어려워 필담을 주고 받아야 하지만 최근 건강이 조금씩 호전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해 퇴원하게 되면 고향땅 용인에 모시고 싶어 하는 장남 김흥태씨와 오 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희옥 지사


오희옥 지사님을 병원에서 뵌지 벌써 수개월이 지났네요. 그동안 오희옥 지사님 병환은 차도가 있으신지요.


지난번보다 조금 기력이 좋아지셨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말씀은 제대로 못하시고 웅얼거리십니다. 연하(삼킴 장애)치료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하는데 하다가 끊겨 여전히 식사는 못하시고 코줄로 대신 하고 있습니다. 병원측에서는 대기 중인 환자들이 많아서 지속적인 치료가 어렵다며 안타까워 합니다.


3대 독립운동가는 오희옥 지사를 비롯해 누구누구인지 소개를 부탁 합니다.


증조할아버지인 의병장 오인수를 비롯해 할아버지 오광선(독립장), 할머니 정정산(애족장), 이모 오희영(애족장), 이모부 신송식(독립장), 그리고 어머니 오희옥(애족장)까지 이렇게 한 집안에서 3대 6명이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막내 삼촌인 오영걸은 광복되던 해에 9세였기 때문에 독립운동은 안했지만 누구보다 독립정신이 투철했습니다. 광복회 대의원을 지냈고, 나중에 광복회 본회의의 시설부장을 했으며, 한일협정 반대 데모에도 앞장섰습니다. 증조할아버지만 독립유공자 수훈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8년형을 받았는데 수형인 명부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증명을 할 수 없었던 거죠. 그런데 올해 족보에서 본명이 오성수였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해서 보훈원에 독립유공자 재신청을 해 놓은 상태입니다. 오성수로 수형인 명부가 작성돼 있을지 모르니까요. 의병장이시던 증조할아버지로 인해 온 가족이 독립운동의 길에 뛰어들게 됐는데 증조할아버지가 늦게라도 유공자로 지정되셔서 명예를 찾기를 바라고 있 습니다.



2019년 중앙보훈병원에서 오희옥 지사


할머니, 이모, 어머니 등 여성 독립운동가는 늦게 수훈을 받으셨다죠.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역할이 평가절하됐던 측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독립군 밥해준 것을 가볍게 생각을 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사이 그런 부분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독립운동은 먹고 생존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먹는 것, 싸우는 것 모두가 독립운동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만주 망명시절 정정산 할머니는 만주의 어머니,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다고 합니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일하기 시작해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허리한번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농사를 짓고 말을 키우고 12가마솥 밥을 해서 독립군을 먹여살렸다고 합니다. 좋은 말은 독립군이 탈 수 있게 제공하고, 나머지 말들은 팔아서 군자금을 조달했을 정도로 여장부의 역할을 톡톡히 하셨던 분이시죠. 만주의 할머니의 집은 밥과 말과 군자금을 제공하는 독립군기지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약했던 이모 오희영 지사는 1963년에 건국 공로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어요. 저희 어머니도 1990년에 애족장을 받으셨어요. 그런데 할머니 정정산 지사는 1992년에 돌아가셨는데 그후 1995년에야 애족장을 받으셨습니다. 이에 비해 할아버지 오광선 장군은 한국광복군 국내 지대사령관을 지내셨고, 1962년에 독립장을 받으셨어요. 또 이모부인 신송식 지사는 한국광복군 서안전방사령부 참령참모를 지내셨고, 1963년에 독립장을 받으셨습니다. 근데 사실은 할아버지와 이모부가 독립유공자심사위원을 지내셨어요. 두 분은 당시 한 집안에서 다하면 안된다면서 유공자에 넣지를 않으셨던 겁니다. 오광선 장군의 청렴함은 이미 알만할 분들은 다 알 정도로 일화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할아버지의 고향인 원삼면 죽능리에서는 할아버지가 국내지대장으로 동네에 짚차를 타고 들어오자 동네가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큰 기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네 발전은커녕 집안 조카의 군대일 조차도 일체 봐주거나 한 일이 없어서 오히려 동네분들이 서운해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와 같은 대쪽같은 처신이 칭송을 받고 있지만요. 오로지 올곧은 길만을 걸으셨던 분이세요.



이동녕 선생 장례식(1940)1열 좌측3번째가 오희옥 지사(자료출처;국사편찬위원회)


어머니 오희옥 지사는 어떤 독립운동을 하셨는지요.


어머니는 1927년 만주 망명시절에 태어났어요. 중일전쟁 중 저희 어머니 가족은 임시정부와 함께 피난을 다녔는데 1937년 11세 때 유주 피난시절에 두 살 위인 이모와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으로 활동했어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단체인데 광복진선(光復 陣線)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약칭이라고 합니다. 청년공작대는 일본군정보수집을 비롯해 지원병 모집도 하고 한중합작으로 노래, 무용, 연극도 했어요. 중국인들에게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는 가두선전도 했구요. 당시 어머니는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 의 어린이였어요. 이모 오희영도 당연히 청년의 나이에는 못미쳤구요. 그러나 어머니와 이모는 어른들이 시키는대로 일본군 몰래 일본군 진영으로 들어가서 징집돼 온 한국인 병사에게 쪽지를 전달했대요. 그리고 연극, 무용, 노래를 부르면서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고국을 그리는 망명자들의 마음도 달래주었던 거에요. 저희 어머니는 그때 반달 노래를 합창해서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오광선 장군을 닮아서 어머니가 노래를 잘 하셨어요. 무용도 잘하셨구요.


어린 나이에 많이 무서웠을 텐데요.


쪽지를 전달할 땐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했다고 하셨어요. 어린 나이지만 나라 잃은 설움을 크게 느꼈다고 합니다. 중국 애들이 가오리빵즈라면서 나라 없는 백성이라고 놀렸을 때는 어린 마음에도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고 해요. 비록 만주에서 태어났지만 평소 저희 할머니가 독립군은 모두 가족이라고 하신데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독립운동에 나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자라셨다고 들었어요. 국가는 절대적 가치였던 거죠. 어머니가 침상에서 가끔 공책에 글씨를 쓰시곤 하는데 메모 등의 글귀를 보면 일제에 대한 증오나 독립에 대한 당시의 열망을 그대로 표현하고 계세요. 독립군가도 쓰시구요. 아마 뼛속까지 깊게 독립정신과 나라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새겨져 있는것 같으세요. 몸은 늙고 병들었어도 정신은 그때 그 정신 그대로신거라고 생각합니다.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은 세계사적으로 드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3대가 독립운동가가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희 증조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됩니다. 명포수셨는데 체격도 우람하고 장군같으셨습니다. 용인 원삼면 죽능리 고향 마을에 전해 내려 오는 일화가 있어요. 일본 경사들이 동네에 들어와 말 타고서 겁주고 다니면 말짱(말뚝)을 뽑아가지고 집어던지고 그랬대요. 일본놈들 꼴보기 싫으니까 말 앞에다 말뚝을 던지신거죠. 아주 일본놈들하면 치를 떨던 거죠. 1905년 을사늑약 때하고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이 있자 의병 중군장으로 양지, 죽산, 안성 일대에서 헌병대와 경찰주재소를 습격해서 헌병과 경찰관을 사살하고 일본군과 접전했대요. 산길로 집에 돌아오다가 집 주위에 잠복해 있던 밀정의 밀고로 일진회장 송병준의 아들 송종헌이 조직한 토벌대가 들이닥쳐서 체포가 되신거죠. 그때 오광선 할아버지가 11살 때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끓어오르신거죠. 저희 할아버지는 동네에 있는 삼악학교에서 여준선생으로부터 초등학교 교육을 받으셨으니 더욱 민족의식이 크셨던 거죠. 여준 선생이 학감을 지낸 서울 종로의 상동 청년회에 입학해서 공부했고, 그후 만주로 떠나 신흥무관학교를 수석으로 마치고 교관으로 계시면서 온 가족을 만주로 불러들이셨어 요. 오광선 할아버지는 지청천 장군을 평생 상관으로, 동지로 함께 하면서 항일무장투쟁에 나섰어요. 흑하사변(자유시참변)으로 영하 40도의 감방에서 탈출을 시도해 얼음에 뒤덮인 바이칼호를 맨발로 걸어 2만여리나 되는 길을 헤쳐나온 극한의 탈출을 하기도 했어요. 만주사변후 중국본토로 옮겨 임시정부 김구주석의 지시에 따라 북경에서 비밀공작대를 조직해 첩보활동을 펼치면서 일본 관동군 참모장인 도이하라 중장을 암살하려다 만주보안대와 일본경찰에 체포돼 신의주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이때 가족들과 헤어져 저희 어머니도 광복후 10년만에야 아버지 오광선 장군을 만날 수 있 었습니다. 당시 할머니 정정산 지사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앞서 말씀드린대로 정정산 지사는 만주의 어머니, 독립군의 어머니셨습니다. 하루 열 두 가마솥 독립군의 밥을 해주면서 뒷바라지를 했었죠.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하잖아요. 저희 이모와 어머니도 어려서부터 항상 보고 듣고 자란 것이 국가와 독립이었으니 어린 마음에도 오직 나라의 독립만을 생각했던 것이죠. 이모 오희영은 중학교 공부 도중에 중국인 교사가 한국학생한테 “그러니 나라가 없지” 라는 비난을 하자 격분해서 “우리가 왜 나라가 없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광복군에 입대하실 정도로 국가관이 투철했어요. 이모부 역시 광복군이셨던 신송식 지사이십니다. 이모부는 중경 임시정부에서 김구주석 비서로 있었고 주화대표단전원위원으로도 활동을 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이모는 중경 임시정부에서 선전활동을 하시다가 광복이 되자 귀국하셨습니다. 오광선 할아버지는 광복후 유일하게 국내에 들어온 광복군으로 국내지대장을 맡으셨고 육사8기 고급장교 특별훈련반을 수료하고서 1949년 육군 대령으로 임관, 호국군 101여 단장을 비롯해 각지구 병사구사령관을 역임했습니다. 6.25참전 등을 하셨고 1956년에 준장으로 예편하셨어요.



2019년 중앙보훈병원에 입원중인 오희옥 지사가 쓴 독립군가


어머니는 평소 건강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어머니는 92세에 쓰러지셨는데, 그때까지 큰 병 없이 평소 즐겨 쓰 시던 붓글씨와 산책 등 가벼운 운동을 거뜬히 하셨어요. 누가 봐도 90세가 넘은 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가지고 계셨죠. 쓰러질 당시 행사 참석 등 많은 외부 활동에 무리가 오셨던 것 같아요. 작년 3.1절 날 날씨가 추웠는데 여러 행사장에 초청을 받아 옮겨 다니시고는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수원 보훈타운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당시 용인시와 해주오씨 문중에서 어머니를 위해 어머니의 고향인 용인 원삼면 죽능리에 ‘독립유공자의 집’을 지어주셨어요. 고향땅으로 이사할 기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사도 못한 채 쓰러지셨습니다. 요새는 저희가 일주일에 한 번씩 원삼 집을 오가면서 관리를 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빨리 쾌차하셔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죠. 그토록 살고 싶어 하던 고향땅이었으니까요. 근처에는 할아버지 오광선 장군의 생가터도 있어요. 3대 독립운동가 기적비도 바로 독립유공자의 집 근처에 세워져 있습니다.


어머니가 붓글씨를 김구선생으로부터 배우셨다죠.


중일전쟁 중 김구 선생은 아버지(오광선) 없이 지내는 저희 어머니 가족에게 미안해 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관심을 많이 보여주셨는데 저희 어머니가 16세 때 막종이에다가 붓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고는 큰 글씨를 쓸 때는 팔을 들고 쓰라고 훈시를 해주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쓰러지기 전까지 붓글씨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요. 광복 후 부통령을 지내신 이시영 선생은 한의술이 있어서 중경 임시정부시절 황달에 걸린 저희 어머니를 치료해주셨고 방학이면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일을 돕던 저희 어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다고 합니다. 당시 학병이었던 윤석중 선생은 어머니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셨구요.



좌로부터 안춘생(안중근조카) 신정원(신익희 선생 딸), 오희옥, 신하균(신익희 선생 아들)


어머니는 광복후 어떻게 고국으로 귀환을 하셨는지요.


어머니는 할머니하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해서 임정 활동에 참여하다가 해방을 맞으셨어요. 1946년에 중경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중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해 항구에 내려 1500톤 기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가 다시 인천으로 와서 그곳에 마중 나온 오광선 할아버지하고 10년만에 상봉을 했어요.


고국에서의 삶은 어떠셨는지요. 어머니는 교사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광선 할아버지와 헤어진 지 10년만에 만나신건데, 할아버지는 신의주 감옥에서 3년만에 모진 옥고 끝에 출옥해서 만주 증조할머니가 계신 한인촌에서 지내셨어요. 당시 중일전쟁 중이고 할아버지에 대한 일경의 감시가 심해서 꼼짝도 할 수 없으셨대요. 그때 저희 어머니를 비롯해 나머지 가족들은 임시정부하고 중일전쟁 피난을 다니던 때였거든요. 가족을 무척 사랑하셨던 분인데 울면서 혼자 지내는 할아버지에게 주위분들이 작은 할머니를 소개하게 된거죠. 결국 저희 어머니 가족은 귀국 후에 할아버지와 함께 지낼 수 없었죠. 다만 할아버지가 집은 마련해 주셨어요. 할아버지가 용인 죽능리에 있던 선산을 당시 쌀 열가마를 받고 파셨다고 하시거든요. 아마 그런 식으로 돈을 마련해서 생활비도 쓰고 가족들에게 원남동에 적산가옥을 마련해 주신 것 같으세요. 그러나 할머니도 그렇고 모두가 생활력이 없어서 다들 고생하면서 지내셨어요. 할머니가 지하에서 몰래 담배를 말아 팔아서 그걸로 죽도 끓여먹으면서 하루하루를 생활 하셨지요. 할머니가 용인 원삼면 죽능리에 거처를 마련하고는 오가시면서 죽능리 건너 이동면 화산리 할머니의 친정집에서 쌀을 가져 다가 주기도 하셨대요. 어머니는 광복후 할아버지가 진명여고에 입학시켜주셔서 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인 학교에서 임시교사로 1년 있다가 중국대사관에서 교사 채용시험에 합격했는데 지방으로 발령이 날 것 같아 그만두고 육군 피복창 직원시험에 합격해 경리과에서 근무하다가 6.25를 만나셨어요. 전쟁후 할아버지 친구분이 수원에서 임시교사를 채용한다고 알려줘서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어요. 1953년부터 원삼초등학교에 1년 근무했다가 죽능리 청룡분교로 옮겨서는 용인에서 8년을 근무했어요. 그후 시흥, 서울 등지의 초등학교 교사로 38년을 근무하다가 정년퇴임했어요.




용인 원삼면 죽능리 해주오씨 3대 독립항쟁기적비 앞에서 오희옥지사와 장남 김흥태씨


올해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이어서 더 마음이 아프셨을 것 같아요.


어머니가 그동안 기념행사장에 초청을 받아 다니시다가 올해는 제가 공식 자리에 참석을 했습니다. 지난 2017년 광복절 경축식에서는 어머니가 올드 랭 사인 음률의 옛 애국가를 부르셨던게 방송이나 자료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저희 후손들은 점점 나이가 들게 되면서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바른 정신으로 똑바로 살아야만 하는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저희 어머니를 비롯해서 조상님들이 어떤 분들이셨고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잘 알려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 3대독립운동가 집안 이야기를 정리한 ‘마지막 증언’ 책을 저자 박숙현이 전달후 기념사진



글 박숙현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공공감사정책학 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사주당의 태교신기, 처인성 등 용인지역학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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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3 _ 2019 겨울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2.18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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