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지독(舐犢)한 성남시의 향토사학자, 한동억

경기학광장Vol.4 _ People & Life

< 지독(舐犢)한 성남시의 향토사학자, 한동억 >


- 경기학광장Vol.4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성남시(城南市)에서 향토사학자(鄕土史學者)로 걸어온 길과 맡았던 역할을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니 우선은 감회가 무량하다.

나는 성남시(城南市. 옛날 광주군 돌마면, 낙생면, 대왕면, 중부면 일대) 분당구(盆唐區) 율리에서 540여 년간을 세거(世居. 대대로 살아온)해 온 집안으로 독립운동가 송헌(松軒) 한백봉(韓百鳳.건국훈장 建國勳章 추서 追敍) 선생의 넷째 손자로 태어났다.

송헌(松軒) 선생은 가난하지만 뛰어난 학자이자 선비요, 경기도의 서광주(西廣州) 일대에서 기미년(己未年)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3000명을 시위에 참여시키시고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이끌다가 일제의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내란 및 음모죄로 9년 8개월을 선고받고 대한인으로서 내 나라의 민족 자존의 독립을 주장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는 확고한 사상과 전신사고로 항고(抗告)에 항고를 거듭했다. 그러나 최종심에서 3년 8개월을 선고를 받고 홀로 옥고를 감내 하던 중 영친왕(英親王)과 방자(房子)여사의 국제결혼으로 인한 특사로 13개월 만에 방면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이다.

나는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익히고,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웠는데 6.25가 터졌고 9.28수복이 되자 할아버님께서 영면하셨다. 위로 세분의 형님들도 할아버지 덕택에 한문에 관한 한 막힘이 없으셨다.


세월이 유수하여 청년으로 성장한 나는 먹고살기 위하여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개인사업을 하다가 분당신도시가 건설되면서 고향집에 자주 와서 마을 이름들을 들어 보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그래서 여기저기 이런 마을 이름은 안 된다고 진정하였으나 의미 없이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2002년 9월에 분당신도시 제6차 입주 시에 이매촌(二梅村) 703동 805호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는 율동마을 뒷산의 이름인 영장산(靈長山)의 이름을 찾아 달라고 국립지리원에 청원서를 냈다. 조선시대 지도와 영장산 인근에 산재한 각 문중 족보에 있는 묘산도를 검토하고 대학도서관 등을 돌아다니며 지명자료를 찾아서 자료를 정리하고 자료집을 만들어 2006년 봄, 영장산의 이름을 지도에 올려달라고 정식으로 청원하였다.


또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원주민들을 설득해 우선 율동 3.1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2007년 가을에 결성하여 사무총장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모금을 시작하여 예상 소요자금을 준비하여 성남시나 어떤 단체의 지원 없이 2009년 3월 1일 오전 10시에 율동 공원관리사무소 앞 광장에서 성남시에서는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기념추모회를 개최했다. 당시의 김병량 성남시장은 물론 염동준 성남시의회의장과 남선우 문화원장,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및 유관단체장 등 성남시의 유명인사들이 거의 다 참석했다. 그날 이후 분당신도시에 입주자들이 이왕이면 율동3.1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분당3.1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바꾸자고 하여 분당 3.1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가 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뜻있는 지역 유지들의 도움으로 모금을 하여 3.1절(節)행사를 매년 계속해 왔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시와 시의회 관계자와 만나서 분당신도시의 모든 마을이름과 시설물의 명칭을 다시 제정하여야 한다고 설득하는 한편, 전국적인 동명조사를 시작하여 수많은 마을의 이름이 1, 2, 3, 4동은 물론 어떤 동은 12개 또는 13개 동의 이름이 공존하는 지료를 첨부하여 정식민원으로 제출했다. 그렇게 시작된 분당신도시의 동 이름 재제정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이 모아졌으나 논란은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역이름과 마을이름이 모두 재정리되었다.


2000년 6월 20일 국립지리원에 청원하였던 영장산의 이름이 대한민국관보 제14553호에 영장산(靈長山)413.5M로 확정되었다. 그해 여름 7 월 20일에 무더운 더위를 무릅쓰고 지역주민들과 힘을 합쳐 시멘트와 모래 등을 짊어지고 영장산 정상에 올라가 죽마고우인 이윤석 군이 기증한 표지석을 세우고, 간략하게 약식 고유제를 지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남선우 문화원장은 나에게 성남문화원의 일도 같이 해 주었으면 한다는 의견(意見)을 주었고, 주변 원주민들도 적극 권장해 후일 문화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같은 해인 2000년 10월 3일에는 성남향토인물에 관한 세미나에서 나의 입향조이신 문정공 한계희(韓繼禧)선생에 대한 논문에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성인(聖人)반열로 평가 받은 유일한 분이라 는 사실을 발표했다.

또 안암동이 원래는 고암리였으나 입향조께서 정승반열에 계시면서 녹봉을 받아다가 가난한 선비와 고아나 과수댁들에게 나누어 주어 한 정승이 사는 곳에 가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구휼해 사람들이 북고(鼓)자 고암리를 편안할 안(安)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해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후에 문화원 연구위원은 향토사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한다고 하여, 첫 해인 2002년도에 「일제(日帝)에 의해 변경된 성남지역의 지명연구」라는 제하의 논문을 썼다. 일제가 조선정기 말살책으로 인하여 1914년 대한제국 행정구역 개편, 마을이름이 합성되면서 성남지역에서만 39개 마을의 이름이 사라지고 엉뚱한 이름으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이 논문집으로 발간(發刊)되었다. 이후 많은 학자들은 물론 지역주민들까지도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나 너무 좋은 반응이 있었다.


2003년에는 『「성남지역의 욍실문화1」이란 논문을 발표했는데 성남 지역에서 조선시대에 최대의 군사훈련 중의 하나로 행해진 대열이라는 이름의 군사훈련에 동원된 삼만 여명의 정규군의 군사와 8-9만의 솔종 (보급을 위한 노무부대)을 합하면 11-12만의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었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또 이 같은 훈련에 왕들이 직접 참관하는 행차 중에 대차(大遮)의 규모와 왕세자의 소차와 왕실 종친들의 자리와 삼공육경과 국가 원로들의 좌석배치를 면밀하게 분석하였다. 특히 낙생행궁이 있었다는 사실을 『성종실록』의 기사 즉 ‘성종 8년 10월 4일에 과천 막계동에서 타위하는 것을 구경하고 낙생행궁으로 돌아왔다’는 기록과 ‘동년 10월 8일에 어가가 낙생행궁에서 이르니 백관이 지영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밝혀내었다.



그 다음 해인 2004년에는 「율리(栗里)마을의 구비문화」를 썼는데 율리에는 한성백제의 최초의 절이 세워졌다는 전설, 금강사에 얽힌 이야기, 율리라는 마을 이름을 얻게된 사유 등을 소개하였다. 지금도 24-5개의 지명이 불교 용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원주민들을 비롯한 지역 입주민이 자기가 사는 마을도 써 달라는 주문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인근 마을의 지명을 샅샅이 뒤져서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2005년 9월 발간된 『성남문화연구』제12집에 「성남지역의 왕실문화 연구Ⅱ」를 쓰면서 왕실문화의 시대적 변화의 흐름과 낙생행궁에 관하여 좀 더 깊이 있게 다루고 산행(山行. 사냥)이라고 불리는 수렵이 군사 훈련의 일종이며 또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아주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군사훈련의 일종이었음을 기술했다.

2005년 12월 30일에는 성남문화유적을 썼는데 46곳의 멸실 문화유적에 관하여 썼으며, 이때 지역에 전해오는 전설과 설화와 각종 문헌에 기록된 내용을 망라하여 기술하였다. 낙생행궁이 있었던 사실은 조선 왕조실록 성종 8년 10월 4일과 동년 10월 8일 기록에서 확인하여 재수록하고, 가실고개에 얽힌 전설과 설화를 상세히 수록하여 가실이와 설처녀 전설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또 달네내 고개에 얽힌 달아와 달오의 슬픈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일제가 만든 ‘달래나보지고개’라는 지명은 조선인들의 정조관념과 형제 남매간의 우애를 파괴하려고 조작한 설화라는 사실을 주장함으로서 많은 분들에게서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이렇듯 마을마다 전해오던 전설과 설화 속에 감추어졌던 고장의 아름다운 지명과 지금은 사라져버린 옛날의 유적과 유물들을 재삼 언급함으로써 향수를 느끼게 하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2006년 3월 1일에는 드디어 위대한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성남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준공하고 기념식을 올리게 되었다. 수 년간을 시청 관계자들과 이대엽 사장과의 언쟁도 많았기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었다. 다음에 쓴 것이 성남지역의 전설 설화였는데 한성 백제 시대부터 전해오는 지명만도 삼십여 곳에 달하는 방대한 지명의 원천을 찾아 조사하고 연구하여 기술했다.

2006년 5월 16일에 개최된 천림산봉수지 원형복원을 위한 워크숍에서 천림산봉수지 원형복원 추진위원으로 활동하던 나는 강사로 나서서 천림산봉수에 관한 정곡을 찌르는 특강을 했다.

동년 7월 4일에 개최된 천림산봉수지 원형복원을 위한 시민토론회에서 편제로 본 부속건물을 발표해 이제까지 잘 모르고 있던 봉수군의 편제와 봉수군의 막사와 부속건물들의 재현을 할 수 있는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했다.

이러한 나의 활동영역이 잘 알려지면서, 한국토지공사에서 2005년에 판교신도시 마을이름 및 시설물 이름 붙이기 사업을 맡을 수 있는지 성남문화원을 통해 제의해 왔다. 사업자금이 부족해 문화원장이 나를 불러 할수 있겠느냐? 고 하셔서 내가 돈이 문제가 아니고 문화원의 명예가 걸린 사업이니 하자고 제안해 1년 반동안 책임연구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날 이후 동분서주하며 원주민(原住民)들을 마을마다 2-30여분씩 모시고 3차에 걸쳐 이름을 검토하고 심층토론을 한 후에 설문조사를 실시해 최종 보고서를 만들어 2006년 7월 8일에 완료하고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 경기도, 성남시에 제출했다. 결과는 토지공사사장으로부터 아주 감각적이며 토속적이고 신선감이 있는 미래지향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흡족하다는 말을 문화원장에게 전해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국토계획전문가인 형님의 일을 도와 드린 적이 몇 번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2006년 9월 11일에는 그동안 성남시내에 능묘를 모시고 300년 이상을 세거하여 살아온 문중을 상대로 전수조사 하였던 기록과, 문중의 적극 협조를 구하여 성남시 세거문중협의회를 구성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핵심역할을 하여 창립준비와 총무 담당이사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2007년에 총무 담당부회장이 되었다가 창립 2주년에 회장으로 선임되어 현재까지 성남시 세거문중협의회를 이끌고 있다.

송파신도시의 이름에 대해 땅이 제일 많은 성남시를 제외되고 송파신도시로 부르는 것은 부적합하고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경기도, 건교부, 서울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등에 성남문화원을 통해 이의를 제기했다. 여기에 성남과 하남이 합세하여 이의와 논리를 정리해 건의했고, 결국 최종적으로 중앙지명위원회에서 위례신도시로 이름을 바꾸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런 가운데 마을 지명을 만들 때에 전설과 설화와 각 문중의 족보에 명기된 지명을 비교하여 성남시내 모든 마을의 지명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 자료가 후일 성남지명총람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근본자료로 활용되었다. 성남시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2007년 에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면서 2007년에는 성남지역의 교통과 통신연구를 썼는데 천림산봉수와 낙생역, 그리고 대야원, 음촌참, 판교원 등을 수록했다.



2008년에는 성남지역에서 복원하여야 할 확인된 문화유적을 써서 성남지역이 서기전 184년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던 준왕이 위만에게 내침을 당하여 광주시 경안읍에 소도지를 정하고 진국이라고 한 이후에 한성백제가 개국한 후에는 495년간의 찬란하였던 한성백제문화의 보고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특히 고구려 장수왕이 서기 475년부터 75년간 강점하였던 한수의 남북일대의 땅을 진흥왕이 제나연합군으로 서기 551년에 되찾아 주었다가 서기 553년에 성남시 일대를 돌아보고는 가히 영락장생지지라며 신라가 강점하고 남한산성을 주장성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는 것과, 후에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고, 기름진 땅에 물을 대주기 위해 진흥왕이 화랑도를 동원하여 화랑보를 만들었던 전설과 설화를 수록하여 알려주었다.


2009년에는 경기도 향토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선임되어서는 더욱 열심히 일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해 8월 15일 성남문화원이 주관한 학술 토론회에 제출 발표한 글이 ‘성남지역 3.1운동의 전개양상과 성격’이었는데, 참석한 학자들과 시민들이 모두 이 지역 선민들이 민족자존의 애국사상을 바탕으로 엄청난 응집력을 보였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2009년에 경기향토문화연구소에서 편찬한 『경기사학연구』에 「삼국사기에 나타난 경기지역의 성터 및 지명연구」를 실었다. 경기지역에 산재한 수많은 성지와 지리를 상세하게 추적 조사 연구하여, 40곳의 성지와 50개의 군현을 매우 심도 있게 다루었다는 칭송을 들었다. 특히 아차산을 거의 대부분 고구려의 성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백제의 성곽이라는 사실이 기록되어있는 것과,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패토한 이후에 고구려의 보루(작은성)였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내었다.

2009년 11월 18일에는 성남시문화상 중 학술부문상을 수상하였다. 그동안 향토사학자로서 동분서주하며 각종 학술회의나 토론회를 거치면서 깊이 있게 연구한 자료들을 논문으로 집대성하여 발표한 결과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2010년에는 ‘성남지역의 역사와 충절’을 썼는데 해당 문중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고마움을 표했다. 또 이 글은 그해 『성남 인물지』를 만드는데 크게 일조했다. 내가 회장으로 있는 성남시 세거문중의 선대 조들은 말할 것도 없이 80여개 문중의 선대조들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승정원일기, 기타 문집 등을 발굴ㆍ정리하여 당해 문중과 협의하여 최종 정리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일로 대단히 큰일을 했다는 찬사를 들었다. 성남시 세거문중협의회에서 수천만 원의 지원금도 아끼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2011년에는 ‘백제시대를 중심으로 한 남한산성의 재조명’을 써서 남한산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길라잡이가 되었다. 당해 성남시 향토 문화연구소 소장을 하면서 ‘성남의 백제 전설 설화’를 썼는데 성남(城南)에 아직도 약 40여 곳 이상의 한성백제 때부터 전해오고 있는 지명을 열거해 잊혀져 가던 백제문화를 상기시켰다. 성남이 한성백제 문화의 산실이었으며 찬란한 문화의 보고였음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2012년에는 ‘성남지역의 선현 묘역’을 쓰는데 덕수이씨 의정공파 문중의 족보와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기타문집의 자료를 위주로 썼다. 이 외에도 판교마을지를 시작으로 대왕마을지에 9개 마을의 지명과 인물을 쓰며 오야동 장골의 성남 최초 공소(公所. 작은 성당. 건립 약160-170년 전 추정)를 밝혀내기도 했다. 복정, 태평동 마을지에는 3개 마을의 지명과 역사적인 인물에 대하여 기록했다. 또 금광, 단대, 상대원 마을지를 편찬할 때에는 전통의 관혼상제에 대한 논문과 함께 정통 민속 유래와 재래식 가정 응급치료 방법 및 치료약을 알려 주었다. 아울러 돌마 마을지(상)에는 6개 마을의 전통적인 유래와 함께 전설과 설화를 토대로 아름다운 지명을 썼다. 돌마 마을지(하)에는 5개 마을의 전통적인 유래와 전설과 설화를 근거로 지명유래를 썼다.




낙생 마을지에는 11개 마을에 전해오는 전통적인 아름다운 이름과 경기지역 특유의 사투리로 인해 변음 처리되어 불려오다가 굳어져 버린 우리 고유의 이름을 확인한 지명과, 세거문중의 입향조를 비롯한 시대적 배출 인물을 살펴 당대 인물들에 대한 학문과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파악해 기록했다.

성남 문화유산 해설사 희망자들을 모집해 향토사의 특강으로 약 150여명의 해설사를 배출하였는데, 현재 거의 문화유산해설사로 활약중에 있다. 또 「3.1독립만세운동의 실태」라는 제하의 논문은 이 지역의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시위군중의 수효가 전국 최다 인원이었던 점을 밝혀내었다. 그와 함께 다른 곳에는 종교인, 학생, 보통 사람들로 구분되어 있으나 성남에는 보통 사람들만 3000명에 이르렀던 점을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해석을 더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도자인 한백봉 선생의 고매한 학문을 비롯해 사회적 활동 행적과 이념적 사상에 대한 내용, 민족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포함한 역할과 시대적으로 피나는 고충과 번민을 상세하게 정리했다.

또한 3.1독립만세운동가인 주도자인 한백봉, 낙생면장 출신의 남태희, 천도교 광주이천 지회장 한순회의 가계를 입향조부터 본인까지의 직계를 정확하게 정리하여 기록하였으며, 성남시 세거문중협의회를 통하여 친목을 다지면서 세거문중간의 교류를 활성화하여 지금까지 협조적인 모임으로 잘 이끌어 오고 있다.

2012년 7월 4일 개최한 학술회의에서 「성남지역 지명유래에 나타난 역사」라는 논문으로 좋은 반응이 받았다. 그해 11월 한민족전통연구회를 창립하여 회장에 취임한 후 각 문중과 연합하여 2014년 6월에는 능묘제사 시연을 하였는데 많은 문중들이 동참하여 성공리에 행사를 마쳤다. 여러 문중에서 시연홀기로 제사를 모시기 시작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2015년까지 경기도 불천위 전수조사 당시에도 적극 협조하여 청주한씨 문중 선대조 11명의 불천위 조사에 헌신했다. 2016년에는 경기도불 천위문중협의회를 만드는데 적극 참여하여 현재 학술과 전례 담당 부회장을 맡고 있다.


2017년에는 『성남지명총람』을 만들 때, 그동안 기록해 두었던 자료를 선뜻 내어주어 크게 활용 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이 책이 나오자 많은 시민들이 공급을 요청하였는데 너무나 내용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8년에는 ‘경기도불천위문중 제례 시연 및 연찬회’에서 「제례의 기원과 사당 제례」라는 논문으로 특강을 한 후에 시연회의 집례를 맡았다. 그때 예기와 주자가례, 가례집람, 격몽요결을 상고해 정리한 홀기로 시연함으로써 조상 대대로 전래된 전통의 사당제례에 대하여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현을 하여 많은 전문가와 문중인의 찬사를 받았다.

한민족전통연구회가 청주한씨 문정공파 문중과 협의하여 문정공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에서 2013년 4월 18일부터 시작한 한문 무료 강좌가 벌써 만 6년이 지나고 7년 차에 접어들었다. 부획(部,劃)과 변을 철저히 가르치고 천자문(千字文)과 사자소학(四字小學) 중에 내편과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격몽요결(擊蒙要訣), 논어(論語)까지의 전 과정을 가르치면서 갑골문(甲骨文)의 어원과 한 글자 한 글자마다 파자(破字)를 하여 가르치며 글자를 쉽게 이해하도록 배려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강의논문이 십여 편이 넘는데 강의 명칭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성남의 유래및 전설설화, △성남지역의 역사와 충절, △성남의 명문가 청주한씨, △성남지역의 3.1운동, △성남의 전통왕실문화, △남한산성, △한성백제와 전통의 지명, △성남의 지명해설, △남한 산성의 역사적 재조명, △성남의 세시풍속, △성남의 불교와 사찰, △성남지역의 민속신앙, △성남지역에서 복원할 문화유적, △성남의 충절, △천림산봉수, △이름은 역사다 등이다.

나는 540년 전 부터 조상 대대로 성남시에 세거한 청주 한문(韓門)의 문중인으로서 역사적 사명과 시대적 소명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각오로, 이 생명 다하도록 우리나라 상고사는 물론 성남의 역사와 문화유적발굴과 조사연구에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을 감히 표명하면서 글을 마친다.





글 한동억

1946년 성남에서 태어나 성남지역학 발전을 위하여 평생 헌신하였다. 성남3.1 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초대 사무총장 및 상임부회장, 성남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남학 연구소 소장, 성남시 세거문중 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 다. 성남의 지명 등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한 공로로 성남시문화상(학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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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4 _ 2020 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3.30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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