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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운명처럼 다가온 가야금 인생 韓律기쁨국악단 신화정 단장

경기학광장Vol.5 _ People & Life

< 운명처럼 다가온 가야금 인생 韓律기쁨국악단 신화정 단장 >


- 경기학광장Vol.5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신화정 단장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야금을 만나 가야금 연주자로서, 또 가야금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신화정 단장.

어릴적 초등학교에서 배운 농악을 시작으로 중학교 때 운명같은 가야금을 만났고 고등학교 때 배운 가야금을 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대학에서 홍은주 교수님으로부터 김윤덕 가락을 사사받고 국가지정무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이신 이영희 선생님을 만나 이수자가 되었다.

그뒤 계속 가야금을 알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 당시 국립국악원 예술단장인 송인길 선생님에게 최옥삼 가락을 사사 받았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23호 가야금 산조 이수자이며 국가지정문화재 1호 종묘제례악 전수중이다.

韓律(한율)기쁨국악단 단장으로 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를 역임했고 사)한국국악협회 화성시지부 부지회장, 사)한국예술인총연합회 화성지회 감사, 사)한국국악협회 화성시지부 부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사)가야금 산조 보존연구회 회원이다.


2004년 대학출강을 시작으로 평촌여성회관과 여러 청소년회관, 화성반월초등학교 및 중.고등학교, 화성팔탄복지회관 등 다양한 곳에서 가야금을 비롯해 국악을 알리는 전도사가 됐다.

지금은 화성행궁 토요상설 공연, 화성시문화재단 초청 공연, 경기박물관 초청공연, 수원 예술인 축제, 팔탄면 효경로잔치 공연, 한음정기연주회 특별공연, 화성예총 공연 외 다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포천 출생. 1남 2녀의 막내로 자라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2학년때 아버지의 고향인 남양주로 가서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공무원인 관계로 삼 남매 모두 출생지가 달랐다.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경기도 시골. 어느날, 시골학교 지원사업이라는 명목으로 10살 아이 손에 쥐어진 장구채!

무슨 이유인지도 알지 못한 채 초등학교 3학년 여자 아이들 60명의 풍물반(그 당시 농악반)이 만들어 진 것이다. 당시 강사로 온 송영실 선생님의 권유로 그냥 장구를 하라기에 장구채를 잡았고 그러기를 6개월. 갑자기 3살 더 많고 덩치도 훨씬 큰 아이랑 자리가 바꾸라는 선생님 말씀. 그렇게 해서 잡게 된 꽹과리. 풍물놀이의 우두머리라 불리는 상쇠가 된 것이다.

그때부터 국악에 인연을 갖기 시작했고 그 반은 학교와 지역을 대표하며 전국에서 나름 농악으로 유명한 학교가 되어 각종 대회를 늘 휩쓸고 다녔고 TV출연도 했으며 여기저기 큰 행사에 불려 다니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농악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그녀에게 발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몇몇 애들이 모여 한국무용을 배우고 있었고 그녀는 이유도 모른채 혼자 그 알지 못하는 느린 음악을 틀고 발레연습을 해야만 했다. 그러기를 1년. 도저히 혼자 발레하는 걸 견딜 수 없어서 선생님께 빠닥빠닥 대들었다. 한국무용하는 애들과 같이 배우고 싶다고. 그래서 다른 아이들과 같이 한국무용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국민학교때 풍물반과 한국무용반을 끝으로 무용을 하는 아이들은 특기생처럼 다시 중학교에서 모아 무용반을 시작하더니 갑자기 가야금 반이 되었다.


어릴적 국악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 송영실 선생님. 지금도 변함없이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외길인생을 걷고 있다.


“어머 너 천잰가 보다!”


그렇게 만난 가야금.

첫 수업에 가르치는 선생님은 놀라시며 하신 말.

“어머~ 너 천잰가 보다!”

이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가야금’이란 것. 시골 동네 아이가 가야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 무용 선생님 댁에 어느 하루 놀러갔던 일이 있었어요. 그곳에 가야금이 있었는데 송영실 선생님이 ‘한 번 뜯어 볼래’ 하시며 손가락 하나로 대충 뜯는 아리랑을 가르쳐 주셨지요.” 그러나 그녀는 중학교 가야금 선생님에게 ‘예전 딱 한 번 뜯어 봤어요’라고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천재인가봐’란 소릴 듣고 나선 천재처럼 그저 열심히 공책 스프링으로 연습해서 칭찬을 받으려 했다.

인생은 누군가의 칭찬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결정이 되는지 그때 알았다.

“학교에 오는 가야금 선생님들은 이상하게도 서울 최고의 음악대학 출신들이셨고 그분들 중에 내게 꿈을 주신 건 황미옥 선생님이었어요. 그분은 저에게 가야금을 배워서 음악대학을 들어가 대학교수가 되라고 하셨고 그때부터 그것은 저의 꿈이 되었거든요.”

지금도 그렇지만 최고의 명문대학을 나와도 모두 교수가 되는 건 아니였다.

그런 걸 알 턱없는 중학교 2학년짜리.

나름 가야금 전공을 목표로 그의 장래희망은 막연히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음악대학 교수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것 그 누구도 뜻대로 되던가. 시골이 늘 그렇듯 지역 고등학교로 자동 입학하게 됐다.

그래도 나름 가야금은 놓지 않았고 각종 대회 때마다 심사위원으로 오신 교수들이 렛슨을 오라고 권하셨지만 그녀는 집안 형편을 늘 스스로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니 배우게 해 달라고 조를 수가 없었다. 그저 부모님을 힘들게 하는 것 같은 게 싫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은 그저 능력껏 열심히 하면 되는거라 믿었기에 그녀는 딱 그만큼의 인물이고 출발 때부터 정해져 있었지 않았나 싶었다. 시골 아이는.

하지만 그렇게 재수생이 되고 입시를 한 달 앞둔 어느날 지방으로 대학에 간 친구를 만나러 간 것이 지금의 길로 오게 한 인생의 두 번째 전환기가 되었다.

늘 옆에서 함께 연습했던 친구는 대학생, 그녀는 재수생.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 뭔지 모를 기분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어머니가 위로의 말을 주었다.

“너 힘들면 그냥 편하게 해~ 니 친구 있는데는 친구랑도 같이 있을 수 있고 거기는 붙을 수 있는 거지?”

이 한 마디에 팔랑귀는 입시곡을 바꾸고 나름 신설 대학교라는 것에 의미를 두고는 남은 19일동안 아마 제일 열심히 악기연습을 하지 않았나 싶다.


2011년 김윤덕류 가야금 산조 보존회 공연때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홍은주, 이영희, 신명숙 선생님을 함께 만날 수 있었다.


은사를 만나 배움이 꿈이 되어


“그때의 선택을 후회해 본적은 없어요. 덕분에 더 많은 것을 받았고 더 많은 기회를 얻었고 지금은 그것에 감사하며 겸손함에 살아가고 있어요.”

이유는 그녀의 인생을 결정짓는 스승을 만난 것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이수자 홍은주 교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이영희 선생을 만난 것이었다.

“선생님께 저를 데려가 주셔서 나는 지금 이수자가 될 수 있었고 또 내가 대학교수가 꿈인걸 알고 계셨기에 졸업 이후에도 계속 공부해야 한다고 계속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수원대학교 음악대학원 국악과가 생겼다는 소리에 그곳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진정한 쟁이로서의 삶을 살았던 적은 없고 지금까지 그저 늘 쉼 없이 가르치며 살았던 세월이 더 많았다. 지금도 ‘나는 늘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것을 생각하면 스스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는 아직까지 배우고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이다.

우물안 개구리였던 삶! 더 넓은 세상을 뛰어오르지도 오르려고도 하지 않고 가르쳐 주는 대로 폴짝 폴짝 한 번씩 뛰며 살았다고 한다. 이미 대학 재학시절부터 가야금 전공으로 입시생 제자들을 가르쳤고 졸업 이후 스승님의 활동지역에서 국악단을 함께 이끌었다. 그의 제자들이 곳곳에서 강사들이 되어 가야금을 비롯해 국악을 알리고 발전시키는데 마중물 역할을 한 것이다.



신화정 단장은 어린 제자들에게도 가야금의 특징을 알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우리의 전통악기인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미를 전해 주고픈 마음이 간절하기에 가르칠 때마다 가야금이 왜 좋은지에 대한 설명이 늘 길어지곤 한다.


좌절과 희망 그래도 가야금


그러던 2000년 그녀의 나이 31살. 갑작스레 한 해에 부모님을 모두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다. 누구라도 한번은 겪는 슬픔이지만 그에게 유독 마음의 큰 충격으로 다가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후 한동안 세상과 단절하며 살았고 1년뒤 어느날 이영희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경기도 국악협회에서 주최하는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있어 수원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때 당시 이영희 선생은 전국국악협회 이사장이었다.

“선생님 국악협회는 뭐하는데예요?”

뜬금없는 그녀의 물음에 이영희 선생은 갑자기 협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국악협회는 2002년 당시 부천지부를 통해 경기도지회 총회에 참석했다가 이사로 등재되어 본격적인 협회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당시 국악협회 경기도지회에는 민요, 무용, 농악, 연희분과 등 몇 개의 분과가 존재했고 신화정 단장이 활동하기 시작하며 가야금을 중심으로 기악분과를 만들었다.

전국국악협회가 아닌 지방국악협회에 기악분과가 존재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그 당시 기악은 대부분 대학에서 전공한 사람들이 많았고 민요나 다른 분과는 나름 비전공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경기도지회 기악분과의 시작은 그의 전공분야인 가야금으로 시작했기에 항상 머리 속에는 빨리 연주단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기회를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그 이후 그녀는 부모님을 잃고 미처 마치지 못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당시 대학에 생기기 시작했던 유아국악교육 대학강의를 시작, 효과적인 국악 교육방법을 잘 알려주었다.



2018 韓律기쁨국악단 정기연주회



2018년 화성시 풍년기원 백중제 공연


그때 경기도에는 용인대와 수원대 두 개 대학에 국악과가 있었다. 하지만 졸업하면 가르치는 제자들이 무대에서 공연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2003년 5월 경기도지회 내 기악분과를 만들고 韓律가야금연주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렇게 제자양성과 함께 가야금을 알리며 참 바쁜 세월을 보냈다. 신화정 단장은 ”17년 전 이영희 선생님으로부터 가야금을 이수했으니 이제는 제가 제자들에게 전수하는 역할만 남았다“며 ”지금의 韓律기쁨국악단은 그런 의미의 활동이라고 보면 될 것“이라고 설명 했다.

하지만 점차 가야금 연주단에서 실내 악단, 최대 30명 이상의 관현악 편성까지도 가능했고 경기도립국악단이 생겼지만 가야금을 전공한 이들이 모두 쓰여질 수 없는 것.

그래서 그녀는 작은 부분이라도 감당하자는 마음에 제자들과 함께 나름 여주쌀축제, 그리고 광명외국인을 위한 공연, 경기도 박물관 특별 상설 공연, 화성 행궁단 오맞이 축제, 2004년 국악강사풀 제 오프닝 공연 등에 참석하고 각 지부에 크고 작은 행사에 공연할 수 있는 길을 열어갔다.

늘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연을 통해 단원들에게 풍족한 출연료를 챙겨줄 수가 없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고 점점 어깨를 누르기 시작했다. 몸은 늘 바빴으나 마음은 편치 못했다.

“가야금을 한다는 이유로 나름 저는 살아가는 동안 늘 사람들의 관심을 샀고 부러움도 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듯 예술의 세계는 고통의 꽃들이 피고 지는 꽃밭이죠.”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화성시 팔탄 액티브시니어들을 대상으로 교육해 오랜 시간 함께 한 韓律기쁨가야금실버연주단


가야금을 했다는 이유로 예술가?


그에게 가야금은 남들보다 시간을 좀 더 썼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냥 다른 사람과 다르지는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가 활동하던 시절은 가진 능력과 실력보다 조금 더 과하게 보상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감사했지만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국악을 전공하고 앞으로 사회에 나가 그들에게 주어지는 예술가로서의 길은 과연 어떻게 펼쳐지게 될 지 늘 걱정이 앞섰다.

“가야금이 점점 사회적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너무나 열악한 환경을 가지고 살아야 할 현실을 알기에 전문가가 되라고 권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어 버렸어요.”

하지만 그는 지금도 어린 학생들이나 취미로 하는 제자들에게 가야금의 특징을 알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우리의 전통악기인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미를 전해 주고픈 마음은 간절하기에 가르칠 때마다 가야금이 왜 좋은지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곤 한다.



제15회 화성예술제 공연


자연의 소리를 품고 있는 악기. 그리고 스승의 추모공연


신화정 단장은 매년 대학생부터 일반인들까지 가야금 산조 이수자들을 함께 초청해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다른 이수자들과 함께 국악원 예학당과 풍류관 등에서 분기별 정기연주회도 열고 있다.

신 단장은 정기 초청연주회 요청이 있을 때마다 우리 국악인 가야금의 매력적인 음색을 선보이는 감동의 무대를 열고 있으며 지금은 이수자들과 함께 화성지역에서 주로 공연을 열고 있다. 지난해 6월에는 남양향교에서 추모공연을 가졌다.

그의 스승인 故 홍은주 선생을 추모하는 공연이다.

자신의 인생에 전환점을 찍어준 가야금 연주가 고 홍은주(1957~2017)는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이수자로서 인간문화재 이영희 문하에서 수학했고 남창가곡(男唱歌曲)의 인간문화재 홍원기(洪元基, 1922~1997) 문하에서 가곡과 가야금 정악을 익혔다. 연주자로 또 가야금 교육자로서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2019년 韓律기쁨국악단 정기연주회 및 고 홍은주 선생님 추모공연. 매회 기쁨을 주제로 정기공연을 갖고 있다.


신화정 단장은 스승인 홍은주 선생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며 유언과도 같은 스승의 유품을 모두 들고 오면서 하염없이 울고 울었다. 그리고 스승의 길을 어떻게 밟아갈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신 단장은 “스승님이 떠나신 후 그것을 기념하는 추모공연은 지역의 숨은 유형문화재인 남양향교와 무형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더 해보고 보전해 보자는 의미를 갖고 진행한 공연이었다”면서 “움직일 수 없는 유형문화재와 움직이는 무형문화재의 만남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소회했다.

그는 “선생님은 늘 ‘게으르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 보라’고 항상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공연을 통해 되새겨 보게 됐다”면서 “옛 성현들의 배움을 헛되게 여기지 말고 옛 것을 익히고 새롭게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전통을 이해하고 지켜 나가는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승님은 가야금을 너무나 좋아하셔서 평생 가야금을 제대로 알고 싶으셨던 분이다. 나도 일 년에 한 번 숙제처럼 선생님의 위한 추모공연을 하며 그때 하신 말씀을 되새기고 되새겨 보게 된다.”



고 홍은주 선생님의 추모공연을 유형문화재인 남양향교에서 무형문화재인 가야금 연주로 펼쳐 의미있는 공연을 갖기도 했다.


‘나? 그냥 가야금이 너무 좋아서~’


신화정 단장은 지금 어떤 것도 이루고 싶은 욕심은 없다.

그저 그녀에게 왜 가야금을 하느냐 물으면 그 역시 “응~ 그냥 가야금이 좋아서...”라고 답한다.

그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라고 물으면 항상 고민한다. 이 갈등은 늘 그녀를 무겁게 하지만 “내게 가야금은 그냥 좋아서...”이다.

신화정 단장에게는 어릴 적부터 가장 가깝고 편한 친구가 되어 버린 그리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인연들을 만들어 준 것, 모두가 가야금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익어가는 그의 가야금 인생 37년이란 시간 속에 느낀 많은 감정들을 퍼부어 낼 수 있는 소리 역시 가야금이다. “나를 오로지 받아주는 친구같은 가야금은 아마 내게 오랜 시간 겸손하지 않으면 좋은 소리를 뜯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작은 바램은 큰 무대든 작은 무대든 어떤 쓰임이라도 제대로 쓰여지길 바랄 뿐이다.

“최고의 연주자들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면 되고, 최고의 학벌과 재능을 가진 지식인들은 많은 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면 될 것이고, 나는 어딘가에 조금이라도 쓰여 질 곳이 있다면 내가 받은 만큼의 것을 다시 나누며 작게라도 쓰여지리라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요즘같이 발 빠른 세상. 느림을 따르는 그녀는 천천히 욕심없이 좋아하는 것을 하며 가르치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가늘고 화려한 음색을 띠는 열 두 줄 가야금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음색을 널리 알려 많은 국민들이 우리 국악을 사랑하고 관심을 갖게 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가야금을 향한 그녀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추모공연을 대신해 선생님을 추억하며 공연 때마다 남기신 영상과 사진으로 영상공연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누가 그랬던가.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이고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침이 있기에 배움이 있고 배움이 있기에 전통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 화성시 예술투어


글 이형찬

홍익대학원 국어교육과를 마치고 20여년 주간신문 및 인터넷신문 언론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화성시에 기반을 둔 주간신문 화성저널에서 근무하고 있다. 성산효대학원대학교에서 한국의 효문화를 연구하는 효문화학과 다문화학을 전공하고 경기학연구자모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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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5 _ 2020 여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20.06.30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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