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지지씨

내 말에 찬성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나의 적이다!*

(1)

닭은 달걀이 다른 달걀을 만드는 도구일 뿐이다

– 새뮤얼 버틀러




1.

기억력 감퇴. 이 현상이 나만의 문제인지,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인지, 아니면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된 우리 시대의 풍토병인지 모르겠다. 기억의 외주화가 본격화 된 덕분에 더이상 고유명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 검색하면 나오니까. 가끔 내가 기억하려고 했던 게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 곤란하지만, 그럴 땐 내 생각을 없었던 셈치면 된다.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구글에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는 일기를 쓰라고 했다. 기억력에 도움이 될거야. 서평가 금정연은 일지를 쓰는 것만으로 글 쓰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어디서, 몇시에 대화를 했다는 사실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도움 될 거예요. 이른바 기억의 트리거. 빵야, 빵야. 방아쇠를 당기면 기억이 돌아온다. 대화가 복원되는 거지요. 빵야, 빵야. 금정연이 말했다. 정연씨는 작년에 딸을 낳았고 육아에 열중하고 있다. 물론 육아일지도 쓰고 있다. 아이가 컸을 때 유아 때 이야기를 들려주려구요. 어릴 때 기억나니? 니가 휴대용 노래방 마이크로 아빠 머리를 후려쳤잖아. 빵야, 빵야.


하지만 나는 아이가 없고 일지를 기록하지 않는다. 친구의 충고에 따라 일기를 썼지만 하루 만에 관뒀다. 일기와 일지는 일종의 복습이고 나는 복습을 싫어한다. 나는 오로지 예습만 했다. 그리고 예습이 끝나면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걸 예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라지는 건 사라지는 대로 두자. 대화는 휘발되고 고유명사는 실종되고 커뮤니케이션은 단절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거나 가상의 존재들과 커뮤니케이션 할 뿐이다. 가상의 존재들은 나를 나보다 잘 알고 더 이상 그들을 가상이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우리가 신경과 세포, 혈액과 근육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들에겐 회로와 그것을 구성하는 플라스틱, 구리선 따위가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한번도 가상이 아니었다. 가상은 우리의 자아 또는 정신이며 우리가 대화라고 부르는 커뮤니케이션 과정과 인간 사회라는 개념이다.


언어극이자 세계극이라고 할 수 있는 페터 한트케의 <말타고 보덴호 건너기>는 한트케가 3년 동안 모은 메모들을 바탕으로 완성됐다. 그는 일상에서 관찰된 언어나 행동에 대한 메모, 다른 작가들이 만들어 놓은 문장들, 언어 유형들을 수집했다. 소문에 의하면 홍상수는 술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몰래 녹취해 영화에 활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해보자. 텍스트는 타인의 기억을 기록하는 나의 일기이다. 나는 동일한 하나의 네트워크로 존재하지 않으며 외부 환경은 정보의 선별과 통보의 선별이라는 과정을 거쳐 기록된다. 또한 그 전 단계에서 발생하는 타인의 기억 역시 동일한 과정을 거치며 복잡성은 증가한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이러한 과정이 겹겹이 쌓이고 분화된 거대 병렬 네트워크의 활동이다.


2.

과학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1975년 <방법에의 도전: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을 출간하고 스타가 됐다. 장 라르고는 논평에서 “<방법에의 도전>은 하나의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이언 해킹은 이 책이 출간된 시기를 철학의 우드스탁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던지는 도전장 또는 축제였고 사람들은 광기와 열정, 치열한 토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실제 역사나 <방법에의 도전>의 의의는 뒤로 제쳐두자. 내가 흥미롭게 느낀 건 논쟁의 중심이 된 책을 낸 뒤 파이어아벤트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이다. 파이어아벤트는 자서전 <킬링 타임>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이 X 같은 책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본인을 학계의 스타로, 더 나아가 과학철학사의 전설로 만든 책에 대해 그는 왜 이렇게 생각했을까. <방법에의 도전>은 도발적인 문제 제기 때문에 논쟁에 휩싸였다. 좋게 말해 그렇다는 것이다. 파이어아벤트는 어마어마한 비판을 받았고 거의 인격 모독에 가까운 비난도 받았다. 과학자들은 그를 ‘과학 최악의 적’으로 규정했고 성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히기도 했으며 구제불능의 상대주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가 받은 비판과 비난 중에 옳은 것도 있고 억울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미치고 펄쩍 뛰게 했던 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어떤 서평자가 ‘파이어아벤트가 X를 말했다’ 라고 쓰고, 그 X를 공격하면,
나는 내가 정말 X를 말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옹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경우에서 나는 X를 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를 말했다.”

아마 이런 오해는 그의 글 스타일 때문에 발생한 일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책을 책이 아니라 “콜라주”라고 말했으며 합리주의에 기반한 일관성 있는 논변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의 글쓰기를 실천했다. 의도가 모호한 농담 또는 서술을 했고 사람들은 같은 문장을 전혀 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 모든 일에서 파이어아벤트는 순수한 “문맹”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책을 낸 뒤 경험한 것과 거의 유사하다. 이를 파이어아벤트와 쿤의 용어를 빌려 “공약불가능성”이라고 부르자. 몇 쇄 팔리지도 않은 책이라도 책을 내고 나면 온갖 반응을 접한다. 어떤 이는 반응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고 행운이라고 하지만, 정말 행운인지 의구심이 든다. 파이어아벤트는 책을 내고 오랜 우울증에 시달렸다. 나 역시 경미한 우울증을 겪었고 지금까지 여전히 이어지는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과거의 나는 어떤 종류의 것이 됐건 좋은 작품이 존재하고 그것을 쓴다면 그것은 좋은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동어반복 같지만 이러한 믿음은 은연 중에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옳은 행동이 있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옳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가 문학사의 걸작으로 남은 것이 단지 우연일 뿐이라면? 그것이 내적으로 진정 그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거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면. 이 모든 일이 전혀 다르게 벌어질 수도 있었다면.

인식 간의 공약불가능성,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말을 빌리면 “모든 현실은 구별을 통해 구성”된 것이다. “실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말하려 한다면, 항상 관찰자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한다.” 이것은 커뮤니케이션이 우리가 이때까지 생각해왔던 방식, 의미의 합의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외적 현실은 존재하지만 그 현실은 각 체계들의 구별을 통해 인식되고 기술되며 이러한 구별은 세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체계의 관찰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 기술은 구성이다.

이 글은 좁게는 대화에서, 넓게는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일어나는 공약불가능성을 다룰 것이다. 쉽게 말해 말 안 통함. 그러나 이러한 말 안 통함이 비관주의나 상대주의로 가지는 않는다. 다시 루만의 개념을 빌리면 후속 커뮤니케이션의 연계에 성공한 커뮤니케이션은 언제나 성공한 커뮤니케이션이다. 긍정과 부정, 합의와 불일치, 다툼과 증오 뭐든 상관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화가 잘 통한 상황은 루만에겐 실패한 커뮤니케이션이 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같은 말을 하고 있고 더 이상 커뮤니케이션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니클라스 루만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정의는 (간단하게 줄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커뮤니케이션하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만이 커뮤니케이션 한다.

이 글은 일종의 콜라주다.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하는 양상을 메모와 파편들로 커뮤니케이션 할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 글의 내용이나 구성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단지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 할 뿐이니까…

* 파울 파이어아벤트, <킬링 타임>(한겨레출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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