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28호 |문화예술교육과 시민력(市民力)

지지봄봄 10주년,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2021년이면 웹진 《지지봄봄》이 창간 십 주년을 맞는다.


창간 당시 강원재·김경옥·박형주 제씨들과 편집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하면서 느낀 것은 경기 지역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는 예술교육자 또는 예술(교육)단체들은 자신의 역량에 대한 객관적인 ‘크리틱(critic)’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그 무렵에 만난 예술교육자 및 단체들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자신의 역량에 대해 크리틱하며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동료’를 원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단순히 ‘사례’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공유하려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 웹진 《지지봄봄》이 발간될 때마다 현장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웹진이 발간되면 현장의 여러 단체들에서 크리틱을 읽고 역량강화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문학평론가인 나로서는 문학에 대한 비평문을 써도 별 반응이 없는 문학판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조금은 낯설었지만 즐거웠다. 어쩌면 당시의 문화예술교육판은 새로운 변화를 강력히 바랐던 것 같다.



새로운 ‘부족주의’의 시대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추억팔이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창간 당시의 문제의식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되살리려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웹진 《지지봄봄》은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모으고 그 속에 계신 예술가, 교육자의 가치 지향과 가슴을 담고자, 곱씹을 만한 교육 화두를 들고 한자리를 마련하면서 교육의 새길, 아름다운 길을 다시금 교육 웹진을 통해 잇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과정을 통해 곁에서 지켜보아주는 또 다른 ‘나-들’이 있음을 의식하여 거듭 새로워지기를 기대합니다”(《지지봄봄 단행본 01》, 2013, 밑줄 필자 강조) 라는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곁에서 지켜보아주는 또 다른 ‘나-들’이 있음을 의식하여 거듭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직도 여전히 여일(如一)할 것이다. 우리는 무력(無力)한 존재이지만, “치열한 무력만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있다”(사사키 아타루)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하루하루, 꾸준히, 살아갈 것’이라는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한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 태도가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차별의 핵심은 개별성의 삭제”(이라영, 『타락한 저항』, 교유서가, 2019)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는 문화예술교육은 미적 인간의 탄생과는 무관한 기능 강습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보다 더 약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최근 넷플렉스에 공개된 다큐 영화 <소셜 딜레마>(2020)는 SNS에 탐닉할수록 중독, 분극화, 급진화 현상이 심해지며 ‘감시 자본주의’를 강화하며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코드에 내재된 의견이라고 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나머지, 사람들이 각자의 진리를 추구하는 새로운 ‘부족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문화예술교육은 세대 내/세대 간 리터러시 교육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시민력(市民力)을 형성하고 강화하고 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특히 코로나19 시대가 장기 지속 상태로 접어들면서 반(反)지성주의가 득세하며 약자를 멸시하는 현상이 심해지는 최근의 상황이 우려스럽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아름다움은 과연 만날 수 없는 것일까.



문화예술교육과 시민력


나는 2012년 말 《지지봄봄》에 「‘품위 있는 문화사회’는 가능한가?」라는 칼럼을 썼다. ‘품위 있는 문화사회’라는 지향은 지금도 문화예술교육이 (추진이 아니라) 추구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2012년 대선(2012.12.19.)을 앞두고 쓴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행정의 철학’을 생각하자는 취지였다. 형식적 합리성은 강조하되, 목적 자체의 타당성에 관한 논의는 회피하려는 철학 없는 행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임스 C.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농장이나 전후 일본에서의 삼나무 심기처럼 단일수종 조림 사례를 들어 삼림을 하나의 상품기계로 크게 단순화할 경우, 지금 당장의 성과는 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2세대 나무에 이르러선 20∼30%에 달하는 생산 손실이 발생하면서 결국 ‘숲의 죽음’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숲의 다양성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이러한 폐단에 대해 ‘행정가의 숲’이라고 개념화하는데, 그것의 대안은 ‘자연주의자의 숲’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새 정부 문화정책의 기조와 비전이 행정가의 숲이 아니라 자연주의자의 숲을 가꾸려는 정책과 제도로 발현될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그런 정책과 제도야말로 품위 있는 문화사회를 위한 위대한 희망의 원리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_ 고영직 「‘품위 있는 문화사회’는 가능한가?」 중에서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후의 상황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지난 정부 시절 자행된 ‘블랙리스트’ 파문은 상상력, 개방성, 진정성 같은 행정의 철학을 기대한 것이 난망했다는 점을 잘 요약해준다. 그 결과는 어땠는가. 새로운 ‘부족주의’가 창궐하고 있다. 각자가 믿는 진리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며 같이 토론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현실 영역이 점점 훼손되고 있다. 『9월이여, 오라』(2004)를 쓴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길을 잘못 들어서 공동묘지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라고 해야 할까. 회심(回心)이 필요하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 같다. 코로나19 시대에도 불구하고 부동산불패 신화가 계속되는 것을 보라. 예를 들어 집, 땅, 차, 돈, 이 단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 글자짜리 단어들이다. 코로나19 시대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격(格)’보다 ‘아파트의 값’이 더 높이 숭배되는 문화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최근의 부동산 파동은 아직도-여전히 ‘길이 뚫린다, 물길이 열린다, 땅값이 오른다’는 식의 도시개발 마인드가 우리 마음과 일상을 압도한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사는 도시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하며, 세상을 사는 척도 또한 바꾸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전환’을 생각해야 한다. 도시에 대한 생각의 전환은 특히 중요하다. 미국 사회운동가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1961)에서 “꿈의 도시를 설계하는 일은 쉽다. 하지만 살아 있는 도시를 재건축하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집을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곳으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유쾌한 작당(作黨) 모임 또한 더 많아져야 한다. 문을 열고, 사람을 만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거실혁명(livingroom revolution)이 필요하다. 문화예술(교육)활동이 유의미해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예를 들어 춘천에는 ‘책 읽는 춘천’이라는 시민들의 자발적 동아리가 있다. 여러 도시들에도 <녹색평론을 읽는 모임>, <민들레를 읽는 독자모임> 같은 소모임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소모임들은 거실혁명의 생생한 실체이다. 지난 7월부터 커뮤니티 심리방역 차원에서 춘천문화재단이 진행하는 <도시가 살롱> 프로젝트 또한 눈길을 모은다. 내가 사는 집과 마을을 연결하는 생활방식의 전환을 즐겁게 고민하며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호응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리듬과 에너지의 흐름에 ‘의하여’ 사는 유쾌한 작당 모임들이 각자의 삶터에, 각자의 일터에 더 많아져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문화예술(교육)활동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더더더’에서 ‘덜덜덜’로 전환하자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철학의 모토를 보여주는 라틴어 표현이 있는데 “감히 알려고 하라”이다. 지금은 우리가 “감히 알려고 하는” 태도가 더없이 필요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비롯해 기후위기 같은 사태가 왜 일어났고, 어떤 상황인지 적극적으로 알려고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탈피해 인간계-동물계-식물계-광물계-기계를 아우르며 사유하고 예술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종간’ 협력과 연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생명체에 대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로 ‘살처분’이라고 표현하는 우리의 의식/무의식에서 비롯한 ‘자연의 역습’ 상황이다. 그런 오염된 언어는 결국 우리의 병든 마음과 정신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나쁜 언어를 환기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발견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의 상황을 표현하는 시 가운데 이영광의 「검은 봄」이 떠오르는 것은 그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시인은 “나는 병이고 약이며 고통이다/ 자연이요 문명이요 생명이다”라고 썼다. 문화예술교육 현장 또한 변해야 한다. ‘하던 대로’의 덫에서 벗어나 ‘지금’을 공부하며 코로나19 시대와 이후의 시대를 생각하는 교육/활동을 모색해야 한다.


그 방식은 행동주의적인 예술활동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에 직접 구현하려는 유토피아로서의 나우토피아(nowtopia)의 방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지금 여기를 응시하며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더듬이나 촉수를 뻗어 얕은 생태학이 아니라 ‘깊은 생태학’으로 재밌고 유쾌하게 표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올림픽 구호는 ‘더더더’로 요약된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빠르게.’ 마치 음주 측정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앞으로의 삶에서는 ‘더’ 많이 소유하고 성장하는 삶의 문법이 아니라 ‘덜덜덜’로 가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그런 문제의식을 교육/활동으로 풀어내며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이 요청된다. 위기의 순간일수록 철학자나 시인이 되려는 심리가 있다. 지금은 누군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방향 전환’을 해야 하는 시절이다. 다수자가 아닌 소수자의 시각,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의 이해, 이와 관련된 실천을 바탕으로 세대 내/세대 간 ‘리터러시 교육’을 모색해야 한다. 영화 <소셜 딜레마>가 환기하듯이, ‘각자의 트루먼쇼’를 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낯선 것들과의 ‘직면’이 필요할 것이고, 옛것의 ‘재사유(rethinking)’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시민이 탄생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참고 -  



[지지봄봄 2012년 마지막호] 품위 있는 문화사회는 가능한가?(고영직,2012) 다시보기(클릭)




세부정보

  • 웹진 '지지봄봄'/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2012년부터 발 행하고 있습니다. ‘지지봄봄’은 경기도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가까이 바라보며 찌릿찌릿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이라면 어디든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삶과 배움의 이야기와 그 안에 감춰진 의미를 문화, 예술, 교육, 생태, 사회, 마을을 횡단하면서 드러내고 축복하고 지지하며 공유하는 문화예술교육 비평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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