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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탈주자학적 개혁가, 박세당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탈주자학적 개혁가, 박세당


“고쳐야할 폐단이 있다면 고쳐야...”

경직된 성리학 질서에 현실적 관점을...



조선후기 중국의 명나라는 망하고 청나라의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명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청나라가 이미 중국을 통일하고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을 때도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사상적, 역사적 이유로 청나라에 이중적 입장을 취했다. 여전히 멸망한 명나라를 추종하고 있었다. 실제 조선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가 사용한 연호인 숭정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박세당은 유학자 이면서 이런 점이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꼬집었다. 박세당은 고구려와 백제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역사를 예로 들며 강한 나라 앞에서는 때론 머리를 굽힐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명의 연호를 고집하던 많은 유학자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당대 유학자들에게 불의한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박세당은 이러한 현실주의적인 면은 그가 내놓은 국가 개혁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박세당은 현종에게 제출한 ‘응구언소’를 통해 “고쳐야할 폐단이 있는 데도 고치지 않고 채택해야 할 말이 있는 데도 채택하지 않으니 이러므로 상심한다는 것은 머뭇거림일 뿐이고 재앙을 그치게 한다는 것은 헛된 글일 뿐입니다”고 말했다. 말뿐인 사변적인 개혁의 잘못을 꼬집는 주장이다. 당시 박세당이 제출한 개혁안은 부정의 방지와 조세의 균등화, 병역 제도의 일원화, 궁중재화의 낭비방지 등이다.


▲ 보물 제1674호 박세당의 『서계유묵』. (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박세당은 백성들의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과도한 징세를 막는 것을 개혁의 일차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박세당은 족징을 대표적 폐단의 하나로 지적했다. 족징은 세금을 부담해야하는 자가 도망가거나 다른 이유로 부담하지 못하면 친척들이 이를 부담하는 제도이다. 또 박세당은 부역과 세금 부과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게 해 공평하게 거두어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병역의 개혁도 강조했다. 박세당은 병역에 가장 큰 문제는 불균등한 수취라고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첩적인 병역 수취와 그로 인한 백성들의 군역 부담 증가, 행정의 혼란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박세당의 사상의 유연성, 정책의 현실성을 강조한 주장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많은 반발에 휘둘렸다. 경기문화재단이 펴낸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2018)』은 박세당의 개혁과 탈주자학적 풍모에 대해 “그가 틀에 박힌 사고를 거부함으로써 경직된 성리학 질서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변화와 발전을 요구하고, 현실 문제의 해결을 고민하였다는 점은 오늘날 우리에게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평가했다.


▲ 박세당 묘역. 경기 의정부시 장암동에 있다 (사진 = 국가문화유산포털)


박세당은 화려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박정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할아버지 박동선은 좌참찬에 올랐던 인물이다. 특히 할아버지 박동선은 인조반정 후 이조참판과 좌참찬을 지냈고 호란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봉작까지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병조참판을 지낸 윤안국이다.


하지만 순탄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다. 아버지 박정이 박세당이 4세 때 사망하고, 3년 후 큰형이 죽었고 이듬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랐다. 17세 혼인한 후에는 가난 때문에 처가살이를 하게 된다. 이 때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이성 등과 교류하면서 탈주자학적 사상의 기틀을 마련한다. 박세당은 32세 때인 1660년 생원시에 급제한 후, 같은 해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관직에 나서게 된다. 이후 정언, 지평, 병조정랑, 부교리 등을 거쳤고, 40세의 나이로 이조좌랑에 올라 연행단 서장관으로 선발돼 청의 수도인 연경, 현재 베이징을 방문하게 된다. 연경에 다녀온 후 파직돼 양주 수락산 아래 석촌동에서 시간을 보냈다. 관직을 여러 차례 제수했지만 뜻을 거두고 다시 출사하지 않았다.


그의 불행은 말년에도 찾아왔다. 58세 때 장남 박태유가 병으로 죽고 61세 때는 숙종의 인현황후 폐위를 반대하다 국문을 받고 유배를 떠난 둘째 아들 박태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박세당은 두문불출하며 농서인 『색경』을 짓고,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설서 『사변록』 등을 완성했다. 말년인 1702년 송시열을 비판하다 한양성 밖으로 쫓겨나는 처분[門外黜送]을 받았다. 고령의 나이에도 도성 밖으로 나가 처분을 기다리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몇 달 버티지 못하고 결국 이듬해인 1703년 사망에 이르게 된다.


▲박세당이 말년에 기거한 의정부 수락산 아래 고택. 경기문화재자료 93호로 지정돼 있다.(사진=의정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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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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