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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소용돌이 정국 속에서 안민을 생각한 경세론자, 홍우원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국가 재정을 최대한 절약하고 부를 민간으로”


소용돌이 정국 속에서 안민을 생각한 경세론자, 홍우원



홍우원은 숙종 즉위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남인이 쥐었을 때 남인의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정치적 숙적이었던 서인은 홍우원을 두고 ‘간악한 당의 영수(奸黨領袖)’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경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함경도 명천부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문천군으로 이배됐다. 결국 83세를 일기로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기사환국으로 신원이 복구됐지만 다시 갑술환국으로 관작이 추탈되는 등 사후에서까지도 정치상황에 따라 평가의 부침을 받았다. 정조 19년(179년) 최종 복권됐다.


이렇듯 홍우원은 당쟁의 최선두에서 당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면서 정치적 견해에 따라 그 평가가 좌지우지 된 인물이지만 생전에는 뚜렷한 정치적 소신과 원칙을 지켰다. ‘손상익하(損上益下)와 안민(安民)’이 바로 홍우원의 정치적 원칙이었다. 손상익하는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탠다’는 의미다. 나라에서 창출된 부를 국가가 독점하거나 재정을 확장하지 않고 이를 민에게 적극적으로 재분배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2018)』은 이를 “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운영기반이 백성인 만큼 원칙에 입각한 수취를 통해 국가재정을 최대한 절약하고 부를 가급적 민간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홍우원이 남긴 『남파문집』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우원이 살았던 17세기는 이미 두 차례 전쟁으로 국가재정은 피폐해졌고, 재정의 근원인 호구와 전결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됐다. 전란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결포, 삼수미, 서량미 등 새로운 세금이 생겨나면서 백성의 부담이 증가됐다. 지방의 군사조직인 감·병·수영 등과 군현도 독자적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짰다.


특히 내수사와 궁방과 같은 왕실기관도 재원확보에 열을 올렸다. 내수사는 조선시대 왕실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신설된 기관이다. 공적인 통제 밖에 놓인 내수사와 궁방의 운영은 국가재원을 축소시키는 요인이 됐다. 조선 초부터 내수사에 대한 공적통제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이뤄내지 못했다.


홍우원은 내수사의 행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예안현감으로 제직하던 1651년 올린 상소에서 “내수사라는 것은 전하의 사사로운 관서이고, 내수사의 사람은 전하의 사사로운 사람입니다. 간교한 소인들이 성상의 옆에 붙어 간사한 직을 하여 백성을 해롭게 합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우원은 백성들이 먹는 것이 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고 강변했다. 홍우원은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한다. 백성이 아니고서는 나라가 될 수 없고, 먹는 것이 아니고서는 백성을 보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홍우원은 ‘이식위천(以食爲天)’,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표현을 자주 섰다고 한다. 내수사가 백성들이 먹을 것을 착취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홍우원은 중앙 아문의 둔전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홍우원은 “지금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큰 것은 각 아문의 둔전만한 것이 없습니다. (중략) 둔전의 소출은 태반이 별장의 몰래 먹는 것으로 들어가고, 아문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약간일 뿐입니다. (중략) 즉시 대신에게 명하여 아문의 각 둔전을 모두 혁파하고, 토지와 민호는 본읍으로 환속시켜 부세를 호조로 귀속시키면 백성에게는 균역의 편리함이 있을 것이고 나라에는 수입의 증대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우원의 본관은 남양으로 조부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청난공신에 책훈된 홍가신이다. 홍우원은 대대로 남양 홍법리(화성시 서신면 홍법리)에 세거했지만 17세기 양란을 거치면서 형인 홍우정은 봉화에 정착했고, 홍우원은 경기도 안성에 정착했다. 학맥이 누구에게 이어졌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가학의 영향을 받았고, 조부 홍가신이 서경덕의 문인인 허엽과 민순에게 수학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홍우원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인조 23년 1645년이다. 급제 이후 홍우원은 승문원, 홍문관 정자, 승정원 주서, 예문관 검열 등을 지내다 인조 27년 병조좌랑과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본격적으로 중앙정치 무대에 뛰어든 건 효종의 즉위 후의 일이며 남인의 지도자로 부각된 것은 숙종 때의 일이다. 송시열에 대항해 남인들을 옹호하면서 현종 연간에는 중용되지 못했다.


홍우원은 1692년 숙종 18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경기도 안성 비봉산 기슭에 위치한 남파서원에 모셔졌다. 봉양서원이라고도 한 남파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이후 서원 유지에 봉양단을 마련해 후손들과 지역유림이 향사를 지내오다가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됐다.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은 경기도메모리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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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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