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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풍부한 경험의 개혁적 역사가, 남구만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조선의 한자말이 바른 소리” 중국을 넘어 자주적 역사관 세워


풍부한 경험의 개혁적 역사가, 남구만



남구만은 실용적 사상가이면서 관료로도 성공해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남구만이 활동하던 17세기 후반은 치열한 당쟁의 시대로 그 스스로가 당쟁의 당사자이면서 피해자이기도 했다. 남구만은 사망 후 그 평가가 첨예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숙종실록은 남구만 사후 “젊어서는 자못 청렴 간결하여 사심이 없는 것으로써 스스로 평가하더니 관작이 높아지면서 부터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숙종실록보궐정오』는 남구만에 대해 “세상이 바야흐로 당파를 짜고 서로가 모함과 알력을 일삼는데도 남구만은 마음가짐과 주장하는 의논이 항상 공평하고 옳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원망하고 미워하는 말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실록과 실록을 보충한 책에서 정반의 평가를 하고 있는 셈이다.


▲ 보물 제1484호 남구만 초상 (사진=문화재청)


남구만은 1656년 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급제 후 문신 정시에 다시 합격해 효종에게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과정에서 세자시강원의 상관이었던 송준길에게 학문을 인정받아 사제 관계를 맺었다. 그 결과 이전까지 이렇다 할 붕당의 색채가 없었던 남구만이 서인 계열로 정리됐다.


남구만이 붕당정치에 뛰어든 것은 스승 송준길을 구하기 위해서다. 남인들은 숙종이 즉위하면서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탄핵하고 이 과정에서 송준길도 공격을 받았다. 이에 남구만은 1675년 1월 6일 ‘인혐사직겸진소회소’를 지어 송준길을 변호하며 사직을 청했다. 또 숙종 5년인 1679년 한성부 좌윤이었던 남구만은 남인의 우두머리인 윤휴와 허견을 탄핵했다. 그 결과 남인들의 전면적인 공격에 거제도로 유배됐다. 경신환국 이후 다시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남구만도 복귀했다. 남구만은 도승지가 돼 숙종의 비서실장으로 복귀했다. 이후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남구민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할 때 젊은 관료들인 소론의 편을 들었다가 송시열, 김수항 등과 갈등하고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갑술환국으로 숙종이 영의정으로 불렀지만 노론과 소론의 갈등에 1967년 영의정에서 물어났고 이듬해 국가 원로들의 기구인 기로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하지만 남구만의 역경은 그치지 않았다. 정치상황에 따라 74세의 나이로 유배를 당하는 등 말년의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1711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남구만을 평가할 때 영의정에 수차례에 오른 노련한 정치인, 행정가라는 평가뿐 아니라 역사학적 성과가 빠질 수 없다.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은 “주요 관직을 거친 유능한 행정가였을 뿐 아니라 한반도 역사에 대한 많은 고증을 남긴 역사가”라고 평가했다.


남구만은 안변부사와 함경관찰사를 역임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국경의 중요성과 현실을 인식할 수 이었다. 함경관찰사 재임 시절 남구만은 함경도 지도를 작성해 숙종에게 바치고 국방 강화를 주장했다. 남구만은 북방 영토에 대해 조선의 북방영토가 우리 옛 국가였던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고려 이후 버려졌다가 조선이 4군 6진 등을 설치하면서 조선의 영토로 편입돼 명백한 조선의 영토라고 지적했다. 또 남구만은 두만강 이북 지역에 대해서도 이성계의 선조인 목조와 익조의 땅이었던 만큼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남구만의 『약천집』에 포함된 「동사변증(東史辨證)」은 단군, 기자, 패수, 진번, 수양산 등 한국사에 등장하는 여러 지명과 인물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여기서 단군설화, 기자를 고증하고 역사책에 등장하는 패수가 어느 강인지 등에 대해 고증을 시도했다. 남구만을 특정 결론을 도출하는 게 아니라 기존 견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노력은 중국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온 유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넘으려했던 시도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은 “한반도의 역사적 사실마저도 중국의 자료와 관점을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던 기존 학자들의 방식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적 색채를 보이거나 조선의 역사와 영토에 대한 소중화 사상을 나타낸 것 역시 남구만의 역사 인식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특히 한자음에 대해 남구만은 중국이 아닌 조선의 한자음이 정음, 즉 바른 소리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 한자음은 오랜 세월 이민족과 그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 변화했던 것과 달리 조선은 처음부터 말과 글이 달러 섞이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 용인에 위치한 약천 남구만 묘역 (사진 = 용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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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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