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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시대의 폐단을 찾아 대책 설계한 홍계희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반계수록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균역 개혁을 외치다


시대의 폐단을 찾아 대책 설계한 홍계희



홍계희는 영조 13년, 1737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장원에 급제한 답안지는 영조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영조는 홍계희의 답안을 두고 ‘폐단을 구제하는 대책’이라고 표현했다. 홍계희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바탕으로 답안을 섰다고 한다. 수록 26권과 보유 1권으로 구성된 『반계수록』은 유형원이 공전제를 비롯해 어려 개혁안을 엮은 책이다.


홍계희는 과거에 급제할 때부터 영조의 관심을 받아 정언과 부교리 등 언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742년 북도감진어사로 함경도에 파견돼 수령의 진휼실태 등을 조사하기도 했다. 1745년 승지에 특제됐다. 1747년 일본 막부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한 통신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1749년 이후 홍계희는 충청감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라서는 균역법 제정을 주도하였다. 이후 광주유수, 이조판서, 형조판서, 경기감사 등을 두루 거쳤다.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안심사사적비’. 비문을 당시 이조판서를 지내던 홍계희가 섰다. (사진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762년 사도세자가 화를 당하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하였는데, 이 과정에 홍계희가 깊이 관여하면서 후손들이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뒤이어 임금이 되는 정조와 양립할 수 없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도세자가 몰래 평양에 행차에 갔을 때 이를 알면서도 영조에게 세자를 만나보라는 상소를 올렸다. 경기감사에 재직할 때는 윤급이나 김한구 등과 함께 사도세자의 비행 10여조를 국왕에게 알린 나경언의 고변서를 사주하였다고 한다. 임오화변 이후 노·희(魯禧)라 하여 홍계희는 김상로와 함께 사도세자가 화를 당하게 만든 주범으로 인식됐다. 사후에 문간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졌다. 하지만 곧 아들 홍술해, 홍찬해와 손자 홍상간, 홍상범이 대역죄로 처형되면서 관작이 추탈됐다. 정조 초기 모두 3건의 반역시간이 있었다. 모두 홍계희 후손들이 주도한 사건이다. 손자 홍상범이 아버지가 유배된 사실에 반감을 품고 궁중에 암살단을 보내 정조의 암살을 기도했고, 홍계희의 아들 홍술해의 처가 무당을 불러 정조와 홍국영을 대상으로 ‘저주의 굿판’을 벌인 일도 있었다. 또 홍계희의 8촌 홍계능이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과 모의해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대의 다른 아들 은전군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사실도 발각됐다.


이 때문에 홍계희에 대한 연구가 기피대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조대 폭 넒은 학문과 경세 방략으로 각종 정책에 참여하고 『반계수록』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일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 홍계희가 쓴 『균역사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사도세자에게 균역법 제정의 경과와 결말을 알리기 위해 쓴 책으로 1751년 12월 편찬에 들어가 이듬해인 1월에 펴냈다.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계희가 가장 주목한 것은 양역 폐단의 개혁이었다. 홍계희는 양역의 폐단으로 인해 장차 망국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홍계희는 양역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역 부과의 불균등함과 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경제적 빈곤에서 찾았다. 홍계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역변통론을 제기했다. 홍계희는 당초 호포론을 주장하자가 결포론으로 선회했다. 호포폰은 당초 양반을 포함해 각 호별도 포를 부과하자는 주장이고, 결포론은 토지에 결수에 따라 포를 부과하자는 주장이다.


홍계희가 결포론을 주장하면서 주목되는 것은 토지를 ‘공전’으로 인식한 점이다. 이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홍계희는 『반계수록』에 대해 “순과 삼대의 정치를 하던 세목에 합치된다고 하지는 못하겠지마는 옛날 성현이 말한 대체 이외에 그것을 실행할 상세한 세목을 탐구하려면 이만한 책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당시 많은 이들이 현실적으로 시행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지만 홍계희는 “토지 소유권을 제한하자는 학설들은 옛날 현인들의 정당한 평론들이 있는데 만일 진실한 마음으로 실행한다면 오늘이라고 실행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며 또 이 법을 실행한다면 좋지 못하다고 하는 자가 물론 많을 것이나 그것을 환영하는 자가 더 많을 것이니 이것에 구애될 것은 아니다”고 반박했다고 한다.


홍계희는 유형원의 ‘공전제’을 받아드려 토지 사유를 폐지하고 이를 국가에 귀속시키려는 것으로, 공전을 공평하고 균일한 제도로 인식했다. 홍계희가 굳이 ‘공전’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결포론으로 자신의 생각을 선회한 것은 일단 유형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즉 공공성을 목적으로 한 토지의 사용을 제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홍계희의 묘 (사진 = 경기도메모리)


홍계희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구 처인구 묘현면 일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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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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