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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실천과 소통의 지식인, 안정복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실천이 학문의 경지로 이어진다”


실천과 소통의 지식인, 안정복



성호 이익의 학맥은 안정복으로 이어졌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으로 유명한 성리학에 입각한 실학자였다. 안정복은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마찬가지로 학문의 바탕은 유학적 사고였지만 누구보다도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안정복은 숙종 38년 1712년 충북 제천현에서 아버지 안극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계는 광주 안씨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공신의 반열에 오른 안황의 후손이었다. 다만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당색이 남인이었기 때문에 점차 권력으로 소외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집안은 안황 이후 크게 벼슬에 오른 인물이 없다가 조부였던 안서우가 태안군수를 거쳐 울산부사를 역임하였다. 하지만 영조 즉위와 함께 노론이 집권하자 안서우는 당파로 인하여 울산부사에서 파직되었다. 결국 안서우는 아들인 안극과 손자인 안정복을 데리고 전라도 무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안정복의 아버지인 안극은 물론이고, 15세였던 안정복 역시 벼슬에 대한 생각을 접고 학문에만 매진하였다.


영조 11년 1735년 안정복은 조부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무주를 떠나 경기도 광주 덕곡에 있던 선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 때 안정복은 독학으로 학문을 쌓았고 27세에 『임관정요(臨官政要)』, 29세에 『하학지남(下學指南)』의 초고를 저술하였다. 이 때 안정복은 학문의 중심을 하학(下學)에 두며 학문의 실용성을 지향했다. 안정복은 “옛 사람이 이르기를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라고 하였으니, 하학을 멈추지 않는다면 청명이 몸에 있고, 지기가 신과 같아 자연스럽게 상달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며 “그러한 후에 터럭이나 실오라기에서 의미를 가려낼 수 있고, 천지에서 심적을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마땅히 힘쓸 바는 하학에 둘 따름이다”고 밝혔다.


책 『변화화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2018 간행)』은 안정복의 하학을 중시한 학문에 대해 “안정복의 학문은 실천성이 우선 과제였다”면서 “학문의 실천이 곧 학문의 경지로 이어진다고 여겼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책은 “젊은 나이에 목민서와 교육서를 저술한 것은 자신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공리적 학문이 아닌, 배움을 나누고 활용하는 실용적 학문에 뜻을 두겠다는 안정복 스스로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안정복의 『동사강목』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안정복이 35세가 되던 영조 22년 1746년 경기도 안산에 거주하던 성호 이익을 만나고 나서 학문의 수준이 성장하게 되었다. 안정복은 이때부터 17년 동안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안산에 있던 이익의 서재를 찾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토론했다고 한다. 이 때 안정복은 이익과 교류하면서 『동사강목』을 편찬하게 된다. 영조 35 1759년 『동사강목』의 초고가 완성될 때까지 안정복은 이익과 역사인식과 서술방법, 서술 내용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안정복은 이익과 고려 우왕의 출생을 두고 이견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익은 우왕이 신돈 소생이라고 하고, 안정복은 공민왕의 자식이라는 견해의 대립이었다. 어쨌든 안정복은 자신의 대표적인 저술인 『동사강목』을 정조 2년 1778년 완성했다.


이익의 제자로 안정복을 비롯해 윤동규, 신후담, 권철신 등이 있었다. 경전의 이해 방법이나 서학 문제 등을 중심으로 문인 내에 분기가 있었다. 이를 성호좌파와 성호우파로 분류하거나 혹은 공서파와 친서파로 분류하기도 한다. 안정복과 신후담은 성호우파로 천주학이 비성리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불교나 도교와 상통하는 교설을 가진 이단의 교설이니 배격해야 한다는 척사론적 논리를 전개했다. 반면 이가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 황사영, 김범우 등은 성호좌파로 서학을 받아들여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안정복은 성호학파의 문인들이 천주교에 빠지는 것을 저지하고, 성호학파가 종교적 박해로부터 위험에 처하는 일을 막아보고자 적극적으로 천주교 비판을 이어간다. 안정복이 1785년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을 저술한 것도 이러한 과정에서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권철신, 정약용 등 이른바 성호학파 내 신서파(信西派) 인물들은 박해를 피하지 못하였다. 이후 안정복의 서학 비판 입장은 성호학파 내에서 공서파(攻西派)로 분류되어 계통을 이어나갔다.


정조가 즉위한 1776년 안정복은 목천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7790년까지 목천현감은 안정복의 유일한 외관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이미 안정복의 나이가 60대 중반을 넘어서는 때였다. 안정복은 목천현감으로 재직하던 3~4년의 기간 동안 안정복은 그가 형성한 하학적 학문관과 경세치용적 애민관을 현실과 부합시킨다. 안정복은 백성과의 소통과 당대 사회 문제였던 잡역 문제 있어서 효과적인 해결책을 내놨다.


안정복은 목천현에 부임한 다음해인 1777년 ‘항통법’을 직접 실시하였다. 관문에 나무 궤를 하나 걸어두고서 백성들이 익명의 투서 ‘향통’을 받도록 한 것이다. 또 안정복은 잡역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방역소(防役所)를 설치하였다. 안정복의 방역소는 목천현 8개 면, 40개 동에 설치되었다. 방역소는 연간 5백냥 규모의 방역전을 운용하면서 각종 잡역가를 지급하였다.


▲ 안정복의 사당, 이택재 (사진=경기관광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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