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대쪽 같은 사람의 전형, 박태보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임금에게 직간한 한글 소설의 주인공


대쪽 같은 사람의 전형, 박태보



박세당의 둘째 아들 박태보는 너무나 곧았던 충신으로 이름을 남겼다. 희빈 장씨의 농간에 인현왕후를 폐하려던 숙종에게 폐위의 부당함을 고하다 모진 고문을 받았다. 박태보는 모진 고문을 받고 유배지인 진도로 향했다. 하지만 박태보는 한강을 건너자마자 모진 고문을 받은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한다. 당시 박태보의 나이 39세였다.


박태보는 효종 5년(1654)에 태어났다. 박세당의 둘째 아들이지만 작은아버지인 박세후에게 입양되었다. 박태보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박태보는 1675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1677년에 문과에 장원을 했다. 하지만 곧 박태보는 시제 출제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남인들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또 당시 이조 판서를 비판했다가 면직되었다. 1682년 이후 부수찬·교리·이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이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당시 향로 담당이던 박태보가 뜨거운 향로를 물수건으로 싸서 들지 않고, 맨손으로 들어 옮긴 일화도 전해진다. 박태보는 국가행사에 물수건을 쓸 수 없다면서 살이 타는 냄새가 나는데도 눈 하나 까딱 않고 맨손으로 향로를 잡았다. 이에 숙종은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박태보는 당시 송시열과 윤선거가 정적으로 다툼이 심할 때, 박태보는 윤선거의 외손자였지만 사심 없이 공정한 입장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박태보가 파주 목사 때 조정에서는 성혼과 이이의 위패를 문묘에서 빼라는 지시를 했다. 하지만 박태보는 이러한 지시를 거부해 면직됐다.


또 박태보는 매우 잘생겼다고 한다. 박태보가 매우 미남이라 당대 모든 처녀들은 그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였다. 한 대갓집의 여종이 그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여종도 사람인만큼 사랑에 빠질 수야 있겠지만 반상의 법도가 엄한 당시에 그런 일은 죽음마저도 각오해야 했다. 그녀는 며칠을 상사병으로 보내다가 결국 박태보의 유모를 찾아가 하루만이라도 그와 함께 지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유모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 말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박태보를 설득해 그녀의 청을 들어주라고 했다. 법도란 사람을 위한 것이고, 가엾은 한 여인이 원한에 차 죽게 된다면 그 또한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박태보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그녀와 하루 만났다고 한다. 박태보가 유배지로 가다 사육신묘 앞에서 숨을 거뒀을 때 마지막을 지킨 이가 하루 만난 여종이라는 얘기도 있다.


▲ 박태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노강서원. 경기도기념물 제41호로 지정돼 있다. (사진 = 문화재청)


1689년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농간에 빠져 숙종의 미움을 받고 폐위될 위기에 처하자 당시 서인계의 많은 선비들이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화가 난 숙종은 당장 주모자를 잡아오라고 했는데 당시 말직이었던 박태보가 갑자기 뛰어나가며 자신이 주모자라고 했다.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박태보를 다른 대신들이 말렸지만 박태보는 불의를 보고 넘어감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이때 박태보는 군신관계는 부자관계와 마찬가지라 말하며 죄 없는 어미를 내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는 건 자식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을 강변했다.


이에 화가 크게 난 숙종은 박태보에게 직접 친국을 하고, 이어 의정부에서 형국이 이어졌다. 장형, 압슬형, 인두형 등 여러 고문을 받으면서도 박태보는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은 박태보를 처형할 것을 종용했지만, 정승들의 만류로 결국 유배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박태보는 형독이 너무 심했던 나머지 유배를 가던 도중 한강을 건너자마자 노량진 사육신 묘 앞에서 죽고 말았다.


숙종은 이후 장희빈을 폐출한 후 박태보를 영의정에 추증했다. 숙종은 박태보의 부친인 박세당을 입궐하게 하여 충신 아들을 두었음을 치하하고, 박세당의 큰아들을 대사성에 삼아 죽은 아우를 대신하게 한다.


박태보의 삶은 한 마디로 너무 고집이 세고 옳은 일을 위해 타협을 몰랐다. 그래서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부모보다 일찍 죽게 됐다. 박태보의 이야기는 『박태보전(작자미상, 연대미상)』이라는 역사소설로 출간됐다.


▲ 한글소설 『박태보전』 (자료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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