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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실학을 꽃 피운 ‘우정의 공동체’

2021-05-12 ~ 2021-08-22 / 실학박물관 상반기 기획전 ≪실학청연 : 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




조운찬 경향신문 논설위원


두 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한 실학박물관은 내가 즐겨 찾는 곳이다. 서울 망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30~40분이면 닿는다. 대중교통은 조금 불편하지만, 열차·버스 시각을 잘 맞추면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 ‘가까운 곳부터 찾으라(近取)’는 말이 있는데, 정약용 생가와 다산생태공원이 어우러져 있는 실학박물관은 가까운 나들이 명소 가운데 하나이다.





실학자들의 맑은 인연, 실학청연

6월 11일, 실학박물관을 찾았다. 기획전 ≪실학청연, 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5.12~8.22)의 리뷰를 부탁받고 간 걸음이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언젠가는 보게 될 전시였다. 박물관에서 김태희 실학박물관장으로부터 전시 취지를 들었다. 김 관장은 “그간 실학자의 삶, 사상 등을 알리는데 치중했다면, 이번 전시는 시와 그림을 통해 실학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기획했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이들은 실학박물관에서 어렵고 딱딱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지봉유설’, ‘반계수록’, ‘재상 채제공’ 등 최근 기획전 주제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번 전시는 실학의 ‘무게’를 떨쳐낼 수 있을까.





‘실학청연(實學淸緣)’. 청신한 전시명이다. ‘실학자들의 맑은 인연’이라는 뜻일 게다. 인연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이다.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다고 사람의 관계가 다 맑고 밝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설명할 때 혐오, 차별, 폭력, 증오, 갑질 등의 어휘가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계급, 신분의 차등이 엄격했던 옛날은 더했을 것이다. ‘청연’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승과 벗을 넘나든 사우공동체

과거 동양에서는 인간관계를 다섯 가지 가치, 즉 오륜(五倫)으로 요약했다.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친구와 친구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윤리를 말한다. 오륜의 차례가 인간 윤리의 서열을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부모 자식 사이가 가장 중하고, 친구 사이는 가장 가볍고 소홀히 할 수 있는 관계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 친구의 가치를 앞세우는 그룹이 있었으니 바로 실학파였다.


“우정이 오륜의 끝에 놓인 것은 가치가 낮아서가 아니다.

이는 화수목금토의 오행(五行) 가운데 토(土)가 나머지 네 가지에 두루 작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오륜의 네 가지 관계(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에서

벗의 덕목인 믿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네 가지의 덕목은 지켜질 수 없다.

인륜이 무너질 때 벗이 이를 바로잡는다.”

- 박지원 <방경각외전> 서문-





연암 박지원의 말처럼 우정은 인, 의, 예, 지의 인간 덕목을 떠받치는 기본 가치이다. 그러나 이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18세기 전후 한양 도심의 백탑(지금의 탑골공원) 주변에 살던 백탑파 실학자들의 우정은 각별했다. 박지원, 유금,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은 마음에 맞는 벗을 찾아가 시문을 교환하고, 세상사를 이야기했다. 그 가운데에는 스승-제자뻘의 나이 차이도 있었지만 모두는 연령, 신분, 당색을 뛰어넘어 평등한 벗으로 대했다. 그들은 종로 골목을 휘저으며 함께 술 마시고 시 짓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들에게 네 것 내 것 구분은 없었다. ‘친구들의 것은 공동의 것’이었다. 백탑파는 우정의 공동체였다. 그들은 최초의 동인시집이라 할 <한객건연집>을 냈으며, 공동 문집 <백탑청연집>도 발간했다. 그들의 우정은 국경도 초월했다. 연행사절단으로 북경을 방문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는 곧바로 그곳 학자들을 벗으로 사귀었다. 그들은 하늘 끝에서 만난 친구, 곧 천애지기(天涯知己)였다.




백탑파가 서울에서 우정을 쌓아간 뒤 얼마 지나, 서학쟁이라는 굴레를 쓰고 남쪽으로 유배 간 다산 정약용은 강진의 청년들과 공부 공동체를 만들어갔다. 뒷날 다산초당에서 모였던 다산 정약용과 18명의 제자들을 일컬어 ‘다산학단’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은 스승이기에 앞서 희망을 가르친 벗이었고, 제자이기에 앞서 진심을 내보인 친구였다. 옛말대로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다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다.” 다산학단은 스승과 벗을 넘나든 ‘사우(師友)’ 공동체였던 것이다.




실학의 토대, 실학청연

‘실학청연’전은 이런 ‘우정’과 ‘사제의 정’을 확인시켜주는 전시다. 첫 전시 공간을 채운 것은 유물이 아니라 비디오 프로젝션이다. 텅 빈 방의 벽에 매화를 주제로 하는 영상이 흘러나온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매화꽃 사이로 중국 문인 나빙이 박제가에게 건넨 시 구절이 비친다.


‘사랑스런 그대 모습 무엇에 비길까/ 매화 변해 그대 된 것 이제 알았네.’


매화는 선비들의 기품, 실학자들의 우정을 상징한다.  


실학박물관의 기획전시실은 크지 않다. 그 좁은 전시공간의 3분의 1을 비디오 아트로 연출한 것은 파격이다. 첫 번째 전시공간을 텅 비운 것도 신선하다. 우정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라는 뜻으로 읽힌다. 두 번째 방부터는 <한객건연집>(1777), <청장관전서>(1795), <과정록>(1826) 등 실학자들의 우도(友道)를 살필 수 있는 서적, 글씨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는 주연이 아닌 조연이다. 실학자들이 활동했던 공간을 그린 작품 아래에 유물을 살짝 내려놓는 식이다. 이번 전시의 중심은 동양화가 이동원 작가가 실학자의 공간을 그려낸 <다산초당>, <연암산방>, <백탑아집>과 같은 한국화이다. <다산초당도>와 같은 옛 그림이 전하지만, 전시장에는 <두강승유첩> 등 한 두 점만 나왔을 뿐이다. 현대 작가의 그림을 통해 관람객들로 하여금 ‘실학의 공간’에 친숙하게 다가가게 하려는 취지로 이해됐다. 출품된 그림·유물은 20여 점으로 많지 않다. 작품이 놓인 전시장 벽면에는 실학자의 우정을 주제로 한 시 구절, 잠언 등이 쓰여 있다.


‘희미한 달빛에 / 책을 들고 벗을 찾네 / 나는 술을 사고 / 벗은 해금 켜고…’


전시장을 거닐면 ‘우정의 공동체’를 일구었던 실학자들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200여 년 전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크게 다르다. 시간은 세상과 인간의 삶을 바꿔놓았다. 그래도 변치 않은 게 있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우정에 기반한 신뢰와 배려, 환대와 포용이라는 사실이다. 서울 백탑거리, 강진 다산초당에서 일군 우정의 공동체가 조선 실학의 토대를 마련했음을 말할 것도 없다.




실학박물관 2021년 상반기 기획전 〈실학청연, 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

기 간 2021년 5월 12일(수) ~ 2021년 8월 22일(일)

장 소 실학박물관 기획전시실(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 747번길 16)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종료시간 1시간 전 입장 마감,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 무료(사전예약제)

문 의 579-6000 / www.silhak.ggcf.kr



       실학박물관 2021년 상반기 기획전 〈실학청연, 벗과 사제의 인연을 그리다〉 은 경기문화재단 유튜브 채널

    <전시인사이드>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전시인사이드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teX_GVju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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