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우리, 하나의 숲 속에서

2021-11-11 ~ 2022-02-27 / 《광대하고 느리게: 권혜원, 박은태, 조은지》


우리, 하나의 숲 속에서

《광대하고 느리게: 권혜원, 박은태, 조은지》 



글, 사진 김지연 미술비평가 



“식물들, 끝도 없는 식물, …따뜻한 산들바람은 꽃가루와 홀씨를 날랐으며, 그 어떤 발도 걸어본 적이 없고 그 어떤 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잔디가 깔린 평야 위, 히스 없는 황야 위, 꽃 없는 숲 위에 달콤한 녹색 먼지를 불어 쌓이게 했다. 따뜻하고 슬픈 세계, 슬프고 평온한 세계.” -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두방향』 중에서


SF소설의 대가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집 『바람의 열두 방향』에 실린 단편 소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서는 새롭게 정착할 행성을 찾아 열 명의 탐사대원을 파견한다. 도착한 곳은 순수 식물계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수천만 년의 침묵을 깬 이들 인간에게 식물들은 거대한 공포를 느끼고, 탐사대원들은 이에 위협받는 상황에 이른다. 소설은 우리 인간이 아는 것보다 훨씬 넓은 세계를 그리며 인간과 문명 중심적 사고를 전복한다.


경기문화재단 지원사업 ‘2021 경기 시각예술 집중조명 프로젝트’ 선정 작가들의 신작 발표전 《광대하고 느리게: 권혜원, 박은태, 조은지》는 바로 이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 세 명의 작가가 긴 시간 동안 지속해온 예술적 여정에 경의를 표하는 제목인 동시에, 타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며,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비물질’, ‘노동과 인간’이라는 관계의 틈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지닌 이 작품들을 공통으로 표현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경계를 해체하기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조은지 작가가 만들어낸 거대한 공간이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가 맺는 관계, 무의식의 세계를 반복적인 행위로 표현해온 작가는 신작 <文漁(문어)의 무늬는 文(문)이다>에서 인간과 전혀 다른 신체 구조를 가진 생물 ‘문어’에 주목한다. 문어는 신경세포가 온몸에 퍼져 있어 신체의 각 부분에서 독립적인 판단이 가능하며, 무려 1만개에 이르는 화학수용체를 가진 빨판으로 세계를 그저 감각하고 느낀다. 우리 인간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조은지, 文漁의 무늬는 文이다_설치및낭독퍼포먼스_가변설치_2021


작가는 여기서 영감을 얻어, 과거-현재-미래는 물론, 나와 타자,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무너뜨린 언어를 전시장의 벽에 기록하고, 문어의 먹물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우리는 이곳에서 문어와 같이 감각하며 시공간을 넘나들고 데미안과 보르헤스와 싯다르타, 작가와 그의 쌍둥이 ‘옥토-8’들을 만난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나조차도 하나가 아니다. 세계는 하나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없고, 그럴 수도 없다. 공간 속에서 우리의 경계가 흐려지고 해체된다.


한편, 소설 속 탐사대원들은 숲이나 식물의 입장에서 인간처럼 뿌리가 없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마치 산불이나 허리케인처럼 위험한 존재일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식물들이 가만히 있다고 여길 뿐, 우리가 빠르고 위험하게 움직인다고 생각지 못한다. 권혜원 작가의 ‘식물 리서치’ 연작은 그런 식물의 시선을 경험해보도록 이끈다.

영상작품 <급진적 식물학>에서는 인간의 눈이 무언가를 바라본다. 그런데 우리는 관찰당하는 식물의 입장이다. 인간은 식물을 데이터화하기 위해 관찰하고 기록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식물의 시선은 어떨까.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린다. 소설 속에 나왔던 따뜻하고 슬프고 평온한 세계가 거기 있다. 그 위로 오버랩 되는 커다란 눈동자, 깜빡이는 눈꺼풀은 너무도 이질적이다.


                                                                  권혜원_급진적 식물학_4K, 싱글채널 비디오, 6채널 오디오 설치_2021



타자를 상상하기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숲이, 아직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끝없는 숲이 있다. 우리 각자는 매일 밤 홀로 그 숲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두 방향』 중에서



                                                     권혜원_나무를 사랑하는 방법_4k 3채널 비디오, 4채널 오디오 설치_2021


사진 오른쪽 작품 <나무를 상상하는 방법>에서는 작가가 상상하는 5명의 정원사(사람, 새, 정체가 불분명한 비인간적 존재)가 차례로 등장하며 덕수궁의 정원이 어떤 시간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금강소나무, 향나무, 쥐똥나무와의 대화를 통해 그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식물이 되어보는 연습을 한다. 3채널의 4K영상과 4채널 오디오가 만드는 선명한 이미지와 입체적 음향 덕분에 잠시 전시장이 아닌 곳으로 떠나 나무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무가 되는 상상을 한다. 매일 밤 마음속 숲에서 길을 잃은 것은 어쩌면 그곳의 규칙을 이해하고 원래 있던 존재들을 배려하는 대신 내가 아는 방식으로만 길을 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박은태 작가는 우리 인간을 자연스러운 인간이 아니도록 만드는 경험들, 즉 노동과 인간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천근의 삶’이라는 작품 시리즈명처럼 노동하는 삶은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 거대한 건축 현장이나 전자 기판을 배경으로 그려진 조그만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구조 안에서 소외된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다.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는 철근이나 회로 사이에 갇힌 노동자들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정교하게 구획된 사회 구조 속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실제 우리의 삶처럼 말이다.



                                                                                   박은태_녹색모듈2(부분)-캔버스에 아크릴_250*324cm_2021


그러나 약간의 희망이 있다. 작가는 <녹색모듈> 시리즈에서 전자 기판을 마치 초록색 들판처럼 펼쳐낸다. 비록 그 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작은 실루엣은 같을지라도, 조금 더 쾌적하고 안전한 환경 속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조금의 틈을 만들 때, 그곳을 통해 소외된 것을 직시하고 함께 나아갈 때, 우리는 조금 더 나은 곳에 도착할 수 있다.


광대하고 느리게 도착하는 곳


이 전시에서 작품 외에 특징적인 것은, 전시 공간을 가로지르는 가벽이다. 눈썰미 좋은 관객은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여름 열렸던 전시 《빈지 워칭; 14284″》에 쓰였던 구조물을 재활용한 것이다. 전시 구조물들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친환경적인 시도다. 또한 전시장 가운데 마련된 자료실에는 큰 글씨 책, 점자책, 시각장애인이 그림 속 전자기판의 촉감을 느껴볼 수 있도록 제작된 그림판 등 전시 취지에 맞는 자료가 준비되어 있다. 주류 중심에서 벗어나 타자를 바라보는 전시의 의미를 배가시키는 구성이다.

전시는 편견과 한계를 극복하고 타자를 상상하며, 직면한 문제 앞에서 서로 배려하고 조율하면서 느리지만 광대하게 향하는 미래를 그린다. 목적지는 가는 도중에 얼마든지 수정되기 마련이다. 여중 중 계속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목표지점을 향해 앞만 보고 빠르게 달린다. 직진한대도 무언가 얻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원래 알던 세계에서 아주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본 작은 것, 혹은 내심 가지려고 했던 것의 껍데기뿐일 수도 있다. 출발하기 전에는 항상 목적지에 있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탐사대원들은 숲이 거대한 전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알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속한 세계도 하나의 숲이다. 그래서 작게는 우리의 삶과 사회, 크게는 지구와 우주, 생명의 순환 속에서, 내가 걷고 있는 곳이 어디쯤이고 목적지에 관해 몰랐던 사실이 있는지, 함께 걷는 이는 누구인지 항상 둘러보아야 한다. 더불어 가는 길에 누구도 낙오되지 않도록 발걸음의 속도를 맞추거나 다친 동료를 업고 걸을 수 있을지 상상하고, 되도록 모두가 함께 편안히 걸을 수 있는 다른 길이 있는지 끊임없이 탐색해야 한다. 낙오자는 타자 아닌 자신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일단 출발해 보아야 알 수 있다. 이왕이면 주변을 널리 둘러보며 차근차근 한 걸음씩 보태 조금 느리게 도달한 목적지는, 처음에 계획한 곳보다 더 광대하고 풍요로운 들판이 아닐까.


* 경기도미술관 《광대하고 느리게: 권혜원, 박은태, 조은지》는 2월 27일 폐막했음을 알립니다.





김지연 미술비평가, 작가. 예술과 도시에 깃든 사람의 마음, 서로 엮이고 변화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범위를 한정 짓지 않는 글을 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미술무크지 『그래비티 이펙트』, 기타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저서로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삶과 예술에 관한 책 『마리나의 눈』, 보통 사람을 위한 현대미술 에세이 『보통의 감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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