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이뭣꼬, 지금 여기 나를 바라보다

천덕산 품 안에 숨겨진 작은 사찰 '안성 청원사' 마음 안겨볼까

고개 너머 저수지 옆 숨은 듯 그윽한 사찰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안성톨게이트 부근에는 안성시를 홍보하는 커다란 야립광고판이 있다. ‘남한 유일의 3‧1운동 실력항쟁지’라는 카피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른 실력항쟁지는 북한의 평안북도 의주군과 황해도 수안군이다. 정확히는 4‧1만세 항쟁 당시, 안성시 양성면과 원곡면 주민들은 극렬하게 만세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4월 1일과 2일 이틀간 관할지의 일본인들이 완전히 물러났다. 단 이틀간의 해방이었지만 주민들의 독립정신이 빚은 굉장한 성과였다.

주민들은 횃불을 든 채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에 있는 만세고개를 넘나들며 시위를 전개했다. 만세고개 일대에선 연일 ‘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훗날 안성 3·1운동 기념관이 바로 이곳 만세고개에 세워졌다. 원곡면 방향으로 만세고개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내려가면 우측에 ‘청원사’라 쓰인 갈색표지판이 보인다. 주목성은 없다. 마음먹고 절로 향하지 않는 이상 모르고 지나치기가 태반이다. 이 일대 명소는 오직 만세고개와 3·1운동 기념관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안성의 불교사찰로는 이른바 안성 3대 고찰로 불리는 석남사, 청룡사, 칠장사가 유명하다. 청원사는 안성 시민들도 잘 모른다. 청원사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이들은 대부분 낚시꾼들이다. 마을길을 따라 100여 미터만 들어가면 성은낚시터 혹은 성은저수지라 불리는 작은 저수지가 보인다. 만세고개의 옛 이름도 성은고개였다. 원곡면 성은리에 속해있어서다. 완연한 봄이 오자 낚시터를 가로지르는 수상좌대에는 강태공들로 만석이다. 그들은 가만히 찌를 응시하고 조용한 호수는 윤슬로 아름답다. 평화로운 풍경을 뒤로 하고, 차 한 대 간격의 좁은 포장도로를 따라 600미터 쯤 산 쪽으로 들어서면 청원사가 나온다.

‘이뭐꼬’, 절이 던진 질문일까, 내가 던진 질문일까

일주문은 없고 자그마한 석등 두 기가 사찰 진입로 양 쪽에 서 있다. 그 앞에는 ‘이뭐꼬’라고 쓰인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깊은 산중은 아니지만 은밀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감돈다. 지근거리에서 격렬한 만세시위가 일어났을 때에도 이곳 사찰은 은신처처럼 적요했을 듯싶다. ‘이뭐꼬’라는 말은 ‘이것이 무엇인가’의 경상도식 표현이다. 참선수행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화두 ‘시심마(是甚麽)’를 한국식으로 바꾼 것이다.

수행자는 3음절의 짧고 강렬한 화두를 스스로에게 던지며 숨을 내쉬는 내내 참구(參究)한다. ‘이뭐꼬’하고 화두를 던져 의심을 일으키면 부정적인 감정은 사라지고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마음이 평온해진다. 참선수행을 꾸준히 한 이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예상치 못한 바이러스의 창궐과 범죄로 혼탁해져만 가는 오늘날, 명상 인구는 가파르게 늘고 있다. 경상도 아지매의 경쾌한 ‘이뭐꼬’ 보다 스님의 낮게 울려 퍼지는 ‘이뭐꼬’가 더 익숙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수양하듯 미동 없이 앉아있던 낚시꾼들을 바라보며 가다듬었던 마음은 자연스레 고찰로 옮겨간다.


표지석에서 짐작할 수 있듯 사찰은 수행자를 맞이하는 아담한 수행도량이다. 길은 아름드리 고목들 앞에서 끝난다. 고목 앞에는 오밀조밀한 이랑을 만들어둔 한 뙈기 텃밭이 있다. 공양간 푸성귀가 자라는 땅일 것이다. 시야의 정중앙에 들어서는 맞배지붕의 대웅전과 호리한 석탑이 꾸밈없이 그윽하다. 네댓의 전각들로 이루어진 작은 도량은 야트막한 천덕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고 아름답다. 절마당에 발을 디디면 잔잔했던 호수에 파문이 일 듯 소란해지는 것은 아닐까, 적막을 깨고 싶지 않은 이방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진다.


부처님, 언제 팥죽을 드셨습니까?

이름이 덜 알려진 소규모 사찰이라지만 한국불교사에서 청원사는 그 나름의 입지가 단단하다. 특히 주법당인 대웅전은 누가 보더라도 기품과 고격(古格)을 느낄 수 있기에 처음 발걸음이 어색했던 이들도 전각 앞까지 가보지 않을 수가 없다. 대웅전은 약한 배흘림 원주의 전면 기둥과 배흘림 없는 후면 기둥으로 세워진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 전각이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1854년 중수되었다고 전하는데 목재의 나이테를 연구한 결과 1535년에서 1550년 사이에 벌채한 목재로 건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빛바랜 단청과 맞배지붕 건물 특유의 담박함이 돋보이는 대웅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4호로 안성시 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문화재적 가치와 별개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타이틀을 가졌음에도 관광명소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아리송하다. 뿐만 아니라 대웅전 내 본존불은 건칠아미타여래좌상인데 제작방식이 흔치 않은 건칠불상으로 비록 문화재 지정은 되지 않았으나 전문가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본존불 복장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의 내용을 보살들에게 설법한 경문 『대방광불화엄경』 외 9권의 사경이 발견되었고 일부가 보물 제740호, 보물 제1795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고려 충렬왕이 국태민안을 위해 발원한 사경으로 청원사는 13세기에 국가의 원찰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앞 칠층석탑은 단아한 전각과 썩 잘 어울리는 모양새다. 전체적으로 기다란 인상이라 묵직함은 떨어지지만 경박하지 않으면서 세련되고 개성 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건물도 오래되고 보물도 많은 절이니 그간의 사연도 구절양장일 테다. 전하기로 사찰은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훗날 발견된 사경 덕분에 고려시대 국가 사찰이었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어떤 연유인진 몰라도 고려시대 때 청원사(淸願寺)였던 이름이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청원사(靑原寺)로 바뀌었고 18세기 이후 현재의 청원사(淸源寺)가 되었다. 이래나 저래나 독음은 청원사고 맑고 푸른 도량으로 연연하게 이어져 왔다. 한편 절을 감싼 천덕산(天德山)은 병자호란 때 의병 천여 명이 은신하여 목숨을 구했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절에는 재미있는 전설도 내려온다. 청원사에서 불도를 닦던 스님이 명절이 되어 팥죽을 쑤려고 했다. 그러나 음식을 한 지가 오래되었던 스님은 부처님께 공양할 팥죽을 쑬 수 있는 불이 없었다. 스님은 마을에 가서 불씨를 얻어 어렵사리 절에 돌아왔다. 그리곤 대웅전에 들어갔더니 이미 부처님의 입에는 팥죽이 묻어있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스님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함이었을까, 오래 수행한 스님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결과일까.


절에 들른 찰나만이라도 나를 바로 볼 수 있다면

대웅전을 마주보고 왼편은 종무소, 오른편은 공양간이다. 석축을 오르면 극락세계라 한글현판을 건 극락전과 산신각, 불식선원이 있다. 절을 둘러보는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마당에 서면 탑처럼 서서 고요에 들고픈 분위기가 감지된다. 마침 칠층석탑 옆에는 기단부가 없는 꼬마탑이 하나 서 있다. ‘기원의 탑’이다. 탑 아래 작은 비석에 탑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쓰여 있다. 아마도 흩어져 있던 오래된 탑의 부재들을 모아 다시 세운 듯하다. 조금은 엉뚱한 배치인 듯 하지만 칠층석탑 곁을 지키는 귀여운 벗처럼 보여서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2015년까지만 해도 대웅전 앞에는 좌우로 길게 뻗은 요사채가 있었다. 지금은 절에 들어섰을 때 정면에 대웅전이 보이는 ‘ㄷ’형태의 가람이지만 요사채가 있을 땐 ‘ㅁ’형태로 정면에서는 도량이 보이지 않았다. 요사채를 허문 덕분에 다소 폐쇄적으로 보였던 절은 활짝 열린 모습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찾는 이가 많진 않다. 청원사는 그저 묵묵하게 참선을 수행하는 선원으로 자리매김해왔다. 현재는 매주 월요일 오후 1시에 사경 법회를 하며, ‘이뭐꼬’ 화두를 들고 누구든 자유롭게 참석해 참선 수행 정진을 할 수 있다.

‘만약 고요한 곳을 바른 것이라 여기고 시끄러운 곳을 틀린 것이라 여기면 이것은 세상의 모습을 깨트려서 실상을 구하는 것이고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는 것이다’는 불교 명구가 있다. 간화선의 창시자인 12세기 중국 스님 대혜종고가 <서장>에 남긴 말이다.

그러나 필자와 같은 미혹한 중생에게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속세에서 휘청거리다가 외딴 절마당에 들어서서야 ‘휴우’하고 긴 숨을 뱉으며 평안을 얻는다. 사실 이런 핑계로 꼭꼭 숨어있는 청원사 같은 산사를 찾는 것이다. 절에 들른 찰나의 시간만이라도 나 자신을 오롯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이뭐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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