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빛과 어둠을 소요하는 시간, 동두천

소요산으로 떠난 하루 여행

동두천 소요산 자락에는 노인과 아이가 소요한다. 그들에게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닌다’는 의미의 소요가 잘 어울린다. 산을 수직으로 오르는 일은 힘겹지만 산을 수평으로 걷는 일은 기꺼이 즐긴다. 자신들의 보폭으로 찬란한 삶의 한 순간을 지난다. 노인은 언젠가 아이였고 아이는 언젠가 노인이 될 테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길고도 짧은 생을 사유하며 산자락을 걸어본다.



최북단 전철역을 타이틀을 넘기다

2023년 봄, 연천역이 개통한다. 1호선 전철이 연천역까지 연장되면 소요산역은 더 이상 최북단역이 아니라는 소식을 접한 이후로 어쩐지 한번은 소요산역에 닿고 싶었다. 한번쯤 소요산에 가보고도 싶었다. ‘다음 열차는 소요산행 열차입니다’라는 1호선 전철 알람 방송을 들을 때마다 ‘소요’라는 단어를 괜스레 되뇌곤 했다. 소요는 동음이의어로 여러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중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의 뜻이 있다. 소요산의 소요(逍遙)가 이를 가리킨다. 사람들에게 산은 정상을 향해 오르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더구나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는 그만큼 등산인구도 많아서 주말이면 전국 각지의 산에 형광색 등산복 군단이 모여든다. 그런데 소요산은 그 이름 때문인지 어쩐지 오르지 않고 슬슬 거닐며 돌아다녀도 좋을 것 같다. 사실 소요산은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는 동네 뒷산 수준의 낮은 산은 아니다. 해발 587m로 최고봉인 의상대를 찍으려면 왕복으로 최소 4시간은 잡아야 하며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지만 험지가 곳곳에 도사리는 산이다. 필자는 등산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역 주변을 소요하기로 마음 먹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를 생각한다

소요산역은 딱히 특별한 풍경이랄 게 없고 주변은 다소 휑하다 싶은데 역사에서 3분 정도만 걸으면 금세 소요산 앞 먹거리 골목이 나온다. 본디 등산로 입구 먹거리촌은 막걸리에 파전, 닭도리탕 등을 먹는 손님들로 벅적스럽다. 먹거리 골목을 벗어나 등산로 입구에 들어서니 산자락을 소요하는 이들이 무수하게 보였다. 그들은 둘둘 셋셋씩 모여 돗자리를 펴고 싸온 음식을 먹기도 했고 홀로 와서 트럼펫, 하모니카를 연주하기도 했으며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개중에는 누구보다 바지런한 발걸음으로 산에 오르는 이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는 물가에 앉아 있거나 슬슬 뒷짐을 지고 주변을 걸었다. 그 풍경은 노인들의 집결지로 상징되는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과 매우 비슷했다.


그 분위기와 궤를 맞추듯 등산로 입구 오른편 산기슭에는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자리한다. 2002년에 개관한 박물관은 6.25전쟁 참전자들의 희생을 기리고 유엔 참전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건립되었다. 전체 면적의 42%가 미군공여지였던 동두천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박물관의 전시실과 내부 전시 콘텐츠는 많이 노후하고 주목성도 떨어져 개편이 필요해보인다. 6.25전쟁의 전후 상황과 전쟁발발에서 휴전협정에 대한 소개와 유엔참전국들의 현황과 활약상에 대한 소개가 주를 이루는데 서울의 전쟁박물관 전시를 축약해놓은 모양새다.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을 비롯해 6.25전쟁과 관련한 기념관과 박물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야외에 탱크와 전투기 등 전투용 차량과 비행기를 전시하는데, 그 모습이 평화라는 간판 아래 퍽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 육중한 고철들이 전쟁의 유물이긴 하나 호국장병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함보다 전투력을 과시하는 산물처럼 보여서다. 다만 참전용사들에게는 치열하고 참혹했던 전투의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계기가 될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까지 생존해있는 참전용사의 수는 드물다. 스무살에 참전했다면 아흔이 넘은 나이다.

상기된 얼굴로 박물관을 오르는 두 노인을 보았다. 건물이 산자락에 있다 보니 쇠약한 노인들에게는 다소 힘에 부친 길이다. 그들의 발걸음은 느리지만 꾸준했다. 웅장한 건물, 높고 가파른 계단. 수직적이고 제왕적인 설계다. 조금만 더 땅을 다져 우러러 보지 않고 바로 볼 수 있게 건축했으면 좋았을 텐데, 역동의 세월을 살아온 노인들이 조금 덜 힘들게 둘러볼 수 있게 배려했으면 좋았을텐데 자꾸 아쉽다.


어린이를 위한 미래를 생각한다

자유수호박물관에서 5분만 내려가면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이다. 전혀 다른 성격과 타깃의 두 박물관이 앞뒤로 자리한 조화가 재밌다. 이곳이야 말로 자유와 수호, 평화라는 키워드가 맞춤 단어처럼 들어맞는 곳이 아닐까. 박물관 안팎에서 뛰노는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은 자유롭고 지척에 선 어른들이 그들을 수호한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퍼질 때에 우리는 그 순간을 평화라고 부른다.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숲에서 꿈꾸는 아이들’이라는 주제로 조성되었다. 소요산 품에 기대 만든 박물관다운 테마다.

1,2층과 옥상, 야외놀이터로 구성된 내외부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소재들로 가득하다. 얼른 눈에 먼저 띄는 것은 공룡 모형들이다. 1층은 고생대와 중생대에 살았던 생명체를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전시한 공간이다. 어른들이 흔히 생각하는 '전시'가 아니라 실내놀이터와 다름없는 시설이다. 어린이들은 온몸으로 배운다. 뛰고 만지고 노래부르면서 새로운 것을 익혀나간다. 2층은 생태존, 계곡물존, 오감숲존이다. 박물관 밖 숲으로 나가면 만날 수 있는 동식물과 곤충들을 소개하고 숲생태계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이곳에 들른 가족 나들이객들은 같은 산자락에 마련된 소요별&숲 테마파크에 왔다가 박물관을 들른 경우도 많다. 소요별&숲 테마파크는 대부분 캠핑존으로 이루어져 있고 숲속 놀이터와 잔디마당 등이 조성되어 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로 가족끼리 즐기는 캠핑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곳 캠핑존도 가족 캠핑족들이 부쩍 늘었다. 아이들에겐 이만큼 추억 쌓기 좋은 곳이 더 없어 보인다. 가족과 오붓하게 캠핑도 즐기고 박물관에서 공룡친구들과도 신나게 노니 훗날 그 기억은 자기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각별함으로 남으리라.

원효와 요석 부부가 머물렀던 산

그래도 이왕 산에 왔으니 정상에는 못 미쳐도 중턱의 산사까지는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소요산에는 654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천년고찰 자재암이 있다. 소요산의 홍보모델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다. 원효대사가 창건하거나 나무를 심고 간 절이야 전국에 손꼽을 수 없이 많아서 특별하다고 할 순 없는데 요석공주와 함께 커플로 내세워지는 경우는 경주 외엔 본 기억이 없다. 소요산 등산로 초입부터 귀여운 캐릭터로 표현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가 담벼락과 안내팻말 등 곳곳에 그려져 있다. 부부가 함께 소요산으로 단풍놀이라도 왔던 걸까.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라 일컬으며 전국을 돌면서 대중 교화에 힘쓴다. 그러면서 소요산도 들렀는데 요석공주도 아들 설총과 함께 와서 별궁을 짓고 원효대사가 수행을 하던 원효대를 향해 아침저녁으로 삼배를 올렸다고 한다. 등산로 입구에서 800m 정도 걸어 오르면 처음 만나는 소요산의 명소가 ‘원효폭포’다. 층암절벽 사이로 10m 정도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떨어진다. 계곡폭포가 다 그렇듯 강수량에 따라 폭포의 규모가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원효폭포는 원체 물줄기의 폭이 좁은 소형 폭포다.


폭포 옆엔 작은 굴이 나있다. 굴 이름도 원효다. 클리셰이긴 해도 좌선수행하기 딱 좋은 자리다. 지나간 긴 세월 동안 원효든 누구든 굴에 들어 앉아 좌선한 이가 수두룩할 것 같다. 폭포도 굴도 그 규모가 한 사람이 수행하기 적절해 보인다. 현재 굴 안에는 석가모니 삼존불과 좌우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원효폭포에서 등산로 쪽으로 108계단이 나 있다. 이 계단을 오르면 원효대사가 좌정했다는 바위 원효대다. 원효대에서 5분쯤 더 산길을 따라 걸으면 자재암이다.


산은 절을 품고 절은 폭포를 품어

자재암은 원효대사 창건 당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세월을 훌쩍 뛰어 고려 광종 때 중창하고 소요사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세종실록』에 소요사를 태조의 원당으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김시습의 시에는 소요사가 폐허가 되어 있다고 쓰여 있어 15세기 즈음에는 거의 폐사지가 되었던 것 같다. 1872년(고종 9년)에 이르러서야 원공스님, 제암스님에 의해 영원사라는 사명으로 중창되었다가 1907년 큰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고 1909년 절을 다시 지으면서 자재암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게 되었다.


어렵사리 명맥을 유지해온 사찰은 6.25전쟁 때 또다시 파괴되었고 1961년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각들이 하나씩 새로 생기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천년고찰이라는 수식을 뒷받침하기에는 절의 역사에 공백이 많다. 허나 우리나라는 긴 세월 불교의 융성과 쇠퇴가 반복되었고 간간히 큰 전쟁까지 일어나서 자재암뿐만 아니라 숱한 사찰들이 촘촘한 연대기를 남기지 못했다. 사찰에 들어서면 근사한 폭포가 하나 더 있다.


산은 절을 품고 절은 폭포를 품었다. 가람 안에 폭포가 있으니 절이 작아도 웅장하고 전각이 신축이어도 유구해 보인다. 이름도 청량한 청량폭포다. 규모는 원효폭포와 비슷한데 폭포를 올려다보는 원효폭포와 달리 경내에서 폭포를 내려다보는 위치라서 조금 더 웅대하게 느껴진다. 청량폭포 옆에도 암굴이 있다. 외벽을 새로 쌓아 인공석굴처럼 보이지만 실은 천연동굴로 이 굴 역시 원효대사의 수행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나한전으로 16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나한전 입구에는 물이 퐁퐁 솟는 작은 샘이 있 하나 있다. 그 이름은 아니나 다를까 원효샘이다. 원효대사가 머물 때부터 이 자리에서 석간수가 솟아 올랐고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규보는 원효샘의 물맛을 보고는 ‘젖처럼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여러 묵객들이 소요산을 오가며 이 물을 길어다 차를 내려 마셨다고 하니 배낭 안에 생수가 있어도 이 물로 목을 축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산 아래, 오래된 그늘이 있다

소요산 주차장에서 50m 쯤 걸어올라 우측 샛길로 다시 100m 쯤 올라가면 폐건물이 하나 보인다. 2층의 길고 반듯한 건물. 페인트칠은 다 벗겨져 콘크리트 벽이 드러나있고 유리창도 죄다 깨졌다. 해가 쨍쨍한 날임에도 내부는 빛이 들지 않아 어둡기만 하다. 주변은 잡초가 무성해 가까이 다가가기도 망설여지는 폐건물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몽키하우스라고 부른다.

6.25전쟁 발발 후 동두천에 들어선 미군부대 주변으로는 기지촌이 형성되었고 그 안에 성매매업소들이 생겨났다. 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48년, 정부는 성매매를 법으로 금지시켰고 1961년에는 윤락방지법을 제정해 시행했다. 그러나 미군기지는 예외였다. 오히려 독려하고 강요하기까지 한 정황이 여러 기록에서 포착된다.

1962년, 박정희 정부는 지역재건부녀회에 등록된 미군 위안부 1만600명을 대상으로 정신, 미용, 위생 교육을 포함해 간단한 영어회화 교육을 실시했다. 많게는 한 달에 1번, 필요에 따라 수시로 진행했으며 이 자리에는 미군 장교를 비롯해 군수, 경찰서장, 보건소장 등 공무원들이 참석하기도 했다. 공무원들은 미군 위안부를 향해 “여러분은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주둔하는 미군을 위안하고 나라 경제를 부강하게 하는 일을 하는 애국자”라며 추켜세우기도 했다. 겉으로는 외화벌이 애국자로 칭송하면서 사실상 성매매를 부추긴 것이다. 1965년, 동두천에 처음으로 성병관리소가 세워졌다. 성매매를 단속하기는커녕 성병 발생을 막기 위해 성병관리소를 세운 것이다. 소요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성병관리소는 1973년 지어졌고 미군들은 이곳을 몽키하우스라 불렀다.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기지촌에 뛰어든 여성은 드물었다.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다가, 직업소개소에 갔다가 우연하게 흘러든 곳이 미군기지 성매매업소였다. 일단 들어가면 포주에게 잡혀 나갈 수 없었다.

2018년 2월 8일 서울고등법원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미군 위안부가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2심에서 “성매매 중간 매개 및 방조, 성매매 정당화를 조장했다는 부분에 대해 국가 책임을 인정해 모든 원고들에게 배상책임이 인정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국가가 주도한 성매매와 그로 인한 희생자를 국가기관이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다.동두천시는 2021년, 근현대사의 비극을 기억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이곳 성병관리소를 경기도의 등록문화재 공모에 후보작으로 제출했지만 최종 선정되진 못했다. 같이 제출한 후보작 중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소장한 6.25전쟁 피난민 태극기가 경기도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 태극기는 1951년 9월 북녘에서 탈출하던 피난민이 미군에게 전달했던 것으로 이후 미군의 후손이 동두천시에 기증했다. 우리는 여전히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살아간다.

* 본 기사는 <경기학광장> 16호 휴, 여행 코너에 게재된 기사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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