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의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로 ‘어우름, 머무름 구리둘레길’이 있다. 기다란 형태의 구리시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길로 총 4코스로 구성되어 왕숙천과 한강, 아차산 등을 두루 돌아볼 수 있다. 1코스는 아차산과 망우산을 잇는 7.9km의 ‘역사와 자연이 함께하는 코스’로 이 길의 출발지가 아차산 자락의 고구려대장간마을이다. ‘고구려’를 테마로 하는 구리 여행의 핵심 코스다.

길은 아차산 등산을 포함한다. 아차산은 해발 295m의 야트막한 산으로 오르는 데 크게 힘들지 않고 정상부에서 바라보는 한강 경치는 매우 아름답다. 정상인 아차산3보루 지점까진 여유롭게 30~40분이면 오른다. 또한 일단 능선에 오르고 나면 걷는 길이 내내 평탄하고 주변이 트여 서울과 구리 일대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다.

고구려대장간마을은 고구려식으로 대장간 마을을 연출한 테마 공원이다. 후술할 아차산 보루의 역사적 의미를 홍보하고자 보루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과 함께 설립되었다. 고구려의 발달한 철기문화를 보여주고자 고구려벽화와 아차산4보루에서 발굴된 간이대장간시설을 토대로 상상을 더해 조성했다. 규모가 크진 않아도 꽤 이색적인 볼거리로 둘러볼 만하다. 잘 만든 사극세트장 같다는 느낌이 강한데 실제로 <태왕사신기>, <선덕여왕>, <바람의 나라> 등 여러 사극 드라마 촬영장소로 이용되었다.

그래도 너와집 외관에 입식 생활을 반영한 실내 공간이나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 방 일부를 데우는 쪽구들 형태, 고구려 강서대묘에 그려진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신을 넣은 소품 등 고구려의 주거 특징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차산고구려유적전시관은 아차산을 오르기 전에 쓱 한 번 둘러보면 유익한 장소다. 고구려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과 아차산보루 발굴 과정 및 성과에 대해 여러 가지 시각 자료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아차산하면 아차산성과 온달장군이 먼저 떠오른다. 아차산성은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남서쪽으로 1km쯤 떨어져 있다. 대장간마을에서 산길로 걸어 갈 수도 있고 워커힐 아파트 뒤쪽 등산로를 이용해 아차산성으로 바로 갈 수도 있다.

아차산은 오롯하게 구리시 관할이 아니라 일부는 서울시 광진구에 걸쳐져 있는데 아차산성은 서울시 광진구 관할이다. 그러나 어느 지역 소속이냐를 떠나 아차산성과 아차산 보루들은 고대 군사시설로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온달장군이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한 장소가 아차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기록의 아차성이 아차산의 아차산성이 아니라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일 가능성도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확실하게 판가름할 순 없지만 본래 백제가 쌓았던 아차산성을 후일 고구려가 쓰고 시간이 흘러 신라의 군사시설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거나 온달장군 덕에 한층 유명해진 아차산성 앞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동상이 서 있다. 온달장군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을 모신 관을 옮기려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다가 평강공주가 찾아와 관을 어루만지자 그제야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러브스토리는 2021년 <달이 뜨는 강>이라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샛길로 빠졌다. 고구려대장간마을에서 향할 곳은 서울의 아차산성을 지나 구리의 아차산 보루다.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킨 고구려는 한강을 지키기 위해 아차산에 전초기지를 구축하는데 이것이 보루堡壘다. 보루는 둘레 약 300m 이하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성으로 적의 침입이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산 정상에 만든 방어용 군사시설을 가리킨다. 아차산 일대에는 17개의 보루들이 있다. 아차산과 이어진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에 이르기까지 한강과 천변을 방어하기 좋은 위치에 설치되었다.

고구려대장간마을 뒤편에 아차산 등산로가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아차산 2보루, 3보루, 4보루를 차례로 들를 수 있다. 1보루는 아차산성과 가깝다. 보루에 도착했다는 것은 곧 산 정상 능선에 닿았다는 의미로 4보루를 목적지 삼아 아차산을 오르면 가벼운 산행 코스로 적당하다. 2보루에 닿기 전에 산을 오르면서 지나는 대표적인 장소들로 큰바위얼굴과 대성암이 있다.

산을 5분쯤 올랐을 때 골짜기 건너로 큰 너럭바위가 있는데 그 주변에 눈코입을 분별할 수 있는 얼굴 형상의 바위가 보인다. 관람대와 커다란 안내판이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온전한 얼굴은 아니고 반쪽짜리 얼굴이다. 그런데 이 바위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관람대의 안내판이다. 보기 드물게 영어가 아닌 일본어가 병기된 안내판인데 내용을 보면 그 이유가 바로 드러난다. 큰바위얼굴을 발견한 때가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촬영했던 2007년인데 이 작품에서 주연 광개토대왕역을 맡은 배우가 배용준이다.

배용준이 누구인가. ‘욘사마’로 불리며 일본 중년여성들에게 신드롬급 인기를 얻은 인물이다. 그가 인기를 구가하던 2000년대 후반에는 배용준과 연관된 장소라면 모조리 찾아가 인증샷을 찍는 열혈 일본인 팬들이 많았다. 이 안내판은 그들을 의식해 세워둔 듯하다. 안내판 설명에는 친절하게도 바위의 모습과 배용준의 얼굴이 닮은 것 같다고 쓰여 있다. 대중 미디어와 스토리텔링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싶다. 전설 하나 없었던 큰 바위에 의미를 부여해 이름을 지어주고, 이를 인기 유명인과 엮어 세상에 알리니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든다. ‘창조관광’이 따로 없다. 드라마에서 배용준이 맡은 역할이 고구려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인 광개토대왕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큰바위얼굴에서 데크 계단을 따라 10분 정도 더 오르면 작은 절 대성암이 나온다.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도를 닦던 사찰이라고 전해지는데 경내로 들어가면 일명 쌀바위라 불리는 구멍 난 바위가 있다. 의상대사가 불법을 전하던 시절, 바위구멍으로 쌀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공양을 했는데 어느 날 욕심 많은 이가 쌀을 더 얻고자 구멍을 크게 넓히려 하자 쌀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쌀바위 전설’이 내려온다. 언제나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다. 문득 욕망이란 단어에 ‘적당히’라는 수식이 타당한가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내 의지로 태어나지 않아서일까, 삶은 참 쉽지 않다. ‘아차!’하고 실수하고 후회하는 순간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차산의 이름 유래 중 가장 유명한 설에도 ‘아차!’하고 무엇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을 때 하는 탄식이 들어있다.

조선 명종 때 홍계관이라는 유명한 점쟁이가 있어 왕은 그를 불러 상자를 보여주며 안에 무엇이 있는지 맞춰보라 명했다. 홍계관은 쥐가 다섯 마리 들어있다고 답했는데 상자를 열어보니 쥐가 한 마리뿐이었다. 왕은 점쟁이를 사기꾼이라 여겨 처형 명령을 내렸는데 나중에 쥐의 배를 갈라보니 뱃속에 새끼 4마리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명종은 뒤늦게 ‘아차, 내가 성급했구나’ 하고 후회했고 홍계관이 처형당한 산은 아차산이 되었다는 설이다.

대성암을 지나 급경사를 10분쯤 오르면 아차산 제2보루다. 둘레 길이 약 50m의 작은 보루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가 표식의 전부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쉽사리 지나치게 된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고구려 토기의 전형인 몸통긴항아리 조각들이 발견되었고 남쪽에 성벽 3단이 드러나 있다. 더욱이 제2보루 앞 너럭바위는 한강과 구리 일대를 조망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자리여서 사람들이 한참을 앉았다 가는 장소다. 드넓은 한강 동쪽으로는 구리암사대교와 고덕대교, 강동대교가 차례로 보이고 고덕동과 암사동 일대가 강 건너로 펼쳐진다. 아파트가 밀집된 이들 동네를 멀리 갑산과 철문봉, 예봉산, 예빈산, 검단산 등 남양주시에 위치한 산들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강변은 공원과 야트막한 구릉으로 온통 푸르다.

한강이 보이는 서울의 고층 아파트에 사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의 희망사항이라는데, 가장 큰 이유야 값이 솟은 부동산 때문이라 해도 확실히 높은 데서 바라보는 한강 전망은 몹시도 근사하다. 이럴 때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나라 지형 환경에 참 감사하다. 고층 아파트에 거주하지 않아도 공짜로 멋진 전망을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삼국시대,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았던 한강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다리도 지우고 아파트도 지우면 조금 비슷해질까. 한강에는 나룻배들이 여러 척 떠 있을 테고 녹지대는 오늘날처럼 울창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은 비어 있는 듯, 여백이 많은 풍경이었을 테고 그랬기에 한강은 더 웅장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간 한강 일대를 사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나. 우리나라는 제아무리 평화로운 분위기의 장소도 전쟁의 흔적이 아니 서린 곳이 없다. 비록 분단 국가지만, 안위와 휴식을 누리며 전국토를 여행할 수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에 감사하다.

무거운 엉덩이를 겨우 든다.제2보루에서 10분쯤 걸어 오르면 ‘아차산의 정상’, 제3보루다. 보루를 향해 능선을 따라 걷는 길에 서울 전경이 수려하게 펼쳐진다. 동쪽으로는 한강 일대가, 서쪽으로는 왕십리와 멀리 남산 일대까지 아우르니 아차산은 일단 능선까지만 올라오면 걷고 보는 즐거움이 크다. 제3보루는 살짝 언덕을 타고 올라간다. 보루들 중 규모가 가장 큰데 일부 구역이 발굴 조사되었을 뿐 대부분 문화재 구역이 조사되지 않아 지면 아래 여러 개의 건물지와 온돌, 배수로, 석축 등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방문자들에게 제3보루는 야자수매트가 깔려 있어 걷기 좋은 산책로이자 해발 295.7m의 아차산 정상 지점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산이 야트막하면서 능선의 주변이 탁 트여 있으니 마치 제주도 오름에 오른 듯하다. 제3보루에서 능선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드디어 제4보루다. 아차산 능선의 가장 북단에 해당하는 지점이고 3보루 다음으로 큰 규모다.

4보루에 다다르면 밖으로 돌출된 치稚가 먼저 보인다. 치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옆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 일부를 사각의 형태로 돌출시킨 구조다. 외적을 방어하는 대표적인 성벽 시설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성에서 확인된다. 아차산 4보루에는 5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다. 치 옆으로 난 경사로를 올라 보루 위를 걷는다. 3보루와 마찬가지로 별개의 시설물은 없고 보루의 윤곽만 대충 알아볼 수 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4보루는 3보루보다 안내 팻말이 많고 성벽도 복원 되어 있다. 이곳이 아차산 일대의 첫 번째 보루 조사지로 다른 보루들과 달리 장기간 세부적인 발굴조사를 거쳤기 때문이다. 발굴 결과 여러 개의 건물지, 저수조, 온돌 유구 등이 확인되었고 유물로는 토기류 26개 기종 753점이 발굴되었다. 항아리, 완, 시루, 뚜껑, 접시 등 고구려 중기 대표적인 기종들이다. 4보루 내 가장 높은 곳인 1호 건물지에서는 명문 토기와 철제 투구 등이 출토되어 지위가 높은 인물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차산 3보루, 4보루는 1997년부터 행해진 발굴 조사로 고구려 요새의 구조와 성격, 방위 체계 등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발굴 조사 이후 보루였음을 알아볼 수 있도록 복원과 단장을 마쳤지만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저 석축과 안내팻말, 야자 매트가 깔린 사방이 트인 지대 정도로 보루를 인식할 뿐이다.

보루 위에 섰을 때, 정작 사람들의 관심은 눈앞 한강 풍경이 다 가져간다. 보루가 다진 정상 능선은 판판하고 드넓어서 마치 높은 공원에 올라온 듯하고 사람들은 잘 닦여진 전망대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보루에 호기심을 갖고 산을 오른 이들도 있겠지만 한강 일대의 멋진 경관을 마주할 기대로 오른 이들이 더 많을 듯싶다. 어찌됐든 구리시가 ‘고구려’로 도시를 알리게 된 뿌리가 이곳 아차산 보루다. 아차산성은 온달장군의 전사지가 맞다 아니다로 의견이 갈리지만 아차산 보루는 논란의 여지없는 1500년 전 고구려의 군사시설이다. 그것도 여러 개의 보루들이 산 곳곳을 지키고 있어 아차산 전체를 고구려의 기상이 깃든 성산聖山으로 봐도 무리는 아니다. 고구려는 아차산성과 보루들을 475년부터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76년간 지켰다. 어떤 역사는 한강에 실려 흘러가고 또 어떤 역사는 아차산이 거두어 품는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아차산 등골에서 고구려라는 화석을 만나고 있다.

4보루 위에 서서 한강을 경계로 나뉜 구리시와 서울 암사, 고덕 일대를 바라본다. 이 또한 언젠가는 사라질 풍경들이리라. 아차산이 품어줄 오늘의 풍경은 무엇이 될까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구리시 : 뿌리와 보루>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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