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건축이냐 출판이냐

파주출판도시와 심학산을 둘러보며

파주출판단지의 정식 명칭은 파주출판문화정보국가산업단지이며 파주출판도시라는 명칭 또한 공식적으로 쓰고 있다. 나로선 10년 넘게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통 가볼 기회가 닿지 않던 곳이다. 서울 합정역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달려 20분 남짓. 출판도시 거리의 첫인상은 다소 삭막했다. 사전정보 없이 가진 않았지만 ‘출판’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막연하게도 크고 작은 서점들이 다붓하게 늘어선 골목 풍경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곳은 책이 다 만들어져 진열되는 장소가 아니라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장소다. 심지어 물성조차 느낄 수 없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책들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꽂혀 있다. 노동의 현장에서 여유롭게 책을 훑어보는 여유를 바랄 순 없다. 출판사옥들 사이사이에는 도서를 취급하는 물류센터와 인쇄소가 자리하고 지게차와 트럭, 작업자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출판사옥 내부에서는 수많은 편집자와 디자이너, 마케터들이 세상에 나올 책들을 위해 치열한 시간을 보낸다. 어떤 책을 기획할 것인지,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또 어떤 방식의 마케팅을 진행할 것인지 책 한 권이 독자의 손에 닿기 전까지 무수한 과정을 거친다. 독자는 책을 읽을 때 보통 표지 전면에 드러난 작가의 이름만 기억한다. 가수의 앨범이 그렇듯 작가라는 ‘프론트맨’에 가려진 ‘책노동자’들의 이름은 보통 책 내지 판권 부분에 조그맣게 실린다.


책을 쓰는 내 입장에선 출판인의 노력이 없다면 작가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요즘은 굳이 책의 형태가 아니어도 글을 공개적으로 쓸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이 수두룩하지만 책 한 권의 수고와 숭고崇高는 그 어떤 플랫폼에도 견줄 수 없다. 파주출판도시 내 사람들이 이를 증명한다. 십 수년 째 출판의 위기론이 꺼지지 않고 있지만 파주출판도시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규모를 넓히면서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대, 유일의 출판산업단지로 자리 잡았다.

파주출판도시가 처음 계획된 때는 19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건설추진위원회가 꾸려진 후 1997년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 단지조성공사 기공식을 했다. 2001년 입주사의 사옥 건축공사를 착공했으며 출판단지 1차 입주가 2002년 상반기에 이루어졌다. 공사가 모두 완료된 2005년까지 5백여 개 출판사, 50개 인쇄사, 1개 대형도서유통사 등이 단지에 꾸려지게 되었다. 승효상을 중심으로 민현식, 김종규, 김영준, 플로리안베이겔 등 국내외 유명 건축가들이 도시 1단계 건축을 맡았고 40여 명의 건축가들이 건축물 설계에 참여했다. 건물은 5층 이상으로 지을 수 없고 건축 자재와 배치에도 제약을 두어 기존의 환경과 건물 간의 조화로움을 강조했다. 지켜야 할 조건이 있다 보니 혹 비슷해 보이는 건물들로 단조로운 풍경이 연출되지는 않을까 우려도 있었을 터. 그러나 출판도시는 건축의 향연장이 되었다. 대체로 그레이 톤의 무게 있고 점잖은 인상을 띄지만 균형과 조화 속에 각기 다른 표정으로 개성을 뽐내는 건물들이 눈에 띈다.


단지 내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으로 불리는 알바로 시자의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이다. 물결치듯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하얗고 거대한 건물은 천천히 웅장하게 율동하는 듯하다. 알바로 시자는 안양예술공원 내 안양파빌리온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출판사 동녘의 사옥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세지마 카즈요, 니시자와 류에 부부가 설계했다. 직육면체 노출 콘크리트 건물에 네모진 창문 몇 개가 전부인, 매우 단출한 건물인데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물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이 갔던 건물은 나남출판사의 일명 ‘담쟁이 건물’로 김영섭 건축가의 작품이다. 건물의 북쪽 면에는 파주 들녘의 찬바람을 막기 위해 거대한 콘크리트 벽을 올렸는데 이후 출판사에서 담쟁이를 심었고 담쟁이는 벽 전체를 캔버스 삼아 뻗어나갔다. 해서 여름에는 초록 덩굴이, 가을에는 붉은 덩굴이 큰 벽을 뒤덮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다. 건축물은 이렇게 그 공간을 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또 자연에 의해서 유연하게 변화해나간다. 이쯤 되면 파주출판도시는 책이 아니라 건물을 구경하러 가는 곳이 맞는 것 같다. 실제로 이곳 단지에는 숱한 건축학도들이 현장학습을 다녀가고 처음부터 건축투어를 기대하고 방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 매년 가을에는 파주건축문화제가 출판도시를 무대로 열린다. 책은 어디에서 볼까. 단지 내에는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책방과 북카페, 북뮤지엄 등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 별도의 건물로 있기도 하고 출판사옥 내에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단지 규모가 커서 얼른 찾아 들어가기는 어렵고 우선 단지 내에서 유일한 5층 건물로 덩치가 큰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에 들러 지도와 정보를 얻는 편이 좋다.


센터 내에는 파주출판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서재, ‘지혜의 숲’이 있다. 출판사와 개인이 기증한 책들을 한데 모아 놓은 공동 서재다. 일반 도서관처럼 십진분류법으로 책을 꽂진 않았지만 절판본, 희귀본을 포함한 장서가 많아 책등만 훑어도 흥미롭다. 이곳에는 지지향이라는 숙박업소도 운영되는데 이른바 ‘라이브러리스테이’라 해서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보내는 휴식 공간으로 인기가 많다. 객실에는 TV가 없고 와이파이만 된다. 또 같은 건물 내에 있는 출판산업체험센터는 문자와 종이의 탄생부터 인쇄술의 발달, 출판의 과정을 소개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어린이 방문자들의 필수 코스다.


내 멋대로 정한 파주출판도시의 성인 방문자 필수 코스도 있다. 물론 어린이를 동반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파주출판도시는 서쪽에는 한강을, 동쪽에는 심학산을 두고 세로로 길게 뻗은 대지 위에 조성되어 있다. 원래 강변 늪지대였던 곳을 매립한 땅이다. 파주출판도시의 전체 조망을 아우를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가 바로 심학산이다. 심학산에서는 북녘의 황해도 개풍군 땅도 보인다. 정상까지는 194m. 경사도 가파르지 않고 길도 정비가 잘 되어 있어 힘들지 않고 20분이면 오른다. 정상보다 출판도시의 전망이 더 탁 트인 곳은 심학산 둘레길에 있는 낙조전망대다. 정상과 낙조전망대 두루 다 돌아봐도 1~2시간이면 충분하다. 출판도시에서 갈대샛강을 건너 헤르만하우스아파트 방면으로 걸어 올라가면 심학산 둘레길 진입로를 만날 수 있다.


심학산에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조선 숙종 재위 시절, 숙종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가 어느 날 사라져 신하들이 주변의 새 서식지를 몽땅 뒤지고 다녔다. 찾다 찾다 한강 하구까지 내려왔는데 다행히 지금의 심학산에서 학 두 마리를 찾았다. 이때 원래 심악산이었던 이름이 심학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고양이를 그리도 아꼈다는 숙종, 새 사랑도 남달랐던 모양이다. 여하간 임금의 학이 발견된 장소라고 하니 오래 전부터 상서로운 산으로 여겨져온 듯하다. 등산로 초입에는 배 과수원이 있다. 배꽃 피는 봄에는 참으로 아름다울 듯 싶다. 내가 찾았을 때는 큰 배들이 주렁주렁 달려 나뭇가지들이 이울어 있던 가을이었다. 배밭을 지나면 정자 하나가 나온다. 정자를 기점으로 비탈을 더 오르면 정상 등반, 판판하게 평지로 난 길을 택하면 둘레길 산책이다. 둘레길의 총거리는 6.8km로 다 돌면 2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출판단지에서 올랐다면 낙조전망대까지 갔다가 정상을 오르는 루트를 추천한다.

낙조전망대에 오르면 파주출판도시의 전체 풍경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5층 이상의 건물이 없어 전체적으로 도시보단 마을이라는 명칭이 어울린다. 출판마을 너머로 갈대습지와 재두루미도래지, 그리고 드넓은 한강이 보인다. 인간의 욕망이 관여하지 않은 수평의 풍경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먼저 생각해 단지를 조성한 건축가들의 배려가 고맙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수직의 풍경을 얼마나 동경해왔고 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나. 허공을 찌르는 욕망을 덜어내면 그곳에 자연과 평화가 있다. 그리고…. 저 한강 너머, 아득한 북쪽으로 황해도 개풍땅이 보인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파주시 : 그리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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