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오산 최고 전망대에는 귀한 쌀이 흘러넘치고

진짜 핫플에는 카페가 없다

독산성이 축성된 독산은 해발 208m로 야트막한 산이지만 오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그러니 독산성이 세워져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을 것이다. 세마대가 있어 세마산으로도 불린다. 마지막 언덕배기를 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면 어느덧 성벽이 보인다. 성벽으로 채 올라서기도 전에 오산시 일대와 멀리 화성 동탄신도시까지 그 풍경이 훤히 다 보인다. 오산 최고의 전망대라더니 물리적인 높이만 높은 것이 아니라 전망도 일품이다. 내가 찾았을 때는 주말이라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도 독산성의 풍광 대비 그 인지도가 너무 낮은 게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무엇보다 힘들게 걸어 올라가지 않고 차를 타고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곳인데도 내가 체감하기에 독산성은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것 같진 않다. 그만큼 산성이 흔하기도 하고 산성에서 보는 전망이 별로인 곳도 드물지만 그중에서도 분위기와 성벽 둘레길의 전망은 독산성이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산성 아래 요즘 유행하는 대형 베이커리 카페 같은 ‘핫플’이 들어서면 지금보다 더 널리 알려질지도 모르겠지만 원하는 바는 아니다. 이미 산성 아랫녘에는 ‘독산성음식문화거리’라 해서 식당과 카페 거리가 형성되어 있지만 크게 눈에 띄는 특징은 없다. 나는 다만 산성의 전망대와 성벽 둘레길이 손에 꼽게 근사한데 오히려 물향기수목원보다도 덜 알려진 점이 아리송해 자꾸 주변을 기웃대며 이유를 찾는 것이다.

사실 나 같은 이방인에게나 독산성이 낯설 뿐 사실 오산시는 독산성 홍보를 게을리하진 않았다. 오래전부터 독산성을 도시 대표 문화유산이자 관광명소로 밀었고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한 노력 또한 꾸준하게 해왔다. 또 안성시 죽산면에서 자란 내가 죽주산성으로 자주 소풍을 갔듯 오산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도 독산성은 단골 소풍 장소였다.




2010년부터 시작된 오산독산성문화제는 매년 가을 2~3일간 독산성과 고인돌공원을 무대로 독산성 관련 역사문화 프로그램, 전통문화공연 등이 열리는 오산의 대표축제다. 축제뿐만 아니라 전국마라톤대회와 각종 예술대회도 ‘독산성’이라는 이름을 걸고 열린다. 독산성이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은 단순히 사진 명소로서 아름다운 풍광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우리 유산인데 마침 풍경마저 근사하니 명성을 더 하기 좋은 조건이다.




독산성은 둘레 1,095m의 테뫼식(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형태) 산성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백제시대 때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되고 이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때에도 보수를 거치며 지속해서 이용되었다. 오늘날까지 산성의 이름을 크게 알린 시기가 바로 임진왜란 때다. 전라도 관찰사 권율이 이끈 조선군은 1952년(선조 25년) 12월, 독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도성을 방어한다. 이에 고무된 권율 부대는 마침 북에서 내려와 평양성을 탈환한 조‧명연합군의 진출과 맞물려 수도 한양 쪽으로 북상했다. 그리고 빼앗긴 한양을 수복하고자 왜군과 대치해 대승을 이끈 전투가 바로 1953년 2월에 일어난 행주대첩이다. 그러니까 독산성전투는 행주대첩의 전초전이었던 셈이다.




독산성은 높고 가파르며 성문이 작아서 왜군을 방어하고 또 공격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환경이었지만 계곡이나 샘이 없어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를 안 적장은 성을 포위하고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권율은 적들이 잘 볼 수 있는 성안 꼭대기에 올라가 말을 세우고 그 말에 쌀을 부어 말을 씻는 시늉을 했다. 멀리서 볼 때 그 쌀은 영락없는 물이었다. 왜군들은 성안에 물이 많다고 생각하고 결국 수세에 몰려 퇴각했다. 말을 씻긴 곳이라 해서 세마대(洗馬臺)로 불린 곳이 성벽에 섰을 때 언덕 위로 보이는 정자다. 산성 중앙의 가장 높은 곳은 ‘장수의 지휘대’라 해서 장대라 부르는데, 세마대가 바로 말을 씻기는 척 기지를 발휘한 권율 장군의 지휘대다.


현재의 세마대는 1957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권율 장군이 된 것처럼 이곳에 서서 산 아래 땅을 내려다본다. 평야 위로는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빽빽하게 모여 산을 포위하고 있다. 저 건물들이 모두 적이라고 상상하면 장군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려볼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연신 감탄을 연발할 뿐이었다. 발아래 둔 저 수많은 건물이, 햇볕이 드리운 저 유리와 철골과 시멘트 덩어리들이 근사해 보였다. 저들 아래를 걸을 땐 개개의 건물로 올려다봐야 했고 때로는 답답하고 삭막해 보였다. 그런데 그 건물들이 수백, 수천 개로 모여 대열을 이루고 눈에 보이는 저 먼 땅끝까지 채워져 있으니 장관이었다. 저들이 밤이 되면 별보다 더 밝게 반짝이겠구나 싶어 야경마저 기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장군의 마음을 먼지만큼도 짐작하지 못한다. 행주산성에 섰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장수는 전쟁 속 산성에 존재했지만 나는 평화 속 산성에 존재한다. 세마대에서 바라본 전경은 성벽에서 보는 풍경보다 좀 더 입체적이다. 우거진 소나무, 그 사이로 보이는 가까운 기와지붕과 이와 대조적으로 멀찍이 보이는 산 아래 정육면체의 각진 건물들이 다채롭게 조화되어 있다.




기와지붕은 산성 동문 안쪽에 붙어 있는 보적사 대웅전이다. 보적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기록된 바 없고 백제 아신왕 때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산성이 축성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한다. 절은 아담하다. 주불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선실, 요사채 등 서너 채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성시 용주사의 말사로 용주사는 독산성 북문 쪽에서 시야가 좋은 날 육안으로 보이기도 한다. 독산성음식문화거리 방면에서 독산성으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진입로 입구에서 보적사 일주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산성 가는 길이 곧 산사 가는 길인 셈이다. 보적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산성 동문을 통과하는데 동문은 원래 사람만 다니는 문으로 만들어져 크기가 작다. 일주문을 통과해 산성에 올라와 다시 성문을 통과해 사찰로 들어서는 구조가 흥미롭다.




보적사에도 쌀과 관련한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에 한 노부부가 굶어 죽을 지경에도 쌀 2되를 부처님에게 공양했는데, 집에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절에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해서 보적사寶積寺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끼니 잇기 어려운 시절에 가진 쌀을 포기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쌀로 말을 씻겼던 장군과 쌀을 부처에 공양한 노부부는 두려움과 허기를 참아낸, 심지가 단단한 사람들이다. 그 정신력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전쟁 혹은 전쟁과 같은 상황 속에 내던져지면 초인이 되는 걸까. 여담이지만 오산에서 생산하는 오산쌀의 브랜드가 ‘세마쌀’이다. 오산양조에서 빚는 여러 종류의 전통주 또한 세마쌀로 만든 것이라고.




산성의 성문은 총 5개이고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킨 치雉는 8개, 우물 1개, 수로 1개가 남아 있다. 오늘날 방문자들에게는 동문이 주출입구로 이용되지만 남문이 본래 정문 역할을 했고 문이 넓어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으며 바닥에는 성문을 고정했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남문과 서문 사이의 암문은 1804년(순조 4년)에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북문을 폐쇄하고 새로 지은 성문이다. 물론 현재는 북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출입구 역할을 했다. 지금도 등산로를 이용해 독산성을 오르는 사람들이 서문으로 독산성에 들어온다. 현릉원이 가까운 만큼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또한 독산성을 지나치지 않았다. 정조는 1790년, 정조 14년에 서문을 통해 독산성에 행차했다. 사도세자 역시 온양온천을 행차했다가 환궁하던 중 장마 때문에 독산성에 하루를 묵고 백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온다. 그래서 정조가 왕이 된 후, 풍수지리상 독산성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는 대신들의 의견에 아버지의 흔적이 있는 곳을 허물 수는 없다며 오히려 독산성을 고쳐 쌓았다고 한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1792년(정조 16년)에 약 70일간 새로 짓는 것과 다름없는 큰 규모의 보수 공사를 했고, 1796년(정조 20년)에 수원 화성이 완공된 이후 협수 체제를 구축했다.




1km가 조금 넘는 독산성 성벽길은 30분이면 충분히 돌아본다. 동서남북 사방이 트인 전망이라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360도 파노라마뷰에 감탄한다. 성벽은 가파른가 하면 완만해지고 직선으로 뻗었나 하면 곡선으로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 입체적인 형태가 부감으로 독산성 전체를 보지 않아도 발로 걸으면서 느껴진다. 이렇게 원형에 가까운 성벽의 모습과 걷기 좋은 둘레길은 2015년부터 300억 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여 복원과 정비를 한 결과다. 복원과 발굴조사는 2022년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고 2025년까지 완료될 예정이다. 방문자들의 눈에 보이는 산성의 정비는 대부분 끝나서 완료된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역사적, 고고학적 성과가 있으리라 기대된다. 더불어 오산박물관이 건립되면 지금보다 더 상세한 산성의 이야기를 출토 유물과 연구 결과를 통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쪼록 오산에서 단 한 곳만 가야 한다면 고민하지 않고 독산성을 말하겠다. 독산성을 지난 삼남길 제7길의 종착지는 세마교다. 세마교는 의왕에서 발원해 진위천으로 합류하는 황구지천을 건너는 다리다. 나는 이곳 세마교가 아닌 세마역 부근의 세마교 쪽으로 향했다. 오산에는 세마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두 개다. 두 다리 모두 자동차들이 지나는 평범한 교량으로 다리 자체에 큰 의미는 없다. 오산 동쪽 세마역으로 향한 까닭은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가 죽미령이기 때문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오산시 : 오색빛깔 까마귀>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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