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한번도 폐허인 적 없던 절터, 겨울 회암사지와 회암사에서

옛 절터마저 화려한 조선 최대 사찰의 위용




태조 이성계의 행궁이나 다름없던 국내 최대 온돌 발굴지

회암사지에서는 폐사지에 섰을 때 흔히 느끼는 허허로운 감정이 일지 않는다. 방대한 절터에는 주춧돌과 기단, 일부 석물만 남았으나 그 자체로 웅장하다. 천보산을 병풍으로 두르고 펼쳐진 1만 여 평의 절터는 마치 나무로 만든 전각들만 한순간에 사라진 듯 가람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산의 경사면을 이용한 총 8단의 계단식 대지 구성과 완벽한 좌우 대칭 구조,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빽빽한 회랑에 이르기까지 절터는 뼈대만 남은 날 것으로 그 존귀함을 증명한다.

겨울에 찾은 회암사지는 바닥돌과 석물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각기 높이를 달리하며 반듯하고 너르게 쌓아 올린 기단, 횃불을 피우기 위해 세운 정료대가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폐사지는 한번도 폐허인 적 없던 모습으로 강고하다. 조선 최대 사찰의 위용이다.




회암사지를 등지고 양주 시내 쪽을 바라보면 멀리 발전소 굴뚝에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절이 폐사되기 전, 그러니까 500여년 전에는 회암사에서도 아궁이마다 불을 땐 연기가 구들을 지나 굴뚝으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회암사지 발굴이 남긴 큰 수확은 조선시대 온돌구조의 발견이다. 현재까지는 국내 최대의 온돌 터라고 볼 수 있다. 건물유적지의 보존 상태가 워낙 양호했기에 온돌구조 역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조상의 지혜가 담긴 우리나라만의 난방장치 온돌은 그 과학성이 일찍이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 왔다. 그런데 회암사지의 온돌, 특히 서승방지의 ‘ㅌ’자 구조의 구들은 기존 기술을 응용해 한 차원 더 발전시킨 형태여서 보다 유의미한 발굴이었다.

산사의 겨울나기는 온돌 덕분에 아주 춥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회암사는 옛 절터의 규모와 시설만 봐도 궁궐이 부럽지 않다. 왕실의 조력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아끼던 절이었다. 건국왕이 드나들던 사찰이었으니 절의 위엄은 대단했을 것이다. 당시 회암사 주지는 태조의 ‘평생 스승’이자, 회암사를 중창한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의 제자인 무학대사였다. 태조는 왕좌에 있는 동안 4차례에 걸쳐 회암사에 행차했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는 무학대사와 함께 회암사에 기거하기도 했다. 사찰이었으나 ‘행궁’이나 다름없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폐사지에서 쏟아져 나온 1만 3천여 점의 유물

회암사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왕실유물’은 2012년 문을 연 회암사지박물관이 소장‧전시하고 있다. 회암사지 앞에, 길쭉한 2층 구조로 자리한 대형박물관이다. 오로지 절터 한 곳에서 나온 유물로 박물관 한 곳이 개관했음이 놀랍다. 조선 전기와 중기,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던 262칸의 대규모 사찰에서 출토된 유물이 1만 3천여 점에 이른다. 전시실 내에는 절터에서 출토한 태조의 연호를 새긴 기와막새, 왕실에서 사용된 청기와 및 용문 기와, 잡상 등을 비롯해 태조 이성계의 왕실행차를 재현한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꼭 봐야할 대표적인 출토 유물은 청동제 금탁이다. 우리가 흔히 ‘풍경’으로 아는 처마 끝 작은 종인데 이 금탁은 회암사 본당인 보광전 추녀 끝에 달려 있던 종이다. ‘작은 종’이라고 할 수 없는, 투구만한 큰 종이어서 보광전의 규모 역시 웅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에는 풍경을 풍탁이라고 불렀는데 굳이 금탁이라 한 것은 종의 명문에 이 풍탁을 금탁이라 적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 풍탁이 거문고에 견줄 만한 아름다운 소리를 냈고, 또한 왕실 사찰의 풍탁이기에 금탁이라 명명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금탁에 새겨진 146자의 명문 중 상단에는 왕사묘엄존자(무학대사), 조선국왕(이성계), 왕현비(신덕왕후 강씨), 세자(이방석)라고 종서되었고 하단에는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부처님께 바란다는 내용이 적혔다. 금탁 명문의 내용을 바탕으로 회암사는 조선 건국, 즉 태조의 즉위와 함께 대대적으로 중창되었으며 건국 당시 왕실은 불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모든 것은 무상하다. 번영했던 왕실 사찰은 명종 대에 이르러 억불숭유 정책을 주장하는 유생들의 득세로 결국 폐사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회암사는 인도승려인 지공스님이 인도 최고의 불교 대학이었던 나란타 절을 본 떠 1328년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이후 나옹화상, 무학대사 등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이 회자되는 고승들이 중창하고 200년 간 전국 제일의 왕실사찰로 자리매김했던 회암사. 유구한 세월은 찰나, 절은 불에 타 쓰러지고 사라져갔다.




절 구경의 하이라이트는 3대화상이 남긴 ‘3가지 보물’

회암사지 전망대에서 천보산 쪽으로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을 통과해 오르막길을 500m 쯤 오르면 ‘오늘날의 회암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옛 절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보니 그 이름 앞에 ‘현재’나 ‘오늘’과 같은 수식이 붙지만 이름만 같은 절이 아니라 700년 회암사 역사를 그대로 이어받은 사찰이다. 1828년 순조 28년에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와 부도비를 중수하면서 부도전 옆의 터를 닦아 지은 절이 현재의 회암사다. 더 이상의 풍파는 겪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듯 천보산 골짜기에서 키 큰 소나무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 옛 회암사터가 천보산을 병풍으로 둘렀다면 현 회암사는 천보산의 품 안에 폭 안긴 모양새다. 대웅전 뒤로 천보산의 정상이 손에 잡힐 듯하다. 대웅전을 지키듯 전각 앞에 괘불대처럼 선 두 그루의 소나무도 근사하다.




도량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관음전과 조사전, 삼성각, 범종각 등의 전각으로 이루어졌다. 건물 대부분이 최근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중 조사전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1755년 제작된 불상으로 보존상태가 좋아 조선후기 불교조각 연구의 지표가 되는 성보문화재다. 또한 불상 양쪽에는 3대화상의 진영들이 모셔져 있어 절에 왔다면 한번쯤 내부를 들여다볼만한 전각이다.




회암사에서는 반드시 ‘세 가지 보물’을 봐야한다. 앞서 소개한 회암사지와 회암사지박물관을 거쳐 회암사까지 세 곳의 공간을 모두 둘러봤다면 꽤 성공적인 ‘회암사 여행’을 한 셈이다. 그러나 ‘세 가지 보물’을 보지 않는다면 절반의 성공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보물은 3대화상, 즉 지공, 나옹, 무학대사를 기리는 보물들이다.




삼성각 옆쪽으로 천보산 등산로를 향해 난 돌계단을 오르면 보물 제387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가 있다. 안타깝게도 모조비다. 1997년 성묘객의 부주의로 발생한 화재가 왕사비와 비각을 모두 태웠기 때문이다. 훼손된 비는 불교중앙박물관이 보존처리해 소장하고 있다. 모조비 뒤쪽에 본래 왕사비의 초석과 기단이 남아있다. 이 비는 나옹선사를 추모하기 위해 1377년, 고려 우왕 3년에 건립한 것이다. 비록 모조비이지만 비신 상부에 세밀하게 조각한 쌍룡이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고려와 조선을 대표하는 고승들의 부도탑

조사전 옆쪽으로 길게 뻗은 데크 위를 걸어가면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 무학대사탑과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이 있다. 늘어선 부도들 중 가장 앞쪽에 자리하며 가장 화려한 겉모습을 자랑한다. 1407년 건립한 무학대사탑은 무학대사의 부도로 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으며 조선전기 부도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용과 구름 무늬가 역동적으로 조각된 둥근 몸돌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래, 가운데, 윗받침돌에 조각된 연꽃무늬와 안상도 무척 화려하다.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석은 육중한 상층부를 두 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는 형상으로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했다. 무학대사탑 뒤에는 2년간 고려에 머물며 당시 불교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도 고승 지공의 사리탑과 석등이 자리한다. 무학대사탑과 견주면 형태는 단순하지만 파손 없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뒤쪽으로 보이는 돌계단을 오르면 나옹화상의 부도와 석등을 볼 수 있다. 고려 공민왕 때의 왕사로 그가 고려 말 불교에 끼친 영향력은 전국의 여러 고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암사지도 ‘계단식 구조’로 그 위용을 자랑하더니 부도군 역시 계단식으로, 그것도 고려와 조선을 대표하는 고승들의 부도탑이 늘어선 채 위엄을 과시한다.

회암사는 절터와 박물관이 하나의 단지처럼 묶여 있어 가벼운 절터 구경이라고 생각하고 오면 시간이 부족하다. 반나절 정도 여유롭게 시간을 잡고 와야 ‘조금 둘러봤다’ 싶은 사찰이다. 덧붙여 양주시와 회암사는 회암사지 일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여기도 가보세요

하룻밤을 산사에서 묵는 회암사 템플스테이를 추천한다. 천보산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숲길 포행을 하고 스님과 차담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템플스테이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올해까지는 예약할 수 없다. 거리두기가 완화되면 다시 운영될 계획이다. 절에서 곧바로 천보산 정상으로 향할 수 있다. 거리는 0.8km이고 30분 정도 소요된다. 경사가 꽤나 가파른 편이어서 겨울철에는 안전사고에 주의해야 한다. 정상에 오르면 회암사 도량은 물론 회암사지, 회암사지박물관을 비롯해 양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근처 맛집으로는 덕정역 앞에 위치한 손만두 전문점 ‘만두예찬(031-857-9284)’을 추천한다. 고기만두와 김치만두 두 종류가 있는데 만두소가 담백하고 알차다. 육개장에 만두를 넣어 전골처럼 끓인 육개장만두전골이 대표메뉴다. 단품으로 육개장만두국도 판매한다. 얼큰한 국물에 채소와 소고기, 주먹만 한 왕만두를 푸짐하게 넣어 준다. 월요일 휴무.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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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양주 회암사

    주소/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길 281

    문의/ 031-866-0355

    누리집/ www.hoeam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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