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겨울 바다에서 만난 소녀의 이야기

화성시 매향리, 포탄 무덤에서 피운 꽃


오랫동안 겨울이었다

소녀는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맨발이 애처로워 다가간 걸음, 그러나 소 녀의 얼굴을 보고 섣부른 동정을 접는다. 형형한 눈빛, 굳게 다문 입, 꼿꼿한 자세.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단발머리와 치맛자락만이 바닷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소녀의 두 손에는 매화 송이가 수북하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바람에 흩날린다. 매화향이 사방으로 번진다. 벌써 봄이 왔는가.



썰물에 바다는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곧 밀물이 들면 바다는 이만치 가까워질 것이다. 평화는 그처럼 온 듯하다가도 달아나고, 달아난 듯하다가도 다시 오는 듯하다. 평화의 소녀상 옆에 서서 한가하게 ‘평화’를  곱씹는 나는 얼마나 운 좋은 사람인가.

어떤 노력도 없이 간절함도 없이 평온하고 화목한 채로 매향리에 왔다. 드넓은 잔디밭을 유유히 걸었고 눈앞의 바다를 감상했다. ‘이렇게 넓은 바다 정원이 있었구나, 저 높은 전망대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했다지, 가을에는 코스모스 군락이 절경이라던데 또 와서 사진을 찍어야 겠구나….’




소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두 손에 든 매화 송이가 모두 바람에 날아갔을 때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바다에 닿아 있었지만, 내게 들려줄 이야기가 짧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오랜 세월이 시리고 고통스러운 겨울이었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했지만 여기 매향리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 2005년까지, 정전되고도 무려 50년 넘게 매일 포탄이 터지고 전투기가 날았어. 우레 같은 폭격 소리에 아이가 경기하고 가축들이 폐사했다. 탄피가 지붕을 뚫고 들어왔고 폭격의 충격으로 창문이 깨지고 벽에 금이 가기도 했단다. 불발탄을 가지고 놀던 네 명의 아 이들이 불발탄이 터져 모두 사망했고 임산부가 오폭에 사망했으며 12세 소녀는 포탄 파편을 맞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폭과 불발탄으로 마을 사람 12명이 죽고 15명이 다쳤어. 아니, 죽였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마을 사람 3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니, 죽였다고 해야겠지. 6·25전쟁 이 일어난 이듬해 8월, 주한미군은 이곳을 공군폭격훈련장으로 썼어. 그때 당 시 매향1리의 지명은 고온리였는데 고온리의 영문 표기를 보고 자기들 식으 로 쿠니사격장이라고 불렀지. 그런데 정전 협상이 끝난 후에도 훈련은 멈추지 않았어. 오히려 범위를 확장해 주민들의 어장과 농경지는 헐값에 징발당했 단다. 바다와 육지를 합해 690만 평이란 광활한 영토가 미군의 훈련장이 되 었고 이들은 필리핀, 오키나와, 괌에서도 날아와 폭격 훈련을 했다. 연간 훈련 바다를 바라보고 선 매향리 평화의소녀상. 소녀가 선 자리는 과거 주한미군의 전투기 사격장이었다. 바다 쪽으로 미군의 폭격 훈련 탓 일자 250일, 하루평균 11.5시간, 15~30분 간격으로 일 평균 600차례 사격….”



“소음과 공포는 살인적인 것이었다. 대를 이어 어부와 농부로 살던 마을 사람들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견뎠다. 아이들은 전투기 소음만으로 기종을 알아맞히고 탄피를 주워 장난감 삼았으며 어른들은 버려진 낙하산 천, 군모, 고철을 가져다 생활용품으로 재활용했어. 그렇게 30년 넘게 살던 1988년, 매 향리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신경쇠약과 공포심으로 사는 매일의 일상이 당연한 것이 아니란 걸 자각한 거야. ‘우리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 고 세상 밖으로 외쳤지. 그러나 고단하고 지난한 싸움이었어. 우리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봤고 미군은 기지 일부를 점거한 마을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옥살이했고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어. 1994년에는 불발탄 폭발로 200채에 가까운 가옥에 균열이 생겼고 2000년에는 오폭으로 주민 6명이 다쳤지.

저기 작은 섬 하나가 보이니? 수풀이 울 창해 짙을 농濃자를 써서 농섬룡도이라 불려온 섬이란다.”




“농섬은 반세기에 걸친 폭격 연습으로 섬의 3분의 2가 사라졌어. 미군이 장장 54년을 왜 이곳에서 훈련했는지 아니? 훈련장이 민가와 붙어있어 실전 같은 훈련을 할 수 있었기 때 문이었어. 실전…. 주민을 전쟁 볼모로 포탄을 터뜨리고 전투기를 조종했던 거야. 매향리 사람들에게 인권은 없었다고 봐야지. 2001년, 주민 2,222명이 국 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제기를 했어. 그리고 2005년 8월 12일 드디어 사 격장이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어. 어마어마한 양의 불발탄과 탄피가 곳곳에 남아있었고 갯벌은 중금속으로 오염되었지만 미군은 복구하지 않았고 정부도 나 몰라라 했어.

주민들이 직접 콤바인을 개조해 갯벌과 농섬 주변을 돌며 포탄을 수거했지. 그래도 갯벌 깊이 박힌 포탄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어. 파도에 포탄이 뭍으로 밀려 나오고 또 나오고…. 길이 3m, 900kg이 넘는 폭탄들이 수거되었고 전쟁 때 투하했던 불발탄도 나왔지. 주민들이 수거 한 포탄과 탄피는 산처럼 쌓였어.”




포탄 무덤에도 꽃은 피고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던 매향리 마을이 다시 보였다. 사격통제실과 미군 이 숙소와 체력단련실로 썼던 건물들이 아직 있었다. 미군이 철수할 때 철거 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남게 되었다. 당신이 바다 구경, 꽃 구경하러 온 이곳이 실은 매일 폭격이 일어났던 현장이라고, 마을 주민들에게는 전쟁이 54 년간 일어났던 참혹한 땅이었다고 증명하고 기억해야 했다. ‘평화의 소녀상’ 을 다시 바라보았다.




“나의 그림자는 원망과 한이 서린 시간이다. 내 맨발은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와서도 편치 않았던 마음의 표현이지. 내 짧은 머리는 뜯겨나간 내 젊은 시절과 고향과의 단절이야.”

일본군 위안부에게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이 없었듯 미국 역시 오폭이나 불발탄으로 인해 죽은 이들에게 장례비조차 주지 않았다. 1994년 가옥 균열 피해보상 요구로 총 3억 5천만원가량을 배상받았지만 주민들의 마음에 난 생채기는 아물지 않았다.




한때 미군이 점령했던 육상사격장은 이제 평화생태공원, 유소년 야구장, 평화기념관으로 거듭났다. ‘거듭났다’라는 표현이 타당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쟁과 평화 중에는 평화에 좀 더 가까워졌다. 유소년 야구장은 무려 8개의 야구장이 네잎클로버 형태로 들어섰다. 정식 이름은 ‘화성 드림파크 야구장’. 그곳에 탄피와 포탄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없다. 쾌적한 구장에서 볼을 던지고 배트를 휘두르는 아이들이 있다.



평화생태공원에는 매화나무, 벚나무, 이팝나무 등 봄꽃이 아름다운 나무가 식재되었고 매향리의 역사를 주제로 한 예술가의 조형 작품이 산책로 곳곳에 들어섰다. 2005년 이후 주민들 이 마을 곳곳에 심은 매화나무는 어느덧 7만 그루에 달한다. 이제 화염 냄새 없이 매화 향기가 나고 탄피가 쏟아지지 않고 매실이 주렁주렁 여문다.

기존 부대 건물 옆에 들어선 흰색 타원형 건물과 붉은 벽돌 건물은 새로 문을 연 평화기념관이다. 바닷가 쪽에서 바라본 두 건물은 각각 원통형과 지그재그형으로 외벽이 뚫려 있어 미완성 건물 같기도 하고 주차타워나 전망대처럼 반개방된 임시 건물처럼도 보인다. 짓는 중인지, 철거 중인지 헷갈리는데 공원 정문 쪽에서 바라보면 양감 있는 원형의 벽돌 건물이 먼저 보여 바닷가 쪽 전망과 달리 가건물의 인상을 주진 않는다.




그러니까 흰색 원통형의 긴 건물은 전망대, 지그재그형의 직육면체를 가장자리에 달고 대지 위에 묵 직하게 내려앉은 원형의 붉은 벽돌 건물은 전시를 주목적으로 하는 평화기념관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아직 정식 개관 전이라서 외관만 둘러볼 수 있었다. 평범한 설계는 아니어서 알아보니 근처의 남양성모성지 성당을 설계한 스위스 출신의 유명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솜씨다.

마리오 보타는 서울 강남의 교보타워와 한남동의 리움미술관 설계로 잘 알려져 있다. 인지도 높은 외국인 건축가의 국내 건물 설계는 이제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지만 사기업이나 종교시설이 아닌, 한국 근현대사의 상흔 위에 세우는 공공건축물이 외국인 손에 맡겨졌다는 데에 어쩐지 아쉬움이 남는다. 국수주의가 아니라 한국인이 이해하는 자국의 서사와 정서는 제3의 관점과는 여실히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말로 하는 평가는 쉽고 얄팍하기 마련이라 평화기념관이 정식 개관하면 다시 둘러볼 일이지만 아직은 기존의 평화역사관에 마음이 간다. 평화역사관은 1988년 주민들의 첫 집회가 열렸던 투쟁본부를 주민들이 직접 꾸민 것이다. 본래 개인 소유의 농사 차고였는데 마을 중심 고지대에 자리해 육상사격장과 폭탄 투하장, 농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주민들이 모여 회의하고 집회하기에 는 알맞은 위치였다. 또 도로변에 있어 마을에 들어서기 직전, 타지인들에게 매향리에서 일어난 일을 압축해 보여주는 장소로 의미가 컸다.




그러나 역사관에 선뜻 들어서기에는 그 진입장벽이 높다. 평화의 소녀상 두 손에는 매화송이가 수북했는데 평화역사관 앞마당에는 포탄이 수북하다. 거대한 고치 모양 의 포탄들이 고철이 배출한 분뇨처럼 부식된 채 산을 이루고 있다. 그 한 알의 무게가 12kg. 무덤을 이룬 전체의 무게는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수거돼 쌓은 포탄들은 주로 ‘BDU-76 bomb’와 ‘MK-106 bomb’. 항공 투하용 폭탄 연습탄으로 폭약 없이 연막탄이 들어 있지만 오폭해 민가에 떨어지면 그 자체로 살상 무기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앞마당은 포탄과 로켓포, 기관총 탄피, 그밖에 수많은 고물 무기가 늘어 서 있다. 그중에는 예술가의 손길로 재탄생한 작품들도 있다. 작품명 ‘매향리 의 시간’은 민중 작가,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임옥상 작가의 작 품이다. 폭탄의 잔해들을 푸줏간의 고기처럼 쇠갈고리에 끼워 매달았다. 포탄 무덤에서부터 불편했던 마음은 포탄 푸줏간에서 결국 무너져 내린다. 구겨지고 찢기고 녹슨 포탄이 시신처럼 매달려 있는 광경을 눈 뜨고 보기 어렵다. 이 간접적인 체험으로 잃어버린 54년, 참혹했던 매향리의 시간을 가늠한다.




먼바다를 응시하던 소녀의 또렷한 눈빛을 기억한다. 한시도 더 있기 힘든 과거의 비참한 잔해를 소녀처럼 똑바로 마주하고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가. 오늘 내가 누리는 이 평화가 누군가의 눈물과 피로 이룬 결과임을 나는 매 순간 기억할 수 있는가. 소녀의 곁을 떠난 마지막 매화 송이가 떨어진 곳은 포탄 이 뒹구는 메마른 땅 위였다. 이미 녹슨 포탄 사이 사이로 무성한 화초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봄이 왔고 꽃은 또 필 것이다. 다음 겨울은 누구도 시리지 않도록 우리는 지난겨울의 참상을 기억할 것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화성시 : 봄은 오고 꽃은 피어>에서 발췌했습니다.


세부정보

  •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주소/ 경기 화성시 고온리안길 24-11

    문의/ 157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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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쓰는사람
자기소개
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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