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쓸모 없는 굴뚝의 쓸모

서수원의 오래된 굴뚝, 영신연와


경기문화재단 산하의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주최한 경기문화유산투어에 참여한 적이 있다. 주제는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을 찾아서’였는데 첫 탐방지가 수원의 영신연와라는 벽돌공장이었다.

연와(煉瓦)란 ‘구워낸 기와’라는 뜻으로 벽돌의 한자식 표현이다. 공장은 경기상상캠퍼스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는데 네비게이션이나 지도앱에 이름을 쳐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찾아가기 어렵진 않다. 공장과 가까운 고색중학교에서 보이는 기다란 굴뚝 건물이 영신연와다. 공장은 1992년 가동을 멈추었다. 30년 넘게 문 닫은 공장은 재가동의 희망이 없다.

이 공장의 ‘호프만 가마식’ 벽돌 생산 방식은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옛 공법이고 벽돌 또한 공장이 운영되었던 1960~1980 년대 때만큼 많이 쓰이지 않는 자재다.




196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오래된 공장은 폐허가 되었다. 영신연와의 상징과 같은 아파트 10층 높이(지표 면에서 44.5m)의 긴 굴뚝만이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을 뿐, 건물 지붕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고 이를 받친 나무 기둥은 삭았다. 그래도 붉은 벽돌의 가마 외벽은 땅 위에 단단히 버티고 서 있다.

주변은 무척 어수선하다. 이런저런 공사장 자재들이 쌓여 있으며 주변 부지는 중고차 차고지와 창고 등으로 쓰이고 있다. 그중 유독 정돈되지 않은 풍경으로 눈길이 닿는 것은 영신연와의 노동자들이 살았던 사택이다. 곳곳이 무너진 슬레이트 지붕과 넝쿨과 비닐로 뒤덮인 외벽, 허술하게 막아 놓은 창문이 누덕누덕 기운 헌 옷처럼 보인다. 공장과 함께 버려진 창고인가 싶었는데 아직도 이곳에 노인 몇 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공장이 가동된 때에는 50여 가구가 거주했던 집이었다고 한다. 근대문화유산이라기에는 아무렇게나 방치된 폐공장이었다.

폐허가 된 사유지를 적극적으로 돌아보기에도 조심스러웠다. 어딘가에 묶인 개 몇 마리가 사납게 짖었다. 그저 높다란 굴뚝, 영신연와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은 회색 빛 굴뚝만 멀뚱하게 바라보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현재 영신연와 공장 일대는 고색지구 도시개발사업 구역에 포함돼 있다. 언제 헐려도 이상하지 않은 이곳을 많은 사람이 각별하게 관심을 두는 이유는 보존 가치 때문이다. 한때 수십여 곳에 달했던 호프만식 가마는 전국에 영신연와를 포함해 세 곳밖에 남지 않았고 그중에서 영신연와는 사택까지 남아있는 희귀한 사례다. 독일 기술자 프리드 리히 호프만이 고안해 명명된 ‘호프만식 가마’는 열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여 벽돌의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은 한시적으로 많이 쓰인 건축자재다. 벽돌과 자연석을 적절하게 섞어 쓴 수원화성과 같은 훌륭한 건축 모델도 있지만 근대기 전에는 자연석을 주로 썼고 근대 이후에나 서양식 건물을 지으면서 벽돌을 많이 쓰기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부턴 대다수 단독주택이 ‘빨간 벽돌’로 지어졌다. 그러다 1990년대 중반부터 주거 문화가 아파트 위주로 변화했고 벽돌을 이용하더라도 외벽을 장식하는 용으로만 쓰이는 경우가 많아 벽돌생산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벽돌은 주류에서 비주류로, 공장은 다수에서 소수로, 생산 공정은 가마식에서 터널식으로 바뀐 지 오래다. 바꿔 말하면 과거에는 수많은 가마식 공장으로 잘 나가던 주류의 시기가 있었다는 얘기다. 근현대 산업 발전의 한 과정이었고 그 시기를 무사히 거쳐 왔기에 그때를 ‘낡았다’ 말할 수 있는 현재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수원 하늘 아래 솟은 영신연와의 빛 바랜 굴뚝은 산업화 과정의 한 지점을 상징한다. 의도치 않았지만 어떤 인연으로 하여금 다수가 아닌 단수로 남아 ‘구시대 유물’이되었다. 이런 연유로 영신연와의 보존과 문화재로서 관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반대편에서 철거 후 부지 개발을 원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벽돌공장 터를 최소한으로 남겨두고 재개발하자는 절충안도 나오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이번 답사를 통해 영신연와를 처음 알게 되었음에도 공장 굴뚝을 보자마자 이 동네의 랜드마크라고 생각했다. 풍경은 을씨년스러웠지만 그 내력을 들었을 땐 ‘철거 반대’에 한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자존심처럼 남은 굴뚝이 분해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안타까웠다.




주변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면 굴뚝도 가려지기 십상이겠지만 단지 존재함으로써 서수원의 가시적인 이력이 될 테고 그것이 곧 이 지역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천 영종도의 한 오래된 교회는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는 카페로 고쳐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영신연와도 가마식 공장의 틀은 잘 보존하면서 카페, 서점 등의 문화공간으로 조성해 인기를 얻는다면 ‘개발주의자’들이 원하는 대로 이 일대가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땅이 될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고 다시 그릴 수도 없는 그림을 굳이 지울 것이라면 지운 자리에 새로 시작할 스케치는 정조의 수원 신도시 계획처럼 아주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기존의 그림보다 훨씬 가치 있어야 할 것이기에.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수원시 : 캔버스와 캠퍼스>에서 발췌했습니다.


세부정보

  • 영신연와

    주소/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매송고색로711번길 50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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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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