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겨울 목련을 보며 떠올리는 고승의 기다림

사패산 맑은 계곡길 따라 향하는 의정부 회룡사


사패산 맑은 계곡길 따라 향하는 산사

길은 회룡사의 이름을 딴 회룡역에서 시작한다. 전철역 앞이 대개 그렇듯 번잡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사패산을 향해 회룡천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나무가 빽빽한 풍경을 마주한다. 역에서 고즈넉한 산자락으로 접어들기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본격적인 등산로 입구인 회룡탐방지원센터에 거의 다다를 즈음 아름드리 회화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척 봐도 마을 어귀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당산목이다.




수령 400년이 넘은 이 노거수는 회룡사로 가는 들머리의 상징이다. 회룡사하면 반드시 언급될 수밖에 없는 태조 이성계의 이야기가 나무에서 시작한다. 나무 아래 안내판은 이 나무를 ‘도인이 심은 나무’로 소개한다. 회룡사를 드나들던 장수 이성계가 훗날 왕이 되자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연일 절로 몰려들었고, 그중 한 도인이 가는 길에 쉴 곳이 없어 이 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주변이 온통 계곡과 숲인데 쉴 곳이 없었다는 것은 억지스럽고 아마도 신성한 수호목과 태조를 연결 짓기 위해 후대에 만든 이야기 같다.




나무를 지나면 회룡탐방지원센터부터 본격적인 사패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회룡탐방지원센터는 의정부소풍길의 중간지점이자 북한산둘레길 16구간의 시작점 혹은 종착점이기도 하다. 지도를 보면 회룡탐방지원센터를 기준으로 행으로는 사패산 등산로가, 횡으로는 의정부소풍길과 북한산둘레길이 지나간다. 회룡사는 사패산 등산로를 따라 1.2km, 도보로 25분 정도 걸으면 닿는 거리에 있다. 북한산국립공원의 북쪽 끝에 위치한 사패산은 나란히 이웃한 도봉산이나 북한산보다 유명세가 덜하고 오랫동안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던 덕분에 자연이 잘 보존된 편이다.

주요 등산로로 의정부 쪽에서는 안골, 범골, 회룡골 길이 있고 양주 쪽에서는 송추와 원각사 길이 있는데 모두 계곡을 따라 걷는다. 안골이나 범골이 계곡의 시원한 맛을 느끼기에 더 좋다고들 하지만 회룡골도 뒤지진 않는다. 계곡은 크고 작은 폭포들과 깊고 투명한 소(沼)로 이루어져 시종 보고 걷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 곳곳에 수질검증을 받은 약수터가 있어 회룡골 맑은 물로 목을 축일 수 있다. 회룡골의 하이라이트인 회룡폭포에서부터 절 입구에 이르기까지는 걷는 내내 계곡에 시선이 고정된다. 여러 단에 걸친 폭포와 폭포가 만든 웅덩이들이 흡사 ‘선녀탕’을 보는 듯하다. 그 물빛이 퍽 아름다워서 아홉 마리의 용이 향기로운 물로 아기부처를 목욕시켰다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가 떠오른다.




겨울 목련을 보며 떠올리는 고승의 기다림

물소리에 취해 걷다보면 금세 회룡사다. 산사는 계곡 암반에 석축을 올리고 사패산 능선을 병풍으로 골짜기에 들어앉았다. 도량 안에도 맑은 물이 흐른다.




바로 회룡사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인 석조다. 석조는 생활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수조로 사찰에서는 꼭 필요한 시설이다. 조선 전기 때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회룡사 석조는 현재 남아 있는 국내 사찰의 석조 중 규모가 크고 잘 만든 석조로 평가받는다. 물소리를 따라 가면 범종각 아래 가로 153cm, 세로 224cm, 높이 90cm 규모로 자리 잡은 대형 석조를 볼 수 있다. 얼핏 봐도 연륜이 느껴지는 화강암 수조는 마치 그 세월이 표면을 깎은 듯 매끄럽고 부드럽다. 올라오는 길에 보았던 회룡골 계곡의 천연 웅덩이처럼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양새다.




석조와 동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회룡사 오층석탑은 절 마당 가운데 주인공처럼 자리한다. 3.3m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석탑은 한국전쟁 때 크게 파괴된 후 복원되었지만 곳곳이 상처투성이로 남아 있다. 지붕돌(옥개)은 죄다 깨지고 금이 가서 온전하게 남은 것이 없고 꼭대기 부분은 아예 사라져서 새로 만들어 붙였다.





풍진 세상을 온몸으로 겪어낸 석탑 곁에는 그를 위무하듯 잘생긴 목련 나무가 한그루가 서 있다. 12월, 보드랍게 솜털옷을 입은 겨울눈이 가지마다 영글어서 그저 바라만 보아도 온기가 느껴진다.




일찍 추위가 찾아든 산사에서 목련은 월동 준비를 단단히 마쳤다.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홀연 함흥으로 떠나버린 태조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무학대사와 태종의 마음이 겨울 목련과 같았을까. 끈질긴 함흥차사의 노력으로 한양으로 돌아온 태조가 절을 다시 찾자 무학대사는 기뻐하며 ‘용이 돌아온 절’, 즉 회룡사(回龍寺)라 이름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사찰 이름에 얽힌 몇 가지 설 중 가장 유명한 설이다.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기 전 무학대사와 함께 회룡사에서 3년간 수도했고 무학대사를 평생의 스승으로 모셨다. 두 사람의 인연은 혈연 못지않게 깊었고, 해서 왕자의 난으로 속을 썩고 고향 함흥으로 간 태조를 기다리는 무학대사의 마음 또한 아들 태종 못지않게 무거웠을 것이다.




사실 절이 소개하는 회룡사의 연혁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법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회룡사가 회룡사로 불리기 시작한 그때, 비로소 사찰의 실질적인 역사가 시작된다. 그것도 조선 건국과 태조 이성계라는 웅장한 이야기다. 현재 사찰에서 조선을 기억하는 유물은 조선 전기의 석조와 오층석탑, 그리고 대웅전에 걸린 조선 후기의 신중도(神衆圖)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절의 이름이 바뀌지 않는 한 회룡사는 곧 태조 이성계라는 등호가 변치 않을 것이다. 덧붙여 회룡사의 도로명 주소인 ‘전좌로’의 전좌(展座)는 현재의 호원동 일대로 함흥차사 이후 태조와 태종이 이곳 회룡사 부근에서 상봉했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가람 전체가 아름다운 정원

회룡사의 전각 대부분이 최근에 지어 고색창연한 느낌은 없다. 그러나 사찰의 분위기는 매우 정갈하고 편안하다. 도량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이 선원으로 이용하는 취선당과 요사채와 종무소로 이용하는 설화당이다. 정면에는 대웅전과 석조관음보살입상, 오른쪽에는 극락보전과 삼성각, 왼쪽에는 범종각과 그 아래 석조가 있다. 석조관음보살입상 뒤로는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다.




울타리 없이 앞뒤로 뚫린 이 개방적인 잔디밭 덕분에 절은 엄숙함보다 여유로운 인상을 가진다. 테이블에 앉아 절을 찬찬히 둘러보면 아기자기하고 살뜰하게 가꾼 화단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 오층석탑을 벗한 목련나무에서 일찍이 스님들의 ‘센스’를 엿본 이들이라면 이미 자투리땅 곳곳에 심어진 꽃나무들을 주목했을 것이다. 회양목, 느릅나무, 오죽, 장미, 목련, 배롱나무, 밤나무, 매화, 보리자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목이 전각 주변에 단정하게 가꿔져 있다. 한겨울에도 회룡사의 꽃나무들은 윤기를 잃지 않고 그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듬는 일이 쉽지 않은데 스님들이 가람의 수목들을 참으로 어여삐 여기는듯하다. 회룡사는 경기 북부의 대표적인 비구니 사찰인데 회룡사 특유의 고운 분위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범종루 옆에는 석조 크기보다 조금 더 큰 직사각의 연못도 있는데 겨울이라 물을 빼놓았다.




회룡사의 수식은 ‘행복한 절’이다. 경내 게시판과 팸플릿의 사찰명 앞에는 항상 ‘행복한 절’이 붙는다. 잠시 들른 이방인도 맑게 흐르는 석조의 물에, 통통한 목련 겨울눈에 슬며시 미소 짓게 되는 절이니 그 수식이 빤하거나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행복한 절 회룡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석조의 흐르는 물을 이용한 오감명상, 오층석탑 아크릴 무드등 만들기, 신중도 속 등장인물들을 이용한 직소퍼즐 만들기 등 사찰의 문화재를 소재로 한 체험 활동이다.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연히 모두의 ‘행복’에 있다. 울타리 없는 사찰의 문은 오늘도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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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사를 거쳐 사패산 정상까지 오른다면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성인 걸음으로 숨이 조금 찬 정도의 산이다. 회룡사를 오르내리는 길 중간,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석굴암(石屈岩)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석굴암은 3개의 거대한 자연암반이 만든 석굴이 있는 암자로,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 때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 숨어 지낸 곳이다. 바위에 새긴 암각문은 당시 7명의 언론인이 김구 선생의 친필을 받아 조각했다. 석굴암까지 가는 길의 경사가 꽤 가파르지만 회룡사와는 또다른 분위기의 사찰로 여유가 있다면 찾아보자.

주변 맛집으로는 회룡역 3번 출구에서 200m 떨어진 회룡전통순대국(031-877-0997)을 추천한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끓이는 진한 돼지육수에 순대와 내장을 가득 말아내 오는 순대국은 맛도 양도 만족스럽다. 순대국을 주문하면 별도로 간과 순대를 한 접시 내어준다. 순대국 정식을 주문하면 여기에 보쌈고기와 내장이 추가해 준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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