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집약적 행위,  우연과 필연에서 나타나는 우주적 공간 

정종효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작가 이성재의 작품에서 느끼는 감정은 아슬아슬하다. 철필로 휘젓듯이 그어내는 가느다란 선위에 올라선 듯한 아슬아슬한 감정은 위태로움과는 다르다. 회화에 있어 기본 요소인 선(線)이라는 단순한 요소로 관람자의 감정을 다변화시킨다. 선 속에 면(面), 무질서 속에 질서, 평면 위의 공간감.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감정들이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들게 만드는 매력이다. 우연성과 필연성의 반복적 결과물로 드러난 작업은 추상성으로 다가가 구상성 또한 느낄 수 있는 이유다. 모든 회화는 재현을 통해 이루어지듯이 그의 작업에서도 재현의 방식은 존재한다. “계절의 변화에서 오는 바람이나 풍경과 같은 시각과 색상을 모티브로 이미저리Imagery인 그리움의 표현이 우연과 필연이 아닐까”라는 작가의 생각에서 재현의 방식을 감지할 수 있다. 모든 미술작품은 재현의 반복을 통해 진화되고 완성된다고 많은 이론가는 주장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이성재 작가의 작업은 재현적 요소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존재와 유형에 관해 먼저 논하고자 한다. 재현의 방식은 작가에게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재현의 방식은 이론가의 주장에 따라 몇 가지 방식으로 나눈다. 플라톤(Plato)은 그림이나 이미지의 묘사를 통해 시각적으로 닮은 현상을 끌어내는 기술적 개념을 재현으로 정의한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재현적 묘사를 기호라고 주장하고 현대의 기호론 재현의 근원을 이룬다. 이후 넬슨 굿맨(Nelson Goodman)은 재현의 핵심을 지시라고 주장함으로써 모방성의 닮음과 기호에 대한 이미지적 관념을 해체 시키고자 했다. 작가 대부분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회화적 재현방식을 선택하고 인지한다. 모방(Mimesis)에 가까운 방식이다. 이성재 작가의 작업에서는 전술한 세 가지 유형의 재현적 방식이 혼합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화면 가득 서로가 교차하면서 무작위로 그어진 선에서 나타나는 한 화면 위의 추상적 이미지, 선과 선이 교차하면서 나타나는 삼각형과 같은 면에서 일정한 크기를 선택하고 컬러화시킴으로써 던져주는 암시적 표현, 또 그가 일상에서 생각한 무언가로부터 잔재한 개념을 자신의 지시에 의해 나타내는 세 가지의 재현방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삼중 적 재현방식으로 추상성 위에서 들여다보는 구상성의 작품은 우연과 필연이라는 개념이 저변에 깔려 그 만의 독특한 작업 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표현이라는 의미는 내적인 것을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이며 그린다는 개념에서 확장된다. 표현의 의미는 논쟁은 동시대에 들어 예술을 이야기하는 모든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기에 이제는 상투적인 용어가 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재현의 방식에 의해 표현이 변화되고, 작가 개개인의 조형 언어가 생겨나고,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이어가게 된다. 상투적이지만 작가를 독자적 세계에 들어서게 만드는 중요한 개념이다. 작가 이성재의 재현방식은 노동집약적인 행위에서 표출되는 표현이고, 세 가지의 재현방식이 혼합되어 작품이 완성된다.                  

 현대미술에 있어서 장르는 그 경계를 짓지 못할 만큼 기법과 재료의 무한한 도입으로 인해 다양화되고 있다. 작업 과정에서 작가의 신체적 행위 역시 작업의 종류에 따라 방식이 다양화되고, 행위는 곧 노동과도 이어진다. 작품을 생산해 내는 과정은 작품의 성향에 따라 그 의미의 폭이 다르다. 현대미술의 작가와 거리를 둘 수 없는 노동 혹은 행위는 예술과의 관계성에 관해 끝없는 담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작품에 내재한 행위를 포함하는 노동의 의미는 현대미술에서 더 부각한다. 각각의 독자적 연구 영역을 통해서 오랫동안 탐구되어 온 예술과 노동의 문제는 영역의 경계를 어떻게 둘 것이며 그 독립성의 인정에 관한 문제 역시 담론으로 이어져 온다. 근대 이후까지도 노동은 노예적인 일로 간주 되었다. 생존을 위한 필연성이라는 명목하에 육체적인 활동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인간은 예술을 노동 즉 삶과 깊은 연관 속에서 규정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예술은 삶과 연결되어 이해할 수 있기에 노동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도 이어졌다. 인간의 본질적 행동으로서의 노동은 근대 이후에야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는 예술과 노동의 관계에 관해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랑시에르는 노동에 대한 예술의 예외에 관한 이론이나 예술과 노동을 동일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실천은 노동의 외부가 아니라 노동의 전위 된 가시성의 형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예술이고 예술은 노동의 예외도 아니고 노동에 종속된 것도 아니라고 한다. 필연적인 행위에서 우연적인 조형성이 도출되는 미술품을 두고 노동의 중요성을 과히 이야기할 수 있다.                  

 이성재 작가의 작업에서 철필은 중요한 도구다. 철필을 쥐고 무한의 곡선을 나타내는 노동집약적 행위에서 그는 예술을 발견하지만, 역으로 예술에서 노동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노동적인 행위보다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선과 면 그리고 그 사이로 나타나는 또 다른 공간에 스스로가 빠져들어 가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선과 공간 그 사이 어딘가에 자신의 예술이 있고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철필로 휘감을 듯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캔버스 위의 선은 면을 제압하는 듯하지만 실은 공존한다. 선의 움직임은 공간을 생성하는 중요한 작용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대면하는 순간 선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선을 뒤로하고 시야에는 면이 생성되고, 면에 의해 선의 긴장감과 선의 움직임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자칫 선에만 집착하는 순간, 면을 지나칠 수 있는 유형의 아슬아슬한 작품이다. 선 사이의 면은 나아가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의 평면 회화 작품은 선과 면 혹은 공간에 의해 다시 입체화되는 순간이다. 중첩되는 선은 정체된 선이 아닌 움직이는 선임으로 해서 선 사이사이의 면은 공간이 된다. 그 공간에 초점을 맞출 때면 무한한 공간의 감정이 다가온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가볍고 날렵한 동적인 선의 느낌과는 또 다른 감정을 관람자로 하여금 느끼게 만든다. 선과 면을 넘나드는 감정으로 입체화된 공간감 있는 작품을 보는 매력을 느껴봄 직하다.                

 회화에서의 행위는 작업의 결과로 나타내기 위해 개입하는 직접적인 행위와 작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간접적인 행위로 나눌 수 있다. 이성재 작가의 작업에서 핵심은 반복되는 행위에서 나타나는 ‘선(線)’이다. 일정한 굵기의 가는 선은 직선을 배제하고 철저히 곡선으로 움직인다. 선의 움직임은 다양한 상상력을 유발하고 평면성으로 시작한 작품은 보는 시간을 통해 서서히 입체화시킨다. 면 혹은 공간의 영향이다. 선을 따라 무한정 시선이 움직이기도 하고 중첩되는 곡선 사이로 보지 못했던 면이 보이면서 공간감을 통해 무중력 상태의 선이 부유하는 매력을 연출한다. 우주 공간의 느낌이다.                 

 인간은 ’우연과 필연‘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혹은 이 두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관해 자주 고민한다. 이 양자의 관계성에 관해서는 우주적 관점에서 볼 수도 있고, 신앙의 입장에서도 볼 수도 있다. 또는 논리적 관점에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빅뱅 이후에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원리는 상수들의 조화로 수많은 별로 조합되어 있다. 이를 우연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우주는 태초부터 인간을 위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디자인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앙의 입장에서 인간의 탄생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그리고 전술한 내용과 작가가 생각하는 원리의 만남 또한 우연인가 필연인가. 이성재 작가가 이야기하는 우연과 필연을 우주적 관점에 비교한다는 건은 과다한 방식일지 모른다. 우주적 상상을 일으키는 공간감을 연출하고 있는 작품이기에 가능하다. 우연과 필연은 상황에 따라 결정하기보다 상황에 부여하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상당히 의도적임을 감지할 수 있다. 그의 우연과 필연의 경험은 작업을 통해 얻어낸다. 작업을 통한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인식한다. 우연이다. 그것은 다시 작가의 내면세계를 걸러내고 새로운 세계를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필연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작가는 작업과 본인 사이의 상황 위에서 우연과 필연의 반복행위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는 감상자에게 전달된다.                

 노동집약적인 이성재 작가의 행위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개념으로 작업에 옮겨지는 것이다. 불규칙한 행위에서 나타나는 선이지만 의도적인 행위다. 작업의 핵심으로 작용하는 선은 그린다고 하기보다 긁어낸다. 엄밀히 말하면 철필로 물감을 지운다고 할 수 있다. 긁어내며 지우는 행위에서 선이 형상을 드러낸다. 캔버스에 바탕색을 칠하고 말리고, 다시 다른 색을 칠한다. 이때 철필로 시작되는 작업은 작업의 순서를 한 단계 역주행하며 지우는 방식의 선은 평면이 아닌 공간 위에 존재한다. 색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색을 긁어냄으로써 가능하다. 흔적으로 남는 긁어낸 자리의 선은 캔버스 위가 아닌 공간에서 입체적 움직임으로 무한정 떠돌아다닌다. 작품의 선은 무의식적 결과로 나타나지만, 의식적 행위가 낳은 결과물이다. 선은 그 속에 의식적 행위, 즉 필연적인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불규칙한 원형으로 반복되는 그의 행위는 노동으로 이어진다. 수없이 교차하는 선이지만 얽힘 없이 움직이는 선형은 마치 우주의 별들의 움직임에서 연상하는 우연과 필연의 현상이다. 그의 작업에서 선에 대한 형상은 자유분방함을 넘어서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호한 우주와 같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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