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계절의 향기로 기억하는 곳

가을의 오산 물향기수목원를 찾아


오산 오색시장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져 있는 물향기수목원은 경기도가 2000년부터 조성해 2006년 개원한 오산의 명소다. 오산 여행, 오산 나들이를 인터넷에 검색하면 물향기수목원 관련 게시물이 가장 많다. 도심 속 대형 녹지공원이자 계절마다 풍경이 달라 늘 방문객이 많다. 전철역과 가깝고 도립이라 입장료가 저렴한 이유도 한몫한다. 도시의 역사가 얽혀 있거나 특별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 장소는 아니어서 그저 편안하게 산책하고 쉬다 오면 된다.




여행작가는 때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문장으로 재창조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료를 찾고 인터뷰하는 과정을 필수로 거쳐야 한다. 초석만 남은 절터를 2~3페이지의 다정한 글로 소개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그것이 곧 나의 임무다. 그렇지만 물향기수목원같이 연혁이 오래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풍경을 스케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장소는 일의 부담이 덜하다. 취재한다고 말하기 조금 민망할 정도로 휴식을 만끽한다.


가끔은 그런 장소도 필요하다. 속속들이 알지 않아도, 처음 방문이어도 그냥 편안한 장소. 내 업무를 방임한 채 게으르게 걷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오직 눈에 보이는 풍경을 온몸으로 느끼기만 하면 되는 장소. 고백건대 그런 장소들은 사실 글로 옮기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글감’이 부족해서, 또 일부러 소개하기에는 장소의 질량이 가벼운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다. 물론 수목원의 지층에는 유구한 역사의 흔적이 묻혀 있을 테고 수목원 자체에도 내가 미처 찾지 못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수목원을 걸을 때도 지금 이렇게 수목원을 쓰고 있는 중에도 이 장소에만은 힘을 주지 않기로 했다.




나무가 울창한 숲에서도 잠시 쉬어갈 만한 여백은 있는 법이다. 활자로 빽빽한 이 책의 여백은 바로 여기, 오산 물향기수목원으로 정했다. 그러니 독자들도 아주 가볍게, 스치듯 이 페이지를 읽어주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수목원에 대한 아래 몇 단락의 글을 수목원과 나 사이의 가벼운 스몰톡에 불과하다.


‘물향기’라는 이름이 참 예쁘다. 그런데 향기 나는 물이 있나. 숲향기, 나무향기, 꽃향기하면 향을 특정하긴 어려워도 대충 상쾌하거나 향긋한 냄새가 상상되는데 물향기는 무미한 물맛처럼 도통 모르겠다. ‘물비린내 난다’는 말은 종종 쓴다. 비가 내리는 날 가끔 훅 끼쳐오는 냄새인데 불쾌함을 유발하기에 향기가 아닌 비린내라 표현한다. 물맛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혹 둔감한 내 후각이 물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자세히 봐야지, 잘 들어야지 하는 다짐은 자주 하는 것 같은데(실천이 문제이긴 하지만) 잘 맡아야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보고 듣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게 여기는 감각이어서일까. 그렇지만 코로나에 걸려 후각을 잃고 입에 들어가는 모든 음식의 향을 느끼지 못했을 때의 그 좌절감을 떠올리면 평소에는 너무 당연하게 여겨 잘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물향기수목원에서는 숨을 천천히 마시며 둔감했던 후각을 일깨워 봐도 좋겠다. 향기로 기억하는 장소는 좀 더 각별할 것 같으니 말이다. 사실 물향기라는 이름은 수목원이 위치한 수청동(水淸洞)과 연관 지어 지은 것이다. 예로부터 맑은 물이 흘러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수목원 가까이에 이름 모를 개울이 흐르긴 한다. 개울은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오산천으로 흘러들고 오산천은 평택 진위천으로 흘러간다.




내가 수목원을 찾았을 때는 단풍이 절정인 11월 첫째 주의 주말이었다. 오산 시민들이 전부 다 수목원에 놀러 왔나 싶은 정도로 인파로 북적였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활기 넘치는 수목원 풍경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수목원의 주제가 ‘물과 나무와 인간의 만남’이라는데 그중의 방점은 인간에 찍혀 있다고 생각한다. 물을 물로, 나무를 나무로 이름 짓고 의미를 부여한 존재가 인간이니 말이다. 누군가는 인간이 없었다면 지구상 모든 생물이 오염 없는 청정한 환경에서 살아갔을 것이라 말하지만 어쩌랴. 이미 자연이 인간을 낳은 것을. 해서 나는 이 도심 한복판에 수목원을 조성한, 바쁜 일상에서 짬을 내어 물과 나무를 만나러 온 인간이 처연하고도 아름답다.


물향기수목원은 규모가 제법 크다. 수목원 둘레길인 주관람로를 천천히 도는데 1시간이 훌쩍 넘게 걸린다. 둘레길 안쪽의 단풍나무원과 소나무원, 무궁화원까지 돌아보려면 넉넉하게 3시간 정도 잡고 와야 한다. 일반 방문객들에게는 유원지나 다름없지만 엄연히 ‘수목원’이기에 수목 유전자원을 수집‧증식하고 보존‧관리하는 목적을 가진 곳이다. 그래서 민간업체에서 운영하는 정원이나 수목원처럼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조경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인위적이지 않아 자연스럽고 희귀식물, 특산식물을 비롯해 국내외 각지의 다양한 식물들을 한 곳에서 볼 수 있어 좋다. 수목원 북쪽에 자리한 물향기산림전시관과 숲해설 프로그램을 통해 식물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가을의 물향기수목원에서는 단풍 냄새가 났다. 단풍에 냄새가 있던가. 그러나 수목원에서 맡았던 깊고 그윽한 향기는 햇볕에 말라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과 길 위에 쌓인 낙엽들에서 풍겨오는 것 같았다. 크게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시고 싶은 아주 좋은 냄새였다. 생각해보니 그냥 ‘가을 냄새’라고 퉁쳤던, 가을이 아니면 맡을 수 없는 그 냄새였다. 단풍이 아니라면 유난히 청아했던 그날의 하늘과 청량한 바람이 뿜은 향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다고 생각했던 물향기일지도 모르고. 마침 단풍나무원 바로 밑에는 작은 호수가 하나 있다. ‘수생식물원’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지만 나는 어쩐지 잘 알려지지 않은 ‘관수저수지’라는 이름이 더 좋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오산시 : 오색빛깔 까마귀>에서 발췌했습니다.


세부정보

  • 물향기수목원

    주소/ 경기 오산시 청학로 211

    운영시간/ 9:00~18:00, 월 휴무

    입장료/ 어른 1,500원

    문의/ 0507-1398-1456

글쓴이
걷고쓰는사람
자기소개
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누리집
https://www.youtube.com/@yooseungh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