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잠시 스칠 뿐이지만 길한 인연처럼

천마산 암자, 남양주 견성암


천마산 자락에 자리한 MTB 라이더들의 성지

일주문에 닿기 전까지, 암자로 향하는 마을길은 조금 어수선하게 느껴질 수 있다. 크고 작은 제조업체와 물류센터가 여럿 모여 있는 산업단지를 지나기 때문이다. 절로 향하는 길 역시 천마산의 여러 등산로 중 하나지만 사람이 많이 몰리는 주요 등산로는 아니다. 전국적인 트레킹 코스로 자리 잡은 남양주 다산길 중 마지막 코스인 13코스 사릉길(사릉역-된봉-관음봉) 또한 근처를 지나지만 견성암을 거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성암은 속인들에게 무명의 사찰은 아니다. 특히 산악자전거를 즐기는 라이더들에게 견성암을 지나는 사릉 코스는 필수 라이딩 코스로 여겨질 만큼 유명하다. 라이더들은 사릉 코스를 까다롭지 않은 난이도로, 업힐과 다운힐 코스가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어 MTB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견성암을 향하는 길 위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산악자전거들이 오간다.




길은 견성암 도량을 지나 그대로 천마산 등산로로 이어져 절을 우회할 길이 없다. 라이더들은 견성암에 닿기 직전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량을 지나간다. 부처님을 모신 기도 도량을 지나는 예의 표현이다. 실은 주지스님이 과거 라이더들에게 여러 번 부탁한 끝에 정착된 풍경이다. 일전에는 대웅전 마당을 자전거로 냅다 달리는 이들이 많았다. 수행처의 일부가 자전거도로로 쓰이는 모습은 스님이 아닌 누가 봐도 불편할 일이다. 주지스님은 ‘지나가는 자전거가 많아 요청 드리는 것일 뿐 견성암은 만인에게 열린 절’이라고 강조한다. 도리어 절을 오가는 이들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해 아쉽다며 산령각에 오르면 보이는 전망이 근사하니 꼭 들렀다가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견성암을 지나 천마산 등산로를 오르면 관음봉까지는 1.8km, 천마산 정상까지는 6.2km다. 절이 천마산 자락에 있다지만 산자락이 넓어 주봉까지는 거리가 멀다. 가볍게 등산을 즐기기 위해 사릉 쪽에서 산을 오른 이들은 관음봉을 찍고 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자전거 라이더들은 주로 어남이 고개 방면으로 내려가며 다운힐을 즐긴다.


산령각의 그윽한 정취

견성암은 작은 암자다. 도량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견성암이라 쓴 편액이 걸린 대방이 보인다. 대방 옆에 마치 부속건물처럼 다소곳하고 아담한 모양새의 대웅전이 있다. 단청이 희끗희끗하고 기둥의 결도 거칠어 한눈에 봐도 암자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몇 발자국 떨어져 스님이 머무는 요사와 종무소를 겸한 건물이 자리한다. 그 옆에 해우소가 있는데 요즘 보기 드문 재래식 변소다. 스님 한 명이 수행하는 작은 암자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오히려 지나가는 객에게는 재래식 변소라도 급한 용무를 볼 수 있으니 존재 자체에 고마울 따름이다. 다만 여름에는 냄새가 많이 나서 마냥 좋아 보인다고 할 수도 없다. 눈에 보이는 가람은 언급한 곳들이 전부다. 따로 울타리는 없지만 법당 두 채가 있는 수행 구역과 종무소가 있는 생활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찬찬히 둘러보면 양파 껍질 까듯 새로운 것이 자꾸 보이는 절이 이곳 견성암이다. 종무소와 대웅전 사이 비탈에 작은 전각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보인다. 여름이면 무성한 수풀에 가려 전각 자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는 커다란 바위와 노거수, 한 칸짜리 팔작지붕 전각이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이 시선을 잡아끈다. 전각은 절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산령각이다. 유순하게 이어지는 산등성이 사이로 멀찍이 남양주 시내와 우뚝 솟은 서울 잠실의 롯데타워가 보인다. 주지스님은 야경이 더 멋지다고 덧붙인다. 깊은 산 속, 홀로 불이 켜진 암자와 아득하게 별무리처럼 보이는 도심 야경은 상상만으로도 낭만적이다. 일몰 후 결례를 무릅쓰고 수행 도량을 찾을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고려 개국 공신이 된 수행자와 그가 마셨던 천년우물

대웅전 앞에는 돌 사이로 졸졸 흐르는 석간수를 받는 작은 수각이 있다. 그 물이 흘러든 연못 웅덩이에는 살얼음이 끼었다. 겨울이라 조금 황량하지만 봄, 여름, 가을에는 연못 주변으로 다양한 꽃이 피어 예쁜 정원을 이룬다. 견성암에서 ‘물’을 얘기하려면 수각이 아니라 대웅전 기단 아래 석축을 볼 일이다. 석축에 뜬금없이 있는 닫힌 스테인리스 문을 열면 맑은 약수가 고여 있다. ‘독정(獨井)’이라 부르는 우물이다. 그 아래 흐르는 석간수가 내내 같은 물이다.




독정은 천 년 전부터 있어 당시 견성암에서 홀로 수도했던 ‘바우(바위를 의미)’라는 이름의 현자가 독정의 물을 마시며 수도했다고 한다. 물 덕분인지 바우는 수도 중에 약사여래불을 친견했고 훗날 명명된 ‘견성암(見聖庵)’이라는 이름도 이 일화에서 비롯했다. 독정의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 신묘한 우물 덕에 견성암이 ‘독쟁이절’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절 아래 동네(진건읍 용정리 일대) 이름 또한 ‘독정리’로 불린다.




수행자 바우는 풍양 조씨의 시조 ‘조맹’으로 신라 말 이곳의 석굴에서 도를 닦았다고 한다. 조맹이라는 이름은 태조 왕건이 하사한 이름으로 왕건은 조맹이 수행자 바우였던 시절 그를 찾아 나랏일을 논했다고 한다. 이후 조맹은 고려 개국공신 문하시중으로 이름을 올렸다. 놀랍게도 조맹이 수양하던 굴이 대방 뒤에 있다. 현대식으로 석굴 입구를 만들고 제단을 갖추어 얼핏 인공석굴인가 싶지만 사람 한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자그마한 자연 석굴이 맞다. 그 안에 조맹과 그의 곁을 지키는 호랑이상이 모셔져 있다.

오늘날, 풍양 조씨 문중의 후손들은 시조 조맹이 수행하던 이 석굴을 찾아 절을 올리고 예를 갖춘다. 절이 견성암이라는 이름의 사찰로 거듭난 시기는 1200년대, 그 후손들에 의해서다. 이후 1860년 조맹의 후손이자 승려인 혜소대사가 견성암을 중수했고 이후 효명세자의 왕후이며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즉 조대비가 견성암에 거금을 시주했다고 한다. 조대비 역시 당연히 풍양 조씨다. 즉 견성암은 오랜 세월 풍양 조씨의 원찰로서 시조를 모시는 후손들의 마음으로 이어져 온 사찰이다. 이러한 내력으로 견성암은 경기 북부지역 35개 전통사찰 중 유일하게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운영되고 있다.





풍경 소리 맑은 고요한 수도처

천 년 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견성암은 여전히 수도자의 공간이다. 산바람에 울리는 풍경 소리, 객들의 발자국 소리가 이따금 적막을 깰 뿐이다. 관광지 찾듯 마음을 내어 굳이 절을 찾을 이유는 없다. 수행자를 배려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여행지로서도 이렇다하게 추천할만한 요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양주는 견성암이 아니더라도 유명 사찰과 주변 관광지가 참 많은 고장이다. 견성암에서 북쪽으로 15km를 가면 봉선사와 광릉, 국립수목원이 있고 남쪽으로 30km를 가면 수종사와 남한강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모두 ‘경기도의 아름다운 사찰’ 기획 기사로 소개했던 절들이다. 그렇다고 견성암이 중요하지 않은 사찰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진 절이고 특색도 있지만 관광 명소로 이름난 사찰들을 방문하듯 처음부터 볼거리로 접근한다면 아쉬울 수 있다. 그간 절 앞을 오갔던 수많은 행인들처럼, 다만 ‘길’이어서 거치지만 잠시나마 독정의 맑은 기운을, 부처님과 조맹 선생의 좋은 기운을 얻었다면 그것만으로 길한 인연이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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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암에 왔다면 천마산 산행을 즐겨보자. 견성암에서 1.8km 떨어진 관음봉까지는 1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가파른 구간이 있지만 걷기에 어려운 코스는 아니다. 관음봉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주변 풍경을 볼 수 있다. 하산은 된봉이나 어남이고개 방면으로 해도 좋다. 관음봉-된봉-영락공원-사릉역 코스는 다산길 제13코스로 약 15km 정도의 거리다.




식사는 소머리국밥을 전문으로 하는 사릉우리식당(031-574-8591)을 추천한다. 현지 단골들로 북적이는 이 집은 푸짐한 건더기와 잡냄새 없이 진한 국물로 진건읍 맛집으로 이름난 식당이다. 마늘향 짙은 매콤한 소내장볶음도 이곳의 별미다. 꼬들꼬들한 양과 부드러운 허파의 식감, 감칠맛 나는 양념의 조화가 좋다.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일요일은 휴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출처 중부일보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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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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