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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경기문화재단은 본 가이드의 내용을 ‘회원’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지지씨 플랫폼의 기관회원 등록 안내 페이지에 게시하여, 자유롭게 내려받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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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 가이드의 개정과 관련하여 이의가 있는 ‘회원’은 탈퇴할 수 있습니다.
2. 경기문화재단의 고지가 있고 난 뒤 효력 발생일까지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을 경우, 개정된 가이드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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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분류 | 뮤지엄(박물관,미술관)/협회/문화예술공공기관/시군청 담당부서 등 | 본부/기관 |
아이디 | 사업부서명/사업명 | 사업부서명/사업명 |
글쓴이 노출 | 아이디와 동일(한글) | 아이디와 동일(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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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쓰는사람
덕망 있는 독지가 혹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안성의 거부 박필병의 흔적을 따라
누구에게나 명암(明暗)이 있다. 그러나 세상이 한 인물을 영웅으로 묘사할 때 흠결은 쉽게 가려지거나 숨겨진다. 그래서 특정 인물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과 신성화는 위험하다. 평화주의자로 존경받았던 지도자가 사석에선 인종차별적 언행을 수시로 했다거나 혁신적인 기술로 명성을 얻은 기업가가 가정폭력을 일삼은 부도덕한 인물이었다는 등의 사례는 숱하게 많다. 박필병은 기부와 교육사업에 사재를 아끼지 않았던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 사후에도 줄곧 독지가로, 애향인으로 존경받아 왔다. 국가는 2003년 그의 생전 공로를 기려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다. 동향 사람들은 박필병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 한다.
‘독지가’ 덕분에 탄생한 안성의 랜드마크
한경대학교는 안성 구도심의 중심축이다. 시민들은 구도심의 위치나 방향을 설명해야 할 때 한경대를 이정표로 삼는다. 단순히 캠퍼스의 규모가 커서라기보다 안성 원도심의 상징적인 존재로 각인되어서다. 김보라 안성시장은 지난 2020년 11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한경대를 두고 ‘안성의 랜드마크’이자 ‘안성시민의 자부심’이라고 일컬었다. 김 시장은 또한 “한경대학교는 1939년 안성의 독지가에 의해 안성공립농업학교로 개교해 경기도 유일의 일반 국립대학으로 자리 잡은, 안성인의 역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은 지난 2019년 5월에 불거진 한경대와 한국복지대 통합 추진에 따른 시민들과 대학 측의 갈등에 대해 시장의 의견을 묻는 질문에서 비롯됐다. 시측은 두 대학의 통합으로 일부 학과가 평택에 위치한 복지대로 이전하면 학생 수 감소로 인한 주변 상권의 붕괴를 우려했다. 안성지역 사회단체들은 통합반대 대책추진위원회를 꾸려 통합대학 반대 서명에 나섰다. 안성시가 대학 통합에 직접적으로 나설 수 있는 주체가 아님에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통합을 반대하는 이유는 김보라 시장의 말대로 한경대학교가 “단순히 안성에 위치한 대학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성시의 바람과는 달리 한경대와 복지대는 2022년 통합 후 2023년 한경국립대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이원화 캠퍼스로 운영하게 되었다.
한경대는 80년 넘는 세월 동안 안성시의 발전과 궤를 함께하며 점차 규모를 확장해왔다. 그 출발이 농업학교였기 때문에 농축산업의 비중이 큰 안성시로선 학교와 오랜 시간 매우 밀착적인 상생관계를 유지해왔다.
거듭 안성시장을 이 글에 소환해 미안할 지경이지만 다시 그의 말을 되짚어야겠다. 안성시장은 앞선 인터뷰에서 한경대는 ‘안성의 독지가’에 의해 개교했다고 말했다. 서두에서 한경대와 안성시의 관계를 이토록 길게 풀어낸 이유는 바로 이 글의 주제가 바로 그 독지가이기 때문이다.
반경 100m 안에 공존하는 친일파 동상과 평화의 소녀상
국어사전에 명시된 독지가의 뜻은 ‘1. 도탑고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 2. 남을 위한 자선 사업이나 사회사업에 물심양면으로 참여하여 지원하는 사람’ 이다. 안성시장이 언급한 독지가는 두 번째 뜻에 해당한다. 독지가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한경대학교 공식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한경대학교의 전신인 안성공립농업학교는 1939년 독지가 박필병(朴弼秉) 선생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안성읍 석정동에 5만 8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면서 설립되었다. (중략) 1940년 교사를 신축‧이전하고 차례로 실험실습지와 운동장을 닦으면서 터전을 잡게 되었다. 당시 학교의 설립은 안성군민의 자녀교육을 위한 열망, 박필병 선생의 교육을 통한 사회 발전 염원, 일본 식민당국의 군량미 확보를 위한 미곡 증산정책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독지가 박필병 선생의 모습은 한경대 캠퍼스 안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어디라고 설명할 것도 없이 정문을 통과하면 바로 보인다. 딱 사람 크기만한 동상이 6m에 달하는 높다란 기둥 위에 세워져 있어 우러러봐야 한다. 오늘날까지 지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학교이니 학생이나 안성시민이라면 설립자를 향한 존경심으로 기꺼이 올려다봐줄 수 있다. 그런데 이 독지가가 친일반민족행위자라면?
박필병이 친일반민족행위자였대도 그가 땅을 사서 학교를 세웠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더구나 대한민국에는 친일파의 공적을 기리고 캠퍼스 내에 그들의 동상을 세운 학교들이 널리고 널렸다. 서울대 현제명, 연세대 백낙준, 고려대 김성수, 이화여대 김활란, 한국외대 김흥배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수두룩하다. 여러 차례 논란이 되면서 동상 철거 요구가 빗발쳤지만 해당 대학들은 조치하지 않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인된 인물이라 해도 이들이 학교 설립 및 대내외적으로 세운 업적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학교 측의 입장이다.
한경대 정문 바로 맞은편에 내혜홀 광장이 있다. 2004년에 조성한 작은 광장인데 이름인 내혜홀(奈兮忽)은 안성의 옛 지명으로 낮은 고을이라는 뜻이다. 2015년, 안성시에서는 이 광장의 우레탄 바닥을 교체했는데 바닥에 별 문양이 들어가자 북한의 인공기가 연상된다는 보수 단체들의 강력한 항의가 있었다. 그로인해 전면 바닥 재공사를 실시한 해프닝이 있었던 곳이다. 때아닌 친북논란에 휩싸였던 이 광장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있다. 2018년,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건립되었으며 건립 당시 모금과 함께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 촉구에 6,200여 명이 서명했다.
평화의 소녀상은 익히 알려진 모습으로, 치마저고리를 입은 단발머리의 소녀가 맨발로 의자에 앉은 채 앞을 응시하고 있다. 소녀 옆에 놓인 빈 의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을 공감하자는 뜻에서 만들어졌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필병의 동상과 불과 200m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이 동상이 자리한다. 일본에 협조하며 관직을 얻고 부와 명예 속에 평생을 살았던 사람, 일본에 의해 비참하게 성을 유린당하고 고통 속에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 ‘함께’나 다름없는 좁은 반경 안에 공존한다. 두 동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무엇을 기리고 또 기억해야 하는 걸까.
태평양전쟁을 적극 지원한 중추원 참의 ‘마쓰이 에이지’
박필병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4,776명 중 한 명이다. 중추원 참의라는 그의 이력이 친일 행적에 쐐기를 박는다. 제아무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를 불신한다 해도 중추원 참의라는 기록을 보고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고 주장하긴 어렵다. 중추원은 소위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어용 단체’로 불린다. 훗날의 평가가 아니라 기관이 설치된 1910년부터 ‘퇴물 관료와 친일분자의 집합소’로 비난받았다. 대한제국 때는 국가적 중요 안건 및 법률의 제정과 폐지 관련 자문을 하는 심의기관의 역할을 했으나 이후 조선총독부가 대한제국의 국가 기구를 접수하면서 대한제국 관료들에 대한 우대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에 권력의 허수아비라는 비난은 받을지언정 권력을 얻고자 하는 조선인들은 중추원의 일원이 되기를 원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일제의 전쟁 수행을 뒤에서 돕는 ‘선전 엘리트’로 그 존재감을 공고히 했는데, 이때 지방 토호들과 재력가들이 중추원 구성원들로 다수 영입됐다. 이들은 각 지역을 순회하며 지원병 모집 강연을 하고 국방헌금이라는 명목아래 전쟁협력 기금을 모으며 중앙권력에 진출하고자 노력했다.
박필병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중추원 주임 참의로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중추원 참의다.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중추원 참의들은 조선총독부의 요구에 따라 지원병제와 징병제 독려에 나섰고 경쟁적으로 국방헌금 기부와 비행기 헌납에 나섰다.
박필병 역시 참의로 선임된 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 단체는 윤치호, 최린 등이 중심이 되어 황민화사상 통일 및 전시하의 국책 협력 등을 강령으로 하고 전국적인 지부 조직을 거느리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조선임전보국단은 1년 만에 해체되었으나 박필병의 활동은 이와 별개로 일관되게 이어졌다.
1942년 2월 21일 매인신보 안성호 헌납 기사
1942년에는 안성을 대표해 비행기 헌납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경기도에서는 수원호, 안성호, 시흥호, 강화군민호, 개성부민호 등 각 지방의 명칭을 딴 비행기가 일제에 헌납되었는데 박필병은 중추원 참의로서 다른 안성 유지들과 함께 비행기대금을 헌납했다. 이 소식을 보도한 1942년 2월 21일자 매일신보 기사에는 중추원 참의 마쓰이 에이지(松井英治)라는 이름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마쓰이 에이지는 창씨개명한 박필병의 일본 이름이다. 그는 또한 1944년, 일제의 강제징집제 실시 선전 강연 및 좌담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조선총독부가 원하는 바를 충실하게 이행한 인물이었다. 특히 박필병과 같은 친일자본가들에게 일제의 침략전쟁은 해외시장의 확대를 의미했고 이는 조선총독부의 통제 아래 시장의 독점이윤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조선총독부와 상생하며 승승장구한 삶
그렇다면 박필병의 친일 행적은 단지 중추원 참의 역할로 한정되는 걸까? 그렇지 않다. 그는 1884년 안성군 동리에서 태어나 1901년 경성학당을 졸업한 후 한남관찰부 차사로 있다가 18세부터 고향 안성에서 가업을 이었다. 그의 부모는 80석 내외의 추수를 받는 토지를 보유한 안성 토박이들로 동네 부자였지만 대부호까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중추원에서도 손꼽히는 자수성가형 자본가로 성장한데에서 그의 사업가적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박필병이 맡았던 직위는 한 페이지에 다 쓰기 모자랄 정도로 많다. 그가 손을 댄 분야는 농업은 물론 상업, 전기, 양조업, 금융신탁까지 다양하다. 1919년 안성상사주식회사 창립을 시작으로 성남전등 사장, 안성철물제조조합 발기인, 안성유기제조 발기인, 안성양조 감사, 안성주조주식회사 사장, 조선국자 이사, 안성읍진안자동차운수주식회사 부사장, 공도산흥주식회사 이사, 경기운송 이사, 삼익사 사장, 중앙주조 이사, 죽산주조장 조합장, 평택 조선주조 조합장, 공도산흥회사 사장, 안성물산 이사 등 다양하게 사업을 했다. 지역경제단체에선 안성농사장려회 부회장, 경남철도 안성선속성동맹회 평의원, 안성공영사장, 안성번영회 부회장 등을 거쳤으며 중앙단체 지방지부 활동으로는 경기도 평택세무서 소득 조사위원, 안성군농회 특별의원, 안성소작위원 등을 지냈다. 주요 관직 경력으로는 1920년 면협의회원, 1927년 경기도평의원, 1933년 경기도회의원 등이 있다. 여러 요직에 있던 인물답게 1928년에는 일제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는 쇼와 일왕 즉위를 기념해 즉위식에 초대한 사람들에게 수여한 기념장이다. 주목할 만한 기록 중에는 1937년 안성경찰서에 2,050원 상당의 고사기관총 1정 구입비를 헌납한 사실과 1939년 11월, 전시 체제 강화와 유도 신민화를 위해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조선 유도연합회의 평의원을 맡은 사실이 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든 35세 박필병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38년, 전답 559정보와 소작인 833명을 둔 대지주로 성장했다. 1930년대 말, 50정보 이상의 소유자들을 대지주라 일컬었음을 상기하면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땅부자라 할 수 있다. 정재계를 넘나들며 재산을 축적한 그의 행보는 당연히 조선총독부, 즉 일제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일제 또한 이러한 거물급 조선인을 ‘요긴하게’ 활용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상생 관계나 다름없던 것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중추원 참의직이다.
기부와 육영사업으로 얻은 확고한 지지, 그 뒤에 가려진 친일행적
박필병은 기업가와 정치인으로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안성에선 독보적인 위치의 육영사업가였다. 한경대학교가 있게 한 장본인이며 안성의 숱한 국‧사립학교들의 재정을 보탠 재력가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 앞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독지가’가 붙는 이유는 그가 안성 근대교육시설 자립에 미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박필병의 기부금 이력 또한 화려하다. 안성청년야학회 찬조금 40원, 삼죽면 보통학교설립 기부금 50원, 안청학교 야학부용 전등료 1,200원(10년 치), 안법학교 기부금 150원, 안성군 민립대학 기성회 의연금 750원, 안청학원 후원금 500원, 안성공립보통학교 대강당 건축비 기부금 1,500원, 안성공립농업학교 건축비 10만원 등을 기부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들이며 한경대의 전신인 안성공립농업학교에 댄 기부금 10만원은 당시 물가로 약 15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이러한 기부금, 후원금 납입으로 그는 안성교육회 경리부장, 안청학교 이사장, 안성읍내 소학교 부형회 고문 등을 역임하는 등 자연스럽게 각종 교육단체의 간부직을 맡았다. 박필병의 기부는 교육단체에만 그치지 않았다. 생활개선사업에도 자선가로 참여해 도로부설로 전답 349평을 기부하고 경기도립수원의원 안성출장소 건설자금으로 7,350원, 안성면 소방기구 정비자금으로 2,000원 등을 기부했다. 과세곤란 궁민에게 현금 500원, 백미20석도 기부했다. 이러한 기부는 1920년대 초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꾸준하게 이루어졌다. 중추원 참의 재임 때나 특정기간에만 몇 차례 본보기로 한 기부가 아니라 그가 60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거의 반평생 가까운 긴 세월 기부를 한 셈이다. 일부 자선사업은 총독부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했다.
안성 낙원역사공원에 세워진 경기도평의원 박필병 시혜불망비_가운데
기부를 받는 이들이 늘수록 그의 덕망도 쌓였다. 중추원 참의 임명은 본인뿐 아니라 그를 아는 사람들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속으로는 친일파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었을지 몰라도 안성 땅에 살면서 그를 대놓고 욕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1929년에는 가뭄으로 수확이 줄어들자, 지주 박필병은 종래의 도조(賭租)를 고쳐 타작 반분제를 시행했고 소작인들은 땅값으로 치르는 벼 생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얼마나 파격적인 조치였는지 소작인들은 이에 감사하며 박필병의 송덕비까지 세웠다.
박필병의 육영사업, 자선사업 기록만 본다면 어째서 그가 안성에서만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불리지 않을 수 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선행으로 일축되는 재력가들의 기부를 반드시 좋게만 볼 수는 없다. 박필병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재력가들은 대부분 여러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경제력 기반을 닦고 이를 바탕으로 육영사업을 벌였다. 주로 학교 설립, 학교 신축을 위한 토지기부, 장학금 기부, 교육재단설립 등이었다. 지방 유지들은 육영사업을 통해 지역민의 신뢰를 얻고 명망가로 추앙받았지만 한 발짝 떨어져 볼 때 육영사업은 곧 조선총독부의 시정정책에 호응하는 행보였다. 이들은 주로 제도권 내의 교육에 지원과 투자를 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일제의 교육정책, 즉 일어보급 및 황국신민육성에 이바지하는 셈이었다. 육영사업과 자선사업은 또한 지방 유지의 자본력과 권력을 드러내고 재력과 명성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에는 이렇듯 총독부에 대한 충성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인의 부귀와 영달 추구가 전제되어 있다.
정의 구현은 아득히, 한 뙈기도 환수하지 못한 친일파의 땅
2011년 5월, 대법원은 박필병의 손자 박모씨가 행정안전부장관을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로써 박필병은 재차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인 받은 셈이 됐다. 손자 박씨는 2009년 7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박필병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하자 ‘중추원 참의로 조선총독의 자문에 한 차례 응했을 뿐인데, 이를 친일행위로 규정한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반민족적 자문기구로서의 성격과 기능, 발탁 경위, 활동 내용에 비춰보면 일제식민지배 협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참의활동 행위만으로 친일반민족행위라고 보기에 충분하다’고 판결했다. 이때 박필병의 손자를 변호한 이선애 현 헌법재판관은 2017년 3월에 있었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변호사 시절 친일파 후손의 사건을 변호한 데 대해 “법원의 결정에 승복하며 개인적으로 박필병은 친일파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전술한 기록들만 보더라도 ‘조선총독의 자문에 한 차례 응했을 뿐’이라는 손자의 주장은 억지스럽다. 다만 손자의 입장에선 이제껏 덕망 있는 어르신으로 지역 사회의 존경을 받아온 할아버지가 만천하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가슴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막말로 ‘친일파’의 후손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조상이 저지른 친일행위에 대한 참회를 후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헌법 제13조 3항에는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 한다는 규정이 있다. 연좌제 금지를 규정한 대목이다. 그러나 선조가 친일의 대가로 부당하게 형성한 재산을 마치 자신이 정당하게 형성한 재산인 것처럼 여기고 그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며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이는 곧 역사를 왜곡하고 민족정신을 위배하는 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법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한 반민족 행위자가 그 당시 친일 반민족 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선의의 제삼자를 보호하여 거래의 안전을 도모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삼일 운동의 헌법 이념을 구현함을 목적으로 함.’
2006년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이 법에 따라 박필병의 명의로 된 재산을 추적했다. 안성에 150필지가 넘는 토지가 그의 명의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안성에선 그의 땅을 반드시 밟게 된다는 일제 때 풍문이 아직도 유효한 셈이었다. 위원회는 그가 일제강점기에 토지를 취득한 점과 기록에 남은 여러 친일 행적을 토대로 재산을 가압류했으며 국가귀속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최종 결과는 황당했다. 국가귀속 재산의 기준은 친일행위로 얻은 대가성 재산이냐 아니냐의 여부인데 이 법률에 따르면 박필병의 재산이 국가귀속 될 수 있는 시점은 중추원 참의로 임명된 1941년 이후였다. 이전의 친일 행위는 법의 기준을 벗어나 ‘생계형 친일 수준의 행위’로 규정됐다. 그런데 위원회가 가압류한 토지는 모두 1937년에 취득한 것으로 1941년 이후 취득한 토지는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중에는 후손조차 몰랐던 박필병의 토지까지 있어, 결국은 그 땅까지 후손에게 돌려줘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례를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의 기준이 너무 느슨하고 모호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 당시 중추원이 아무리 허수아비 같은 기관이었대도 무려 ‘참의’ 자리에 생계형 친일 수준의 행위를 하는 인물을 앉히진 않았기 때문이다.
박필병과 비슷한 사례로 이해승의 토지 환수 이슈도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이해승은 조선총독부로부터 당시 조선 귀족 중 최고지위인 후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일본으로부터 한국 병합기념장을 받고 각종 친일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태평양전쟁 중 국방헌금을 내는 등 다양한 친일행적을 남겼다. 2007년, 공시지가 300억 원대의 토지에 대해 친일재산 국가귀속결정에 따른 환수가 추진됐으나 그의 손자가 제기한 소송에 패소해 땅은 그대로 후손에게 돌아갔다. 그 토지 중 일부가 서울 홍제동 스위스그랜드호텔(전 그랜드힐튼호텔) 부지다. 호텔 소유주 이우영 회장이 바로 이해승의 손자다. 이 호텔이 최근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국가 환속에는 실패한 땅이지만 논란이 있는 부지다 보니 매도자 입장에선 서둘러 처분하고 현금화 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국가는 168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토지 2,359필지를 환수했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1.3배에 달하는 규모로 현재는 국가보훈처와 국토교통부 명의로 이전되었으며 국가유공자 후손들의 처우 개선 사업에 이용될 예정이다.
그러나 박필병과 이해승의 경우와 같이 친일파의 유산이 확실함에도 국가 환수가 되지 못한 사례가 많고 심지어는 친일 기업가 박흥식의 평택 토지처럼 정부가 인지하고도 ‘방치’한 경우까지 있다. 그나마 서울에 많은 땅을 가진 이해승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언론에 간간히 노출 되고 법무부의 국고 귀속 의지도 강한 편이지만 박필병은 토지 환수 실패 이후 친일파의 그늘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3‧1운동 정신 기리면서도 친일반민족행위는 쉬쉬
안성은 오래 전부터 보수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대규모 장터가 열리고 사통팔달해서 외지인들이 수시로 드나들던 길목이었지만 토박이가 많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개방적이기 보다 폐쇄적인 성격의 고장이다. 이로 인해 도시 발전이 더뎌졌다는 비판도 있지만 단순히 지역 실세들의 보수성 때문에 개발이 되지 않았다기보다 지리적, 환경적인 이유들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소위 텃세로 표현되는 보수성을 안성이 3‧1운동의 전국 3대 실력항쟁지라는 사실과 결부시키기도 한다. 안성시 양성면과 원곡면은 1919년 4·1 만세항쟁 때 일본인을 전부 몰아내고 관청을 불태우는 등 매우 치열했던 항쟁지였다. 이때를 전후로 안성은 경기도 내에서 가장 많은 수인 316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으며 만세 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주민들이 6천명에서 1만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안성 3.1운동기념관
안성 3‧1운동기념관은 당시의 항쟁정신을 기리기 위해 원곡면 만세고개에 2008년 개관했다. 안성시는 기념관 개관 이후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사적지를 발굴하고 사료를 수집하는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안성시를 역사의 도시로 홍보하기도 한다. 지난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이곳 기념관에서도 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100년 전 오늘 안성주민들이 단결하고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며 “통일과 친일청산은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친일청산으로 100년의 역사를 올바로 기억하고 평화와 번영의 100년을 열어가는 데 경기도가 앞장 서겠다”고 밝혔다.
고작 한 명의 친일반민족행위도 쉬쉬하는 고장에서 친일청산은 이제껏 전술했던 바와 같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로 보인다. 이 지역의 유난한 ‘보수성’이 치열한 3‧1운동을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현재로선 재력으로 민심을 샀던 토박이 친일파를 비호하는 성질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애국과 매국이 섞인 혼돈의 장에서 기억해야 할 것
안성에서 박필병을 기리는 석물은 한경대학교에서 2km 쯤 떨어진 낙원동 낙원역사공원에서도 볼 수 있다. 박필병이 일본 제국에 충성하고 지역에 기여한 공을 기려 건립한 경기도평의원 박필병 시혜불망비가 공원 내에 자리한다. 비석을 등지고 정면을 향하면 안성1동 주민센터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당시 안성군청이었던 건물로 1928년 지어졌다. 안성의 실세 박필병은 아마도 이 건물을 자주 드나들었을 것이다. 건물은 일제강점기 관공서 건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새로 짓다시피 해서 처음 건물을 보는 사람들은 근대식 디자인으로 설계한 현대 건축물로 오인할 정도다. 비석도 건물도 알고 보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1928년 건립된 구 안성시청 건물로 현재는 안성1동 주민센터로 이용
시혜불망비와 일제강점기 관공서 건물 사이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동상과 평화의 소녀상 사이에서, 3‧1운동 실력항쟁지와 친일파 명의의 땅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박필병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기 전인 200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인재 육성의 공로를 인정해 국민훈장 목련장이 추서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났다.
고려대 설립자이자 동아일보 창업주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인촌 김성수의 건국훈장은 지난 2018년 박탈됐다. 서훈을 받은 지 56년 만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항일 언론인 장지연도 경술국치 이후 친일 언론인으로 변절한 사실이 인정되어 1962년 수여한 서훈을 2011년 취소했다. 전례를 볼 때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필병의 국민훈장 역시 박탈되어야 합당하다.
박필병의 사례를 보면 우리는 현재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친일행위로 일군 부와 명예를 보장해주는 21세기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흔히 ‘부모 잘 만나 떵떵거리고 산다’고 말할 때, 누군가는 친일파였던 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할 테고 또 누군가는 친일파 선조를 둔 이웃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국가와 삶의 주인이 되길 거부한 개인이 어떤 자성도 없이 부귀만을 좇는 사회는 퇴락할 수밖에 없다.
지난했던 과정들과 숱하게 아이러니한 상황들을 보면 앞으로의 친일파 청산 노력이 내내 무력하고 요원해보일 수 있다. 친일반민족행위로 일군 토지가 모두 환수될 수 있을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민훈장이 박탈될 수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단 몇 줄의 문장으로라도 꾸준히, 반복적으로 친일파 청산 문제를 길어 올리는 것이다. 친일활동과 그 대가를 정당한 노력과 벌이로 우기는 이들을 자꾸 노려봄으로써 부담을 주고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발전이란 명목으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는 핑계로 나라를 팔고 민족을 지워 제 주머니를 불린 자신들의 조상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내혜홀 광장의 바닥 무늬가 불온하다며 단번에 뜯어 고친 시민들의 의지 정도면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동상과 기념비 철거 정도쯤은 별 일 아니지 않을까.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김윤정, 『조선총독부 중추원 연구』, 경인문화사, 2011
김성태 외,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경기도』, (사) 기전역사문화서포터즈, 2020
전강수,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 한겨레출판사, 2020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책으로보는세상, 2011
김명섭, 「1.굳건히 박힌 식민의 잔재,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호일보』, 2020.10.22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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