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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쓰는사람

이산의 꿈, 민산의 땅

국립농업박물관의 뿌리를 더듬는 여정




경기상상캠퍼스 생생1990 주변 


경기상상캠퍼스에 있었던 서울대 농대의 전신은 1904년 대한제국이 서울에 세운 농상공학교의 농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농과가 독립되어 농림학교가 되었고 1906년 수원에 권업모범장이 자리하면서 1907년 그 산하로 들어갔다. 이후 1918년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개편되었고 1922년 수원고등농림학교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이듬해,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짚고 갈 부분은 1919년 3·1독립운동에 수원농림전문학교 학생들이 참여했고 1923년에는 전교생이 조선인 차별금지 등 7가지 요구 조건을 내걸고 동맹휴교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1927년 이후에는 김찬도, 우종휘, 고재천 등의 학생들이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하며 항일학생운동을 이어 나갔다.



경기상상캠퍼스 전경, 사진=경기문화재단


한편, 시간이 흘러 1975년 4월에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일어난 유신체제, 긴급조치 반대 시위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김상진 학생이 할복해 자결하는 일도 일어났다. 경기상상캠퍼스 내 ‘공간1986’ 옆에는 무궁화전시박물관이 있는데 그 앞뜰에 김상진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김상진 민주열사 소개 안내판과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 캠퍼스에는 ‘꿈과 낭만’ 이전에 민주주의와 진정한 자유를 위해 목숨마저 내놓은 캠퍼스의 주인이 있었다.


그런데 권업모범장은 왜 수원에 들어섰을까. 권업모범장이 있어 결과적으로 서울대 농대도 서울이 아닌 수원에 들어섰기에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권업모범장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농업 생산물을 일본의 농업구조 체제 안에 편입시키기 위해 농업구조를 개편하려는 의도로 1906년 세운 기관이다. 근대적인 농법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두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농업정책 아래 쌀 수탈을 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경기상상캠퍼스에 남겨진 서울대 농대의 흔적


이제 옛 서울대 농대에서 옛 권업모범장으로 가볼 차례다. 경기상상캠퍼스 정문(서울대 농업생명과학 창업지원센터 방향)으로 나오면 서호천이 보인다. 서호천길을 따라 북쪽으로 860m쯤 걸으면 축만제다. 수원화성의 서쪽에 위치해서 오랫동안 서호西湖라고 불려 온 저수지다. 국토지리원에서 서호를 축만제로 변경해 고시한 때가 2020년이라서 축만제祝萬堤라는 이름을 어색하게 여기는 시민들이 많다. 그러나 축만제는 정조 때 축조된 이 저수지의 원래 이름이다. 이름에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이 깃들어 있다. 팔달문을 나오면서 이제 정조 없는 수원 여행이구나 했는데 웬걸, 임금은 여전히 동행 중이시다.



축만제 전경, 사진=수원시


정조는 수원화성 동서남북에 네 개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축만제가 서쪽, 만석거萬石渠가 북쪽에 위치하며 남쪽에는 지금의 화성 융릉 근처에 만년제를 축조했다. 동쪽 저수지는 수원시 팔달구 지동 근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만석의 쌀을 생산한다’라는 의미를 지닌 만석거는 축만제에서 3.6km쯤 떨어져 있다. 만석거도 오랫동안 일왕저수지로 불리다가 축만제와 함께 옛 이름을 되찾았다. 만석거가 1795년, 축만제가 1799년 축조되었으니 그 역사는 200년이 훌쩍 넘어 수원화성과 함께 긴 시간을 지나왔다. 저수지가 축조 목적은 모두가 알다시피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해서다. 논밭이 사라진 현재는 다른 숱한 저수지들이 그렇듯 수변에 산책로와 공원이 조성돼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만석거 전경, 사진=수원시


정조시대, 수원화성 바깥은 대부분 황무지를 개간한 둔전屯田이었다. 축만제 일대가 서둔동西屯洞으로 불리게 된 것도 서쪽에 있는 둔전이라고 한 데에서 연유했다. 둔전은 백성과 군이 함께 농사를 지으며 군량을 충당하는 국영농장으로 경작되었다. 그래서 가뭄에 흉작을 피하려면 저수지가 있어야 했다. 즉 축만제, 만석거와 같은 인공저수지 축조는 정조의 신도시 조성에서 중요한 사업이었고 이는 곧 농업진흥을 도모했던 시대상을 보여준다.



국립농업박물관 앞에서 행해진 모내기 행사, 사진=국립농업박물관


정조가 즉위하고 발표한 『경장대고』更張大誥의 핵심은 민산民産, 인재人材, 융정戎政, 재용財用이라는 4대 국가 개혁 과제였다. 이는 곧 수원 신도시 건설의 기반을 이루는 가치이기도 한데 그중 백성의 재산을 풍부하게 한다는 ‘민산’의 축은 결국 농업이었다. 조선시대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천하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며 농업의 발전이 곧 국가의 발전이었다. 1778년(정조 2년)에 제정한 제언절목堤堰節目은 벼농사에 필요한 농업용수 저장·관리 수리시설에 대한 방법과 관련 조항들의 규정을 이른다. 축만제도 이를 따라 축조되었을 것이고 아직도 제방에 남아있는 노송들은 규정에 따라 심은 것들이다.


축만제와 만석거는 관개시설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의 주관으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래서 옛 권업모범장 자리가 어디인가 하면 축만제 바로 옆, 국립농업박물관이다. 박물관은 2022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박물관이 세워지기 전에는 1962년 건립된 농촌진흥청이 있었는데 2014년에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정책에 따라 전북 전주시로 이전했다. 그리고 농촌진흥청의 모태가 바로 1906년 이 자리에 설치된 권업모범장이다. 같은 땅에 농업과 관련한 기관이 100년 넘게 이름과 용도를 달리하며 존재해온 셈이다.




옛 농촌진흥청 경내에 자리한 권업모범장 표석과 초대 장을 지낸 혼다 코스케 흉상 좌대석 


박물관 앞에 자리한 국립식량과학원중부작물부 건물 근처에 권업모범장이라 음각된 경계석이 남아있다. 흉상 없는 좌대도 있는데 본래 흉상의 주인공은 권업모범장장 혼다 코스케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에서는 1904년에 농상공학교 개교를 준비하고 이듬해 실습농장을 뚝섬에 설치하기도 했지만 1906년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해 무산됐다. 그리하여 일본은 궁내부가 관리하던 수원 서둔평을 임차하고 주변 사유지를 매수해 권업모범장을 설치한 것이다. 일제의 잔재는 불편하고 그들의 의도를 두둔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넓게 보면 조선의 농업개혁이 이루어진 곳에 근대적 농업시설이 들어왔으니 농업도시의 명맥은 이어간 셈이다.



국립농업박물관 전경, 사진=국립농업박물관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곳 부지를 감싼 해발 104m의 아담한 여기산 자락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불에 탄 볍씨가 출토되었다. 동시대의 집터도 확인되어 선사시대 때부터 여기산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산에는 대한민국 현대 농업기술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농학자 우장춘 박사의 묘도 있다. 오늘날의 번화한 수원을 농촌이라 할 수는 없지만 농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업도시’라고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수원 신도시를 닦아 놓고 농업개혁을 막 실천하려던 정조가 너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그가 사망한 해는 1800년으로 수원화성이 완공된 4년 뒤다. 그가 더 오래 왕좌에 있었더라면 조선의 르네상스기는 더욱 비옥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수원시 : 캔버스와 캠퍼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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