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실학박물관

추사연합전 <추사, 다시>를 보고

2025-04-30 ~ 2025-10-26 / 실학박물관 기획전시실

실학박물관 추사연합전 <추사, 다시>를 보고


추사 김정희와 현대 타이포그래퍼의 만남, 어떤 일이 펼쳐질까? / 추사 김정희와 현대 타이포그래퍼의 만남... 문자 디자인의 새 지평 확장(문자 조형의 새 가능성 확인) / 추사 김정희의 작품세계, 현대 타이포그래피로 재해석하면... / 실학박물관, 추사 김정희와 현대 타이포그래퍼들의 만남 장 마련 / 김정희의 추사체, 현대 타이포그래피로 재탄생 / 타이포그래피로 재탄생한 김정희의 예술세계, 실학박물관서 만나다 / 실학박물관,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 현대 타이포그래피로 재조명 /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예술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이 전시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이 마련한 기획특별전 <추사, 다시>를 관람한 뒤 든 생각이다. 추사는 전시장을 둘러보며 아마도 기꺼워할 것 같다. 거창하지 않고 소박해 보이는 전시에서 내용상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다. 그 무엇보다 추사를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은 후대 예술가들의 창작 작업으로 보인다. 자신의 작품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 신작을 만들거나, 아예 재해석하고 새롭게 변주해 내는 현대 작가들을 보면 얼마나 뿌듯할까. 죽음을 앞둔 추사는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칠십 년을 사는 동안 벼루 열 개를 구멍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칠십년 마천십연 독진천호). 얼마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면 그 많은 벼루와 붓이 닳아 없어질까.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 만큼 학자와 예술가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추사가 남긴 붓 7자루, 벼루 3점, 작품에 찍은 인장 등 유품 일부가 전해진다. ‘김정희 종가 유물’(보물)이란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이 유품은 추사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벼루와 붓을 닳아 없앤 만큼 추사는 여러 명작을 남겼다. 조선 후기 문인화를 상징하는 ‘세한도’(국보)를 비롯해 난초 그림 ‘불이선란도’와 ‘난맹첩’, 독창적 추사체의 ‘침계’와 ‘묵소거사자찬’ ‘대팽고회’ ‘차호호공’(이상 보물)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추사체는 서예사, 문자 조형예술에서 빛난다. 한국 문화예술에 큰 영향을 끼친 그의 작품들, 추사체의 뿌리에는 실학 정신이 녹아 있다. 문장을 짓고(시) 글씨를 쓰고(서) 그림을 그리는(화) 시서화가로서 ‘옛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 ‘객관적 사실과 철저한 고증을 강조’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정신과 태도를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어린 시절 실학의 대가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신 추사는 금석학자이기도 했다. 서울 북한산 비봉에 1000년을 넘게 서 있던 정체 모를 비석이 ‘신라 진흥왕 순수비’(국보)임을 밝혀낸 것도 추사다. 실학박물관이 실사구시, 법고창신이라는 실학 정신의 현재적 의미와 가치를 밝혀내는 추사를 조명하는 일은 의미 있다. 실학 정신은 학자, 예술가 등 오늘을 사는 모두에게도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실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추사, 다시>전은 추사체를 중심으로 추사의 삶과 예술세계를 문자 조형예술, 현대 타이포그래피 관점에서 조망한다. 추사를 주제·소재로 한 전시가 많지만 <추사, 다시>전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대중적으로 익숙한 캘리그래피를 포함해 여러 분야로 나눠진 타이포그래피는 현대 디자인에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타이포그래피 시각에서 보면, 추사체는 법고창신으로 이룬 독창적 서체다. 파격적인 문자 조형예술이며, 추사는 전위적 타이포그래퍼다. 석재원 홍익대 교수가 전시 총괄을 맡은 <추사, 다시>전에는 추사의 작품과 현대 작가 작품들이 함께 선보인다. 현대 작품은 추사에게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작가만의 독창성, 동시대적 감각을 더한 신작들이다. 강병인, 김현진, 양장점, 함지은, DDBBMM 등 5명의 ‘핫’한 창작자들이 참여했다. 추사와 현대 작가들의 만남 현장인 전시는 문화유산인 추사 작품과 현대 작가 작품을 한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다. 추사 작품세계를 타이포그래피 시각에서 살펴보고, 현대 디자인에서 중요한 타이포그래피 등 문자 조형예술 전반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다.







전시장에는 영인본 ‘세한도(歲寒圖)’와 ‘잔서완석루(殘書浣石樓)’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사야(史野)’ ‘유희삼매(遊戱三昧)’, ‘난맹첩’ 일부(이상 복제본) 등의 추사 작품이 나왔다. 또 ‘소봉래난(小蓬萊蘭)’, 추사 제자 허련 작품으로 보이는 ‘김정희 초상화’(이상 실학박물관 소장)도 있다. ‘세한도’는 1844년 제주도에 유배 중이던 추사가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 수묵화다. 우선의 변치 않는 의리를 공자의 <논어> 중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구절에 빗대 표현한 문인화다. 추사는 제목 옆에 ‘우선 보아라’는 ‘우선시상(藕船是賞)’을 쓰고, 오른쪽 아래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도 찍었다.‘세한도’는 원래의 그림에 당대와 후대 문인들의 감상 글 22편이 덧붙여져 길이 14m에 이르는 두루마리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동안 보기 힘들던 14m 전체를 즐길 수 있다.


현대 작가는 ‘세한도’에서 어떤 예술적 영감을 얻고, 어떻게 작품으로 재해석했을까. 한글 멋글씨(캘리그래피) 대가인 강병인은 작품 ‘늘 푸르른 솔’을 선보인다. ‘참이슬’ ‘열라면’ 등의 제품과 ‘대왕 세종’ ‘미생’ 등의 드라마 제호로도 유명한 작가다. 강 작가는 훈민정음 창제 원리를 바탕으로 창작한 ‘솔’ 자를 통해 ‘세한도’에 담긴 스승과 제자의 지극한 마음을 표현한다. 무심히 지나치는 한글의 글자 하나하나가 기록과 정보 전달이라는 기능을 넘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조형 예술로 진화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추사체의 특성을 한글로 풀어낸 강 작가의 ‘잔서완석루’는 한글이 지닌 다양한 조형 가능성을 보여준다.



추사의 ‘사야(史野)’는 힘찬 필획과 두 글자의 어우러짐이 돋보인다.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사야’에는 형식과 내용, 겉과 속, 공식적 역사와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등 상반되는 것이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뜻이 담겼다. 추사의 글쓰기, 학문 태도의 하나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 삶에 있어서 중요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추사가 170여 년 전 쓴 ‘사야’를 북 디자이너 함지은은 책 ‘사야’로 재탄생시켰다. 면마다 다른 서체, 색감 등으로 사와 야의 충돌과 균형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담아냈다. 추사의 ‘사야’와 함지은의 ‘사야’를 한눈에 담아보면, 옛것이 이렇게 재해석되어 현대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구나 실감한다.







전시장 한쪽에는 글자인 듯 그림인 듯 글자와 그림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이 공중에 내걸렸다. 글자를 만들고 디자인하는 레터링 디자이너 김현진의 작품 ‘유희삼매’다. 김 작가의 ‘유희삼매’는 ‘그 어떤 것에도 걸림 없이 자유자재로 노니는 경지’를 뜻하는 추사 작품 ‘유희삼매(遊戱三昧)’에서 나왔다.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치열한 과정을 거쳐 도달한 자유와 해탈, 관조의 경지가 유희삼매다. 김 작가는 한글 유, 희, 삼, 매를 틀에 박힌 글자가 아니라 생명체처럼 자유롭게 노닐도록 했다. 추사의 ‘유희삼매’가 그렇듯 김 작가의 작품도 읽는 게 아니라 보고 느끼는 것으로 다가온다. 추사의 ‘불이선란도’는 불교 선(禪)의 경지와 난초로 대변한 그림의 이치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을 품고 있다. 난초는 그림의 화법이 아니라 서예의 필법으로 그려야 한다는 추사의 예술관을 명확히 드러낸 작품이다. 추사는 스스로 그림에 만족한 듯 특별히 4건의 글을 화면에 쓰고 인장을 찍었다.



양장점이란 이름 아래 활동하는 라틴 알파벳 디자이너 양희재와 한글 서체 디자이너 장수영도 ‘불이선란도’를 재탄생시켰다. ‘불이선란도’에서 그림과 서예의 뿌리는 하나라는 동양의 서화론인 서화동원(書畵同源)을 떠올린 것이다. 양장점은 서화동원을 평면적 글자 디자인과 입체적 글자 형상의 뿌리가 같다는 자형동원(字形同源)으로 재해석하고, 입체 작품 ‘자형동원’을 선보인다. 글자의 입체적 조형성을 강조한 작품은 평면을 뛰어넘는 입체적 글자 조형의 효과를 관람객에게 보여준다.










추사는 수많은 인장(도장)을 사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정희인’ ‘추사’ ‘완당’ ‘소봉래’ 등 200과가 넘는다. 아예 추사 인장 101과를 찍어 모아 놓은 ‘완당인보(阮堂印譜)’ 등 여러 인보까지 전해진다. ‘김정희 종가 유물’에도 추사의 인장 31과가 있다. 옛 서화가들에게 인장은 단순한 도장이 아니다. 돌이나 옥, 나무, 금속에 글자와 그림을 조각해 인장을 만드는 전각은 당당하게 ‘방촌(좁은 공간)의 예술’로 평가받았다. 인장은 실용품이기도 하지만 조각과 필력, 정신세계가 어우러져 좁은 공간에 밀도 높은 조형적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예술품이었다.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인 DDBBMM의 김강인·이윤호 작가는 추사의 인장을 주목해 추사가 신문물 고무도장을 접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딱딱한 재료에 새기는 전각과 달리 고무도장은 더 유연한 표현이 가능하다. DDBBMM은 추사 작품들에서 문구를 발췌해 고무도장을 만들고 또 찍어냈다. 시서화에 인장까지 포함한 설치작품 ‘시서화인’은 색다르고 신선한 시각 체험을 선사한다.


<추사, 다시>전은 추사의 정신적·물질적 유산을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다시 보는 전시회다. 법고창신, 실사구시의 정신과 태도로 이 시대의 새로운 문화예술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다. 전시장을 나서면서 추사 작품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산의 중요성, 그것들이 품고 있는 무한한 힘을 새삼 떠올렸다. 문화유산은 시공을 넘어 재해석, 변주해도 끝을 보이지 않는 보물창고, 무궁무진한 화수분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실학박물관의 <추사, 다시>전은 과천시 추사박물관, 제주 추사관과의 연합전이다. 지역 문화예술 기관의 연합전은 지역 간 협력 강화는 물론 문화교류 활성화, 지역 주민의 문화향유권 향상, 다양한 관점 제공 등 여러 긍정적인 요소를 갖는다. 유구한 역사 속에 전해지는 다양한 유산을 지역 문화예술 기관들이 저마다의 다채로운 시각에서 살피는 작업은 이 시대 우리 문화를 풍성하게 한다. 최근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K-컬처’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 실학박물관 김필국 관장은 “이번 전시는 전통 문화유산을 현대적 디자인 언어로 확장하고자 하는 경기문화재단의 시도, 지난 기획전 ‘그림으로 다시 쓰는 자산어보’의 큰 성과를 기반으로 마련했다.”며 “현대 작가들의 신작을 통해 김정희의 예술세계가 어떻게 재해석되고, 현대 타이포그래피가 어떤 새로운 형식·내용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 살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추사, 다시>전은 10월 26일까지 이어지며, 관람료는 무료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로에 자리한 실학박물관은 실학자들의 삶과 실학 정신을 전시와 체험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만나는 역사박물관이자 복합문화공간이다.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수도권의 최대 상수원인 팔당호를 끼고 있는 실학박물관은 다산 정약용 유적지, 다산생태공원과도 접해 역사와 문화, 자연생태가 살아 숨 쉬는 힐링의 나들이 장소로도 제격이다. 바람결에서 가을이 느껴지는 계절, 한 번쯤 실학박물관 나들이를 권한다.


글 도재기 / <발굴과 발견> <국보 역사로 읽고 보다>의 저자,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문화부장.


세부정보

  • 실학박물관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로747번길 16

    운영시간/ 오전 10시 ~ 오후6시

    휴관/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관람료/ 무료 관람

    대표번호/ 031)579-6000~1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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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실학박물관은 실학 및 실학과 관련된 유·무형의 자료와 정보를 수집·보존·연구·교류·전시하며 지역 주민에게 교육과 정보,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다목적 차원의 문화복합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건립한 국내 유일의 실학관련 박물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