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실학박물관

중국 북경&열하 답사기

2018-05-28 ~ 2018-06-01 / <열하일기>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 북경&열하 답사기

<열하일기>의 발자취를 따라 



이 글은 실학박물관에서 8월부터 시작될 체험전시 ‘박지원과 청나라 여행’ 준비를 위한 중국북경과 열하기행기다. 4박5일(5월28일~6월1일)의 일정으로 북경을 거쳐 고북구를 지나 열하까지 답사했다. 시간의 흐름을 기록했으며, 현지에서 들은 내용들은 그곳 가이드가 전해주었거나 패널에 적혀있던 내용으로 정확한 고증을 거치지는 않았다.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칠순잔치 축하를 위해 떠났던 연행길에서 연암 박지원 선생이 보고 느낀 감동을 고스란히 느껴보고자 가능하면 “열하일기”의 노정을 따르려고 했다.



2018년 5월 28일(월)



남천주당




2018년 5월 28일 드디어 우리 일행은 오전 8시 20분에 출발하는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과연 238년 전 이곳을 방문하여 새로운 문물을 보고 충격에 빠졌던 연암 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당시 연행단이 67일 만에 도착한 이 길을 우린 비행기로 날아와 1시간 30분 만에 도착 했다.

우리 일행은 제일먼저 북경 고관상대로 향했다. 북경시내에 있는 열하일기와 연관이 있는 유적지를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휴관인 탓에 관리인의 안내로 밖에서 둘러보는 것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연암 선생도 올라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고 했는데 우리도 결국 밖에서만 보다니. 혹시 다시 올 기회가 생긴다면 휴관일을 잘 기억해 두리라.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멀리서 옥상에 전시되어 있는 천문기구들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발길을 돌렸다.

이어 남천주당으로 향했다. 연암 선생은 천장에 그려진 그림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원근법을 사용하여 그린 입체적인 그림을 보며 그림 속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는 표현을 했었는데 그때의 그런 사실적인 그림은 볼 수 없었으나 마당의 커다란 나무들과 외관은 그대로인 듯하다.



마태오리치 묘소



마태오리치의 묘소를 보기 위해 북경 시내의 한 행정학원을 찾았다. 교내가 잘 가꿔져 있었으며 일반인들에게 자유롭게 공개되어 가족단위의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 학교의 이념이 “실사구시’인 듯 커다란 돌에 새겨져 있다. 이곳은 장차 북경시 공무원이 될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한다. 외국 선교사와 마테오리치의 묘소가 이 교정 안에 있었다. 잘 정돈된 묘소 앞에서 그를 추모하고 우린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겼다.

유리창. 그곳엔 지금도 예전처럼 문방사우와 골동품 가게 들이 문을 열고 있었다. 단층이나 2층으로 지어진 전통양식의 건물이었는데, 당시에는 많은 가게와 사람들로 붐볐다고 했다. 조선 학자들이 연경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던 곳이었다는데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그때의 흔적을 느껴볼 수가 없었다. 문화와 예술가, 지식인들이 교류하던 유리창에서 오늘날 우리가 느낀 건 손님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대하는 상인들의 모습이었다. 벼루와 붓을 살려고 흥정하다가 그만 카드 사용이 어려워 포기하고 말았다. 결국 우린 아무것도 못 사고 유리창을 뜨고 말았다.



2018년 5월 29일(화)


수레바퀴모양 벤치



아침 5시 기상. 6시 30분부터 간단하게 준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가 조식을 먹었다. 한국 관광객이 무척 많았는데, 간밤에 옆방에서 들리던 한국말은 타지의 불안감에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8시 30분 호텔을 출발하여 열하로 달렸다. 박지원 선생 일행은 도중에 마부 창대가 그만 말발굽에 발을 밟혀 더 이상 말을 몰수가 없게 되면서 직접 말을 몰아 무박 4일을 달렸다고 했다. 바로 여정이다. 산길을 뚫어 만든 길은 잘 정돈된 고속도로다.   


황제의 길



고북구의 패루



  먼저 도중에 있는 고북구에 들러 만리장성에 올랐다. 새롭게 조성된 성이라 옛 정취를 살리기에는 다소 세월의 여백이 느껴졌으나 만리장성처럼 높은 곳에서는 쳐들어오는 적들을 관망하기에 충분했으리라 짐작된다. 연암 선생님은 만리장성 한 모퉁이에 “건륭 45년 8월 7일 밤 조선사행 박지원 이곳을 지나다”라고 쓰며 한바탕 웃었다고 했다. 어디쯤엔가 연암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두리번거리기도 했으나... 238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 습쓸한 미소를 지어본다. 만리장성 오르는 길에 본 수레바퀴 모양의 벤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실학박물관 로고가 수레인 탓인지 괜시리 더 반갑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도 수레가 문명의 발달에 공헌한 바를 기려 상징적으로 활용된 것 같았다.

 만리장성을 내려와 점심식사 후 마을 따라 난 길을 오르니 허물어져가는 옛날 토성이 보였다. 만리장성은 그 지역의 자연을 이용해 만들었기 때문에 돌이 없는 지역은 흙으로 성을 쌓았단다. 무너진 집터에서 기와조각도 줍고 돌도 주었다. 산에서 내려와 마을길을 따라 내려오니 일야구도하기의 배경이었을 법한 강이 나왔다.

 오랜 가뭄으로 연암 선생이 지나던 그때처럼 세찬 강물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편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도 변변한 길도 없었던 시절, 밤에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났을 조선의 사행단을 떠올려 보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도로를 건너 패루를 지나 마을로 들어가니 깔끔하게 잘 가꾸어진 한적한 시골 동네가 나왔다. 위로 올라가니 사당이 나오고 그 위로 복원되지 않은 만리장성을 밟아 볼 수 있는 유료 체험지가 나왔다. 옛날 황제가 지나던 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 길을 통해 건륭황제도 연경에서 열하로 갔구나! 우리도 다시 열하를 향해 달렸다.

  열하에 도착하니 이미 입장 시간이 지나버려 경추봉을 못보고 피서산장 근처 호텔에서 여정을 풀었다. 오래된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한 것 같은 아담한 호텔이었는데 방은 작았지만 깔끔한 실내가 마음에 들었다.



2018년 5월 30일(수)


피서산장 후원

열하일기 표지석


7시에 조식을 끝내고 8시 호텔을 나와 피서산장으로 향했다.

피서산장 옆 공원에는 한국 모 여행사 사장이 세웠다는 연암 선생 추모비가 있었다. 한자와 우리말로 되어있었는데 한자로 된 글자에서 박지원의 ‘朴’이 아니라 ‘模 ’자처럼 보였다. 오자인가? 확인을 할 수 없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행렬을 따라 관광안내를 들으며 피서산장을 둘러보다 일행들과는 시간 약속을 한 후 개인적인 볼거리를 찾았다.

 우리 조선의 사행단도 밟았을 바닥의 옥돌을 밟으며 건륭황제 당시의 건물 기둥을 한번 안아보았다. 피서산장이라고 쓰인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뒤뜰 후원에서는 당시 말도 타고 사냥도 했다는데 지금은 잘 가꾸어진 정원 한 켠에 목단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점심식사 후 어제 못 본 경추봉으로 향했다. 안전망도 설치되지 않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불안했지만, 열하시내 어디서나 보이던 기이한 경추봉을 드디어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꾹 참았다. 표지판을 보니 ‘신의 엄지손가락’이라고 한다.


티벳사원 깃발들


 다음으로 수미복수지묘와 티벳 사원을 들렀다. 티벳사원은 1780년 연암 선생이 다녀간 해에 지어졌다. 건륭황제는 황금사원에 티벳의 라마를 모셔와 스승으로 받들었는데, 이는 사실 라마승을 궁에 가두어 놓고 당시 골칫거리였던 티벳을 다스리기 위한 술수라고 했다.

 일정상 저녁에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야 해서 우린 5시에 열하를 출발했다.


피서산장 황제 집무실




2018년 5월 31(목)



북경 천안문



자금성 내 방화용 물항아리



다시 북경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먼저 자금성으로 갔다. 문으로 들어가니 ‘午門’이란 현판이 보인다. 원래는 ‘高門’이었는데 황제께서 보시고 “나보다 더 높은 게 있더냐?” 하고 역정을 내어 곁에서 신하들이 다급하게 “‘天門’이라 함은 어떻겠습니까?” 라고 고하니 더 큰 역정을 내어 “감히 내 위에 하늘이 있단 말이냐” 하자 어쩔 줄 몰라 하던 차에 무심코 한 신하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해가 중천 떠 있는 것을 보고 “그럼 午門이라고 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좋다” 하여 오늘의 午門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황제의 집을 둘러보았다. 당시 자금성을 보고 사행단들이 받았을 충격이 감히 짐작된다.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이 거대하였다. 황제만이 지날 수 있었던 길에 새겨진 조각들, 난간 하나하나에도 대륙의 거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자금성 안에서도 비리와 배신은 존재했다. 어느 날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싶었던 황제는 가장 신뢰하던 한 신하에게 수천 톤의 금을 들여 금수조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수조는 완성이 되었고 잘 만들어진 수조를 보며 황제는 기뻐했다. 세월이 흐른 후 청나라에 서구 세력들이 침입하여 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수조도 가져가려 했으나 무거워 포기하며 긁어서라도 가져갈 심산으로 열심히 긁었는데 얼마를 긁자 구리가 나왔다고 한다. 지금도 긁은 흔적이 남아있다.

건륭황제가 피서산장에서 머물렀던 이유가 피서보다는 주변 북방세력들을 견제함이 더 큰 목적이었다고 했는데 오늘 와서 보니 피서의 목적도 컸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주변이 온통 돌로 만들어진 자금성은 밤에도 식지 않고 불덩이 같은 열기가 남았을 테니 한여름을 자금성에서 견디기는 여간 어려웠을 것이다. 천안문 광장을 거쳐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예전 심양에서 보았던 요녕성고고학박물관이 떠올랐다. 이미 그때 어마어마한 규모의 박물관을 경험한 탓인지 거대함에 짓눌리지는 않았다. 박물관 1층 로비에도 상징처럼 수레가 있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1층은 상설전시실 위주였고 2층은 기획 전시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2~3개의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규모나 전시 기법에 자연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거대함을 체험한 하루였다.



2018년 6월 1일(금) 


북경전적박물관 직원들과 업무회의 하는 모습 



전적박물관 기획전 '갑골문자'


답사 마지막 날 서둘러 북경 시내에 있는 국립국가도서관으로 가니 마침 서예전 개막식을 하는 날이라 로비에 손님이 많았다.전적박물관은 국립국가도서관 내에 있었다. 국제교류 담당자를 만나 서로의 입장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교류의 물꼬를 트자는 약속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획전으로 ‘갑골문자’전을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수호지’ 전시도 흥미로웠다. 책의 내용을 가지고 만든 전시라는 점에서 지금 우리 실학박물관에서 준비 중인 체험전 ‘열하일기’와 연관성이 있을 것 같아 눈여겨보았다. 전시 해설을 하고 있었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서둘러 전시 관람을 마치고 공항근처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비행기 출발 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이동 했다.



중국 국가 도서관



북경 공항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천문기구



공항 내부에 천문기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중국은 곳곳이 전시장 같았다. 긴 듯 짧은 듯 했던 4박5일간의 열하일기 답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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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중국 북경&열하 답사기

    / 정춘옥(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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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 http://silhak.ggcf.kr

    이용시간/ 10:0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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