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시흥 대야동 소래산과 천년불

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만난 마애보살입상


갯골과 들판을 지나 산에 닿았다. 산 이름이 소래가 아니었으면 조금 아쉬울 뻔했다. 소래산은 시흥의 진산鎭山이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관아의 동쪽 20리에 있는 진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발고도는 299m로 우리나라 산 평균 해발이 482m인 점을 감안하면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시흥에서는 가장 높고 가장 인기 있는 산이다.




소래산에는 비수기가 없다. 사계절 내내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아침은 물론 저녁에도 일몰 구경하러, 야간 산행하러 간다. 가까운 데 사는 시민들에겐 등산이라기보다 산책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시흥산림욕장에서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 소래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을 거쳐 정상에 닿는 길이다. 소래산은 사람이 많이 찾고 시흥과 인천에 걸쳐있는 진산임에도 고찰古刹이 없다. 소래산을 벗어나 시흥시로 범위를 확장해도 오래되거나 이름난 절은 없고 소래산 안의 유일한 사찰인 내원사는 1973년에 창건되었다. 그렇기에 나름 산의 위신을 세워줄 만한 불교 유산이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이다.


산림욕장에서 마애보살입상까지는 700m, 마애보살입상에서 정상까지는 400m 정도로 총 1.1km 구간이다. 등산 초보자에게도 추천할 만한 등산로다. 산림욕장에서 청룡약수터까지 300m는 다소 경사가 있는 오르막이고, 약수터에서 마애불까지 400m는 완만한 산길이다. 소래산 산림욕장은 철쭉 군락이 유명하다. 매년 봄이면 진분홍색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내가 찾았을 땐 여름이라 저마다 다른 채도의 초록이 무성했다.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에 가까워지자 등산로 곳곳에서 검은 기와 조각들이 보였다. 산에서 기왓장이 여럿 보인다면 절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공들여 새긴 마애불이 있으니 분명 절도 있었을 것이다. 마애불 앞에는 널찍한 목재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데크 난간에는 여러 개의 매트가 걸려 있고 여러 보살과 거사들이 법당 안처럼 매트를 깔고 마애불을 향해 삼보를 올렸다. 지난 천 년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을까.


암벽을 언뜻 보면 부처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시선이 바위 전체에 차분하게 머물러야 비로소 보인다. 멀리서 보거나 대충 보면 한낱 바위지만 가까이서 가만히 바라보면 부처다. 바라보는 행위만으로 수행처럼 느껴지는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은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이다.





고려시대의 마애불은 전국에 존재하지만 그 많은 마애불 중에서도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은 높이 14m의 거대한 크기와 보기 드문 조각기법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은 국가 보물이다. 고려시대 수준급 장인의 작품일 것이다. 이토록 단단한 화강암을 캔버스 삼아 마치 붓칠하듯 선각(線刻)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천년의 풍화로 형상은 다소 흐릿해졌지만 머리 보관부터 발끝 연꽃대좌까지 화려하고 섬세한 선을 확인할 수 있다. 머리의 화사한 보관은 위가 좁은 원통형이며 당초문(唐草紋, 덩굴풀 무늬)으로 장식되어 있다. 원통형 보관을 쓴 마애불은 고려시대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당초문으로 장식한 예는 소래상 마애불이 유일하다. 둥근 얼굴 속 눈, 코, 입은 부리부리하고 양쪽 귀는 눈에 띄게 늘어나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 불상의 목에 가로로 표현된 세 줄기 주름)가 둘려 있고 옷자락은 단순하지만 부드러운 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근엄하면서도 우아한 인상이다.




소래산 마애보살입상은 시흥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파트단지가 8할을 차지하는, 조금은 삭막한 풍경이다. 마애불이 내려다보는 속세는 천 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근 20~30년간의 변화는 대단히 역동적이고 강렬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풍경이 달라져도 아랫녘에서 마애불을 찾아 산을 오른 이들의 마음이야 편차 없이 간절하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소래산이 있어서, 변치 않는 마애불이 있어서 삶의 위안을 얻는 이들이 언제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테다.




마애보살입상에서 15분 정도만 더 걸어 오르면 소래산 정상이다. 산 아래에서 마애불에 이르기까지는 풀숲이 우거지고 발에 닿는 땅의 느낌도 적당히 탄력이 돌아 육산肉山인가 싶은데, 막상 정상에 가까워지니 암석과 큰 바위들이 많아 골산骨山인가도 싶다. 화가 나거나 외로움에 사무치면 육산으로, 기운이 빠지거나 정신수양이 필요하면 골산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소래산은 하나로 규정할 수 없이 복합적인 성질을 지닌 듯하다. 그 성질은 시흥시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친근한 동네 뒷산으로 두루두루 모두를 품어주는 산임은 분명하다.




마애불 앞에서 시흥과 부천, 서울 일부만 보였던 전경은 정상에서 인천 시내와 소래포구, 서해 먼바다까지 확장된다. 동서남북 사방이 탁 트인 정상이다. 해발이 낮고 등산이 쉬운 편인데 비해 여느 산 부럽지 않은 광활하고 근사한 전망을 선물해 주니, 아량이 넓은 산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시흥시 : 소래, 소금, 호조, 조개>에서 발췌했습니다.



글쓴이
걷고쓰는사람
자기소개
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누리집
https://www.youtube.com/@yooseungh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