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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_Celebrity's Space: ‘죽어서 용인’은 살아 있다

선현들의 묘역을 돌아보는 특별한 용인여행

김학민 | 음식칼럼니스트


경기도 용인과 충북 진천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염라대왕이 저승사자를 시켜 명이 다한 용인의 아무개를 데리러 보냈는데, 잘못하여 이름이 같은 진천의 아무개를 끌고 왔다. 놀란 염라대왕이 진천의 아무개를 다시 세상으로 내려보냈지만, 이미 장례가 끝나 그의 육신은 썩어가고 있었다. 염라대왕은 할 수 없이 막 죽은 용인 아무개의 시신 속으로 진천 아무개의 혼을 들여보냈다. 그렇게 하여 죽었던 진천 아무개가 용인 아무개의 육신을 빌려 남은 생을 더 살았으니, 여기에서 ‘살아서 진천 죽어서 용인生去鎭川 死 去龍仁’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서 비롯된 그럴듯한 풍수 속설도 있다. 진천은 살아가기에 좋은 땅이고, 용인은 죽은 후 묻힐 묏자리로 좋다는 것이다. 삼천리강산에서 진천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용인은 서울에서 가까운데다 지형이 비산비야非山非野인지라 묏자리로 크게 선호되고 있음은 사실이다. “조상의 묏자리를 잘 쓰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 는 음택풍수陰宅風水의 ‘믿음’에 따라 용인이씨, 해주오씨, 영일정씨, 경주김씨 등의 선영이 용인 도처에 자리 잡고 있고, 풍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수그러든 요즈음에도 성공한 기업가나 유명 정치인들의 가족묘가 용인으로 몰려들고 있다.


죽음은 한 개인의 유한한 육신의 멸절임에 틀림없지만, 그 개인의 죽음 전의 삶에 따라 후세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무한한 정신적 유산을 남기기도 한다. 용인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선현들 중에는 나라와 겨레에 충절을 바치다가 목숨을 잃은 분들, 봉건정치를 개혁하여 백성의 삶을 고양시키고자 노력한 분들이 여럿 있다. 기발한 묘비명과 독특한 묘지의 조형미를 보기 위해 공동묘지를 기행 코스로 넣는 유럽여행도 있는 것처럼, 어차피 ‘죽어서 용인’이라는 브랜드가 회자되고 있다면 이러한 분들의 묘역을 돌아보는 용인여행도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55-1에는 조선 중종 때 도학정치를 주창하며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파의 반발을 사 죽임을 당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묘와 노수신盧守愼이 글을 짓고 이산해李山海가 글씨를 쓴 정암의 신도비(경기도기념물 제169호)가 있다. 그리고 묘에서 3백여 미터 떨어진 곳(상현동 203-2)에는 정암 선생을 배향하는 심곡서원深谷 書院(경기도유형문화재 제7호)이 있다.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산36에는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자 이에 항의하여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1905)의 묘(경기도기념 물 제18호)가 있다. 공이 순국한 이후 봉분 없이 초라하게 모셔졌던 용인군 수지면 토월리 의 묘를 1942년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지키려다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으로부터 철퇴를 맞고 죽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의 묘(경기도기념물 제1호)도 용인에 있다(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산3). 이 묘 바로 옆에는 동방성리학의 조종인 포은 선생을 배향하는 충렬서원 忠烈書院(경기도유형문화재 제9호)이 있다.


정조의 최측근으로 정치 개혁에 앞장섰던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묘(경기도 기념물 제17호)는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에 있다. 이 묘의 우측 산기슭에는 번암 선생의 장례일에 정조가 친히 지어 보낸 제문을 새긴 뇌문비誄文碑(경기도유형문화재 제76호)가 있다. 이 밖에 주자학을 뛰어넘는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국가 체제의 전면적 개혁을 꿈꾼 반 계磻溪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묘(경기도기념물 제32호)가 용인시 백암면 석천리 산28-1에 있다.


심곡서원


충렬서원


심곡서원 조광조 묘소


세부정보

  • 심곡서원

    주소/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 심곡서원유형문화재7호

  • 충렬서원

    주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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