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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_Celebrity's Space : 경기창작센터에서의 추억

김훈 | 소설가


나는 2010년 여름부터 2011년 여름까지 경기창작센터 숙소동 203호에서 일했다. 그 방은 햇살이 깊이 들어와서 밝았고 따스했다. 연료를 태우는 난방의 온도와 햇볕의 따스함 은 어떻게 다른가. 숙소동 203호에 가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햇볕의 따스함은 세포에 스미고 호흡에 빨려 들어와서 창자 속까지 따스하고 밝아진다. 햇살이 좋은 날, 그 방에서 나는 벌거벗고 햇볕을 쪼였다. 나는 나무나 풀이나 병아리나 물고기로 변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서, 나는 많이 놀고, 조금씩 일했다. 내 방에는 사전 세 권과 작은 책상, 걸상, 전기스탠드, 이부자리, 냉장고가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냉장고 안에는 물, 옥수수, 감자, 달걀, 소금, 소주 몇 병이 들어 있었다. 나는 옥수수와 감자를 쪄서 아침을 먹고 점심밥이나 저녁밥은 산책길에 마을에서 사 먹었다. 나는 많이 먹지는 않았고, 배가 조금 고픈 상태를 오래 유지했다. 배가 좀 고프면, 사물이 똑똑히 보이고, 더 고파지면, 먹지 않아도 음식의 맛이 선명히 느껴지는데, 이때의 맛은 헛것이지만 분명하다.  


203호 유리창 밖에는 키 큰 나무들이 서 있어서, 방 안에 앉아서도 계절을 데리고 다니는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 꼭대기에 까치들이 내려앉아서 나를 향해 짖어댔는데 그중에서 어떤 한 놈은 나를 특별히 알아보고 점심때마다 찾아와서 깍깍거렸다. 새벽에 닭은 목청을 세 번씩 꺾어 올리면서 울었는데, 한 마리가 울면, 이웃집 닭이 깨어나서 울었고, 닭 울음소리가 바닷가 마을을 따라 이어져서 거기에 내 이웃들이 살고 있음을 알렸다.  


나는 주로 혼자서 놀았다. 혼자서 서너 시간씩 갯벌 쪽으로 걸었고, 먼 마을들과 산꼭대기로 쏘다녔다. 마을의 개들이 나를 알아보고 다가와서 손등을 핥았다. 나는 사람이나 개나 다 같은 포유류의 자식으로, 한집안의 먼 친척임을 알았다. 나는 찐 감자를 개에게 주었는데, 어떤 개는 냄새만 맡고 먹지 않았다. 개에게도 식성이 있다.


창작센터 앞쪽에는 넓은 포도밭이 있고, 작은 논도 있었다.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포도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포도는 씨알이 굵고 향기로웠다. 햇빛과 대지와 비바람의 힘이 그 향기 속에 살아 있었다. 나는 하루에 포도를 네다섯 송이씩 먹어서 어금니가 시큼시큼했다. 포도밭 옆 언덕 위에 작은 성당(공소)이 있었다. 일요일에 읍내 본당에서 젊은 신부가 와서 미사를 드렸다. 늙은 주민 대여섯 명이 미사에 왔다. 종 칠 사람이 없어서, 종에 자동장치를 걸어서 때가 되면 엔젤루스를 쳤다. 빈 마을에 종소리가 퍼져 나갔다. 나는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맨 뒷자리에 앉았다. 별 소원은 없었고, 나는 날마다 무사하기를 기도했다.



포도밭은 바다와 닿아 있었다. 그 마을 바다는 밀물 때는 뚝방에 가득 찼고 썰물 때는 수평선 너머로 물러갔다. 가득 차고, 또 아득히 먼 바다였다. 썰물 때는 그 수평선 쪽으로 어업도로가 드러났다. 저녁 썰물 때 나는 어업도로의 맨 끝까지 걸어갔다. 왕복 두 시간이 걸렸다. 어업도로의 맨 끝에서 날이 저물고 어두운 갯벌에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우주공간에 홀로 서 있는 자의 자유가 느껴졌다.

모든 언어와 개념이 허물어져 내리는 자유였다. 그 자유는 무섭고 난감했다. 나는 무서워서, 밀물보다 빠른 걸음으로 갯벌을 빠져나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사전 몇 권과 아무 글자도 쓰지 못한 원고지가 놓여 있었다.


하늘이 맑아서 노을이 좋은 날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누에섬, 탄도방조제, 마산포선창, 시화갯벌, 불도, 어도, 전곡항을 쏘다녔다. 간척지는 넓고, 눈에 걸리는 것이 없어서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나는 먼 산봉우리나 풍력발전소 날개를 지표로 삼았다.


전곡항 하버프론트 카페 옥상 위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크고 깊었다. 노을은 모든 색이었다. 색들은 시간과 더불어 태어나고 또 죽었다. 죽음과 삶을 잇대어 가면서 색들은 끊임 없이 생멸했고 어둠 속으로 잠겼다. 색들은 시간 속에서 흘러갔다. 색들은 생로병사와 같았고, 창세기의 빛과 같았으며, 바람처럼 흘러 다녔다. 색들은 시간과 공간 속으로 스며서, 이 세계의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경기창작센터에서 머물며 나는 늘 너무 놀아서 저녁에 방으로 돌아오면 기진맥진하였다. 나는 원고지 서너 장을 쓰고 자리에 누워서, 내일은 또 뭘 하며 놀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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