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나로소이다

화성_윤석남 작가의 작업실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윤석남 작가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그림을 시작했다. 1980년대 초 작가로 활동하기로 계획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공부했다. 1982년 서울 미술회관(현 아르코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국, 일본, 중국 등 국내외에서 활발한 전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96년 제8회 이중섭 미술상, 1997년 국무총리상, 2015년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영국 테이트갤러리, 일본 후쿠오카미술관, 타이완 타이페이 미술관, 경기도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 여성사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있다.






나라는 존재, 즉 자아는 인류의 사고가 기록되기 시작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힌 개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찾아오는 까다로운 손님인 셈이다. 자아의 문제가 인간 공통에게 던져지는 질문이긴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자아는 실존의 문제가 된다. 예술을 하는 예술가의 실존뿐 아니라, 예술 자체의 실존이 자아와 연결된다. 여기서 예술가인 내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래서 내가 없다면 그것을 수행하는 예술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가에게 자아는 중요하다는 표현을 넘어 예술을 가능케 하는 전제가 되곤 한다.


마흔 줄에 들어선 어느 날 ‘갑자기’ 미술을 시작한 윤석남 작가에게도 ‘나’는 풀어내야만 하는 문제였다. 당시 여느 가정주부와 다름없는 일상을 영위하던 중에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강렬한 물음은 다름 아닌 자아에 대한 것이었다.


“정말 그랬어요. 집안에 우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몸이 아프거나 가세가 기울거나 한 것도 아니었어요. 서른여섯 살이 되었을 때였나. 정말 이대로 그냥 가정주부로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거예요. 나는 누구인가. 윤석남이라는 이름 석 자를 지닌 이 존재는 무엇인가. 그래서 뭐라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무제(Untitled)〉, 160×110㎝, Oil on Canvas, 1982




무의식 속에 스며든 무엇


삶의 길고 짧음과 관계없이 문득 걸어온 시간을 되돌아볼 때, 그 시간 안에는 나름의 높낮음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디게 넘기는 순간이 어떤 이에게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무언가를 해야겠다. 그림을 그리는, 그 무언가를 해야겠다.’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이 윤석남 작가에게 찾아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윤석남 작가는 줄곧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실제로 중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글을 써서 여러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소설가,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작가의 아버지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은 바도 있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즐겨 읽으며 공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던 어머니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가 되면 좋겠다는 막연한 꿈을 꾸기도 했지만, 이내 어려웠던 집안 사정 때문에 그 꿈도 접어야만 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이후 홀로 6남매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단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를 끝마쳐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졸업을 하고, 몇 년 새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이십 대 후반, 결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부족함이 없는 결혼 생활이었지만 작가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욕구가 차올랐다.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해,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표현하고 싶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을 거듭하던 중에 마음을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게 시작이었다.




“친구랑 동생들, 그렇게 주부 4명을 모았어요. 그리고 시인이었던 박두진 선생님께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죠. ‘길 영(永)’자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4년 동안 그분 밑에서 배웠어요. 제 딴에는 4년이면 어느 정도 서예를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임서(臨書, 글씨본을 보면서 글씨를 씀.)만 하는 거예요. 임서를 하던 중에 내 마음 가는 대로 획을 하나 그었더니 선생님께서 나무라기 시작하시더라고요. 임서를 20년은 해야 필력이 생기고, 그제야 자기만의 서체가 생긴다고요.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서예를 그만뒀어요. 나는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펼치는 것으로서의 미술


오랫동안 도제 시스템 안에서 숙련에 중점을 두었던 미술 교육은 학교로 제도화되고 난 이후 그 규모를 점차 키워 왔다. 제도화된 미술 교육은 예술적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일정한 매뉴얼을 만들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잠재력을 표준화하는 데 일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가르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에 대한 회의는 항상 있어 왔다. 예술의 본질이 일정한 매뉴얼로 공유될 수 있는 형식지(形式知)라기보다 경험으로 체화되어 드러나지 않는 암묵지(暗黙知)에 더 가까운 까닭이다.


작가로서 윤석남 선생의 이력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목이 바로 그가 ‘정규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붙는 접속사는 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즉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명망 있는 작가가 되었다.’는 예외에 대한 경외가 이와 같은 표현 뒤에 숨어 있다. 물론 이러한 상투적인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제도화된 것으로서의 미술 교육이 더 익숙한 시대에 제도 밖의 존재에 대해 기술할 수 있는 방식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예술의 본질에 대해 잠시 언급했듯이 예술의 길이 공통된 매뉴얼로 표출되기보다 지극히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으로 자아의 수면 아래로 축적되는 과정이라면, 한 예술가의 궤적을 반추하는 데 있어 정규 미술 교육의 이수 여부가 결정적인 필요조건이 되어야만 할까?


“서예를 그만두고 구반포에 사는 한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곳도 몇 달 있다 또 그만두었어요. 그 화실에는 나 말고도 그림을 배우려고 하는 주부들이 많았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은 모두 자그마한 캔버스를 가지고 왔는데, 나 혼자 50호짜리를 가지고 간 거예요. 그 정도는 그려야 된다고 스스로 생각한 거죠. 그리고 인물을 그려 보라고 했는데 나는 내 마음대로 그렸어요. 다른 사람들은 화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이렇게 저렇게 그렸는데, 난 그냥 내 마음대로 그리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화실에서 배우는 것도 나랑은 안 맞는다는 생각에 그만두게 된 거죠.”



〈족보〉, 250×150×279㎝, Variable size, Acrylic on Wood, Paper, 1993



누군가에게 그림 그리기를 배우는 것을 그만둔 윤석남 작가는 집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남는 방 하나를 화실로 꾸민 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상인 어머니를 화폭에 담았다.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어머니,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6남매의 생계를 꿋꿋이 지켜 낸 어머니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어머니를 그리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작가는 첫 개인전을 열었다. 자신의 경험을 펼치는 것으로서의 미술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내가 무슨 미술계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당시 나에게 전시는 굉장히 당연한 것이었던 것 같아요. 이왕에 나를 표현하기로 했으니 전시를 해야 한다고 봤죠. 아마 30여 점 정도 전시를 했던 것 같은데 하나같이 50호나 100호짜리 그림이었어요. 집에서 작업을 했기 때문에 100호 이상의 그림을 그리기는 어려웠거든요. 크게 기대 안 했는데 전시가 꽤 성공적이었어요. 미술계에서도 관심을 많이 가져 줬고, 전시 덕분에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기도 했고요. 전시를 통해 내가 직업적 화가라고 천명한 셈이죠.”





‘여성-나’라는 주의(-ism)


첫 전시로 화단의 큰 반향을 일으켰던 윤석남은 90년대 초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밤에는 프린팅을 배우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작업을 이어 나갔다. 당시 추상작업에 치우쳐 있던 한국 미술계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던 윤석남 작가는 귀국 이후 조각과 설치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시켰다. 평면이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기에 나무에 그림을 그려 덧대는 방식의 실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가 1993년도에 열린 두 번째 개인전인 《어머니의 눈》에 고스란히 담겼다.


《어머니의 눈》 전시에서 관객은 근현대 한국의 한 축으로 존재했던 여성들의 얼굴과 마주했다. 작가가 여성들의 얼굴 사이로 집어넣은 조형적 장치는 그들이 단순한 얼굴로 남지 않고 역사적 존재로 기록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를 지나 너의 어머니와 닿았고, 특정한 어머니를 넘어 보편적 여성의 이야기가 되었다.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던 윤석남에게 작가로서의 시작을 가능케 했던 건 그의 어머니였지만, 작가의 작품 세계는 작가의 어머니를 매개로 다양한 세계의 어머니-여성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40년 전 작업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여성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놓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당신은 여성이라는 한정된 주제에 집착하는가? 통상적으로 예술이란 무한한 자유를 구가하는 것인데 ‘여성’이라는 화두로 작업의 주제를 제한하느냐라고! 나는 대답한다. 나는, 남성은 곧 인간이라는 커다란 하나의 개념으로 불릴 때, 여성은 그 인간 속의 한 부류로 분류되는 시기에 여자아이로 태어났고, 여자아이로 키워졌고, 그렇게 자랐고, 교육받고, 직장을 다녔고, 그리고 결혼해서 며느리로 살았다. 그러한 시기를 통해서 나의 존재가 여성이라는 하위 개념으로 정의 내려지는 커다란 모순을 발견하게 되고 그 원인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하게 됐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그림을 시작한 결과가 된 셈이다. 그러므로 나의 작업의 화두는 언제나 ‘여성인 나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 작가 노트 중에서



〈Blue Room〉, Dimension Variable, Mixed Media, 2010



〈Blue Room(Part)〉, Dimension Variable, Mixed Media, 2010



작가 노트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윤석남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여성’이라는 부분의 주제로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이라는 전체의 주제로 확장시키고 있다. 여기서 전체와 부분을 나누는 기준은 결국 윤석남 작가 자신이 주체로 설 수 있는지의 여부와 관련이 있다. 나-여성이 남성의 반대인 상대적인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비교 대상 없이 스스로 설 수 있는지의 여부. 주체로서의 나-여성으로 살겠노라 다짐하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또 주체로서 삶을 결정할 수 없었던 시간 속 여성의 나는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를 탐색하는 윤석남 작가의 여정은 결코 ‘여성’ 안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무한한 지평선 밖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삶에 대한 의지가 엄청나게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작업에 대한 욕심도 큰 편이고요. 내 또래의 어떤 작가들은 예전보다 쉬엄쉬엄하기도 한다는데 나는 가면 갈수록 더 욕심이 나요.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할 게 너무 많죠. 어떤 면에선 너무 자기 작업밖에 모르고 하고 싶은 것만 많아서 주책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어요. 이게 내 본성인데…….”



〈종소리〉, 187(h)each, Mixed Media, 2002



작가의 왕성한 창작열이 전달되었기 때문일까. 윤석남 작가의 작업실이 공개되던 날 그의 작업실에는 유난히 여성 관객이 많았다. 작가와의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여성 관객들이 쏟아놓았던 질문은 그들의 삶을 관통하는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관객 중 누군가는 그림을 전공했지만 결혼 이후 손을 놓아 공허하다고 토로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한 번도 그림을 그려 본 적이 없지만 중년의 나이에도 그림을 시작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초면에 꺼내 놓기 어려운 진심들이 모이는 가운데 작가는 나직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지금 나이에도 작업실에 매일 정오에 출근해서 오후 10시에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해요. 그림이 잘 그려지는 날도 있지만 그러지 않은 날도 있죠. 근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매일 그려요. 내가 작업을 하는 이유는 내 존재에 대한 질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이 왜 태어났는가?’ 혹은 ‘내가 이 생각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같은 그런 질문들이요. 존재에 대한 물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고 그 물음을 풀어 나가는 것도 누구에게나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요? 우리 모두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각기 다른 사람들이지만 존재에 대한 답을 찾는 갈망은 다 있을 거라 생각해요.”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다독여 주는 작가를 통해 ‘나’라는 광활한 품을 발견한다.



글_강보라(영상학 박사, 독립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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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