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더불어 사는 과정이 예술이고 교육이다 - (2)

지지봄봄 19호 2차 좌담회


'지지봄봄'은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에술교육지원센터에서 2012년부터 발행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 비평 웹진으로 경기도에서 운영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 예술, 교육, 생태, 사회 프로그램을 지지하고 도민들과 공유합니다.

조정훈 / 편집장, 우리동네사람들

유상용 / 진강산마을교육공동체

임정아 / 우리동네사람들/발도르프학교 교사

이성희 / 북가좌초등학교 교사

정수진 / 우리동네사람들. 국제개발NGO 활동가

이광민 / 활동가/前(전)시민사회단체 실무자

박아롬 / 지지봄봄 담당자

한상은 / 녹취록 작성



전지영 또 다른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은데요, 공동체 생활을 할 때 결속력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서로 아낀다’하는 게 굳이 필요한가요? 아까 말씀하신대로 공통의 지점을 만들어내려고 공동체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에 의해서 함몰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우동사는 굳이 그런 결속력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 안하셔서 도리어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건지 궁금해요.


조정훈 오히려 저는 결속력을 강조할수록 결속이 해체되는 느낌이 들어요. 원래 혼자살 수 없고 서로 도움주고 받으며 사는 게 정상의 상태라고 본다면 결속을 강조하는 것은 그걸 주장하는 사람의 욕구가 강하게 반영되는 거 아닐까 해요. 인류학자인 조한혜정 선생님께서 전에 “우동사와 성미산마을의 차이가 뭡니까?”하는 물음에“ 우동사는 해체주의”라고 대답하셨어요. 계속 해체하고 거기서 다시 뭔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인거 같다고요.


전지영 요즘은 대안학교도 마을 개념으로 많이 생기고 있고 실제로 동네마다 지역 주민들이 공동생활을 하려는 경우가 많은데 결속력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하세요. 우리는 하나여야 하고, 헤어지면 안 되고, 뭐든 같이 해야 하죠. ‘같이, 함께’는 나쁜 개념이 아닌데 그게 의무 조항처럼 느껴지는 거죠. 또 그 ‘함께’에 동의되지 않으면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려워지는 지점이 생기기도 하고요. 예를들어 이태원의 경우에 외지인들이 들어가서 뭘 만들어내면서 동네 원지인들이 적응 못하는 경우가 생겨요. 원인을 들여다보니 공동체의 결속력이 너무 강하다는 거예요. 그 모임의 색이 너무 강해서 역소외를 느끼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애초에 그런 모임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내 옆에 누군가가 모여 사는 것을 보게 되면서 그 삶에 대해 사고하게 되는 경우죠. 이태원에 사시는 어떤 할머니 한분은 ‘부럽기도 하지만 나를 끼워줄 것 같지는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우동사의 긍정적인 부분은 ‘우리’를 강조하는 게 없다는 점이 아닐까 해요. 그래서 누가와도 관심을 갖고 슬쩍 들여다보는 게 부담스럽지 않은 것 같아요. 공동체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공동체를 강조하면서부터 주변에 불편한 시선을 주게 된 것 같아요.


이성희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초반에 이런 고민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처음 1~2년 동안은 우동사의 목적을 고민하는 워크숍도 많이 했었어요. 그런 목적을 만들려던 이유는 좀 더 안심하고 살고 싶은 상태를 원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우리 중에 강력한 리더가 없었던 것이 큰 요인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는 서로가 모아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정말 하려는 게 뭘까?’ 생각 했어요. 안정된 상태를 위해 살아야 하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살다보니 그게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삶을 살아왔더라고요. 지금은 목적을 찾기보다는 항상 고민하며 살아요. 저에게는 그게 변화고 흐름인 것 같아요. 그게 뭐였는지 더 살펴보고 싶어요. 그때는 같은 목적을 가짐으로써 더 행복하고 안심할 수 있고 우리가 사는 게 더 의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면 지금은 각자가 움직이는 자기 동력을 갖으면서 나름의 의미가 생겼더라고요. 우리가 사이좋게 사는 게 어쩌면 대안이 되고 의미가 되어버렸어요. 기존에 가진 방향과 과정을 밟아야만 되는 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전지영 저는 공동체를 운동화하는 데 반대하는 입장이에요. 소위 ‘슬로건화’한다고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요즘 지역 공동체 활성화 운동이 많죠. 저도 저의 위치에서 지원해야하는 입장에 있는데 그 안에서의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외부에서 들어오는 힘이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거라는 그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원래는 우동사나 ‘누구나 학교’처럼 자연스럽게 시작된 곳에 지원하는 거였어요. 애초에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인데 그걸 기억해내는 존재가 없으면 이런 지원사업은 처음부터 외부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믿게 될 것 같다는 걱정이 들어요. 그래서 그 방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증명해야할 것 같은 고민도 합니다. 사실 이게 오늘 우동사를 방문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해요. 이런 공동체는 외부에서 지원한다고 해서 시작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때문에 채집자나 기록자로서 잘 듣고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시작은 이렇게 가는 게 맞다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거죠. 지역 안에서 튼튼하게 자리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질문하고 겸손하게 스며드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단디 저는 단디라고 하고요. 목수예요. 근래에 와서 목수라고 하는데, 그게 좋은 일인 것 같아요. 2년 정도 맥주가게를 하고 침술을 배우기도 하다가 다시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목수다’라는 정체성으로 되돌아오니 지금은 편안한 상태가 됐어요. 이렇게 소개할 수 있는 게 좋고요. 제가 우동사에서 지낸지는 4년 조금 지났어요. 처음에 6명이 첫 번째 집에서 살다가 1년 정도 지났을 때 제가 들어 왔고요. 저는 20대 때부터 생태적인 삶, 공동체적인 삶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났어요. 그런데 다 불만족스럽고 어디로 가도 이 길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우동사에 오게 됐어요. 그 때는 이 친구들이 곧 귀농할거라는 얘기를 듣고 합류했는데 귀농을 안 하더라고요(웃음). 그러다보니 어느덧 다시 도시남자가 됐고요.


김진선 저는 이곳에 사는 친구들을 보면서 ‘삶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생각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했어요.‘ 처음에 귀촌한다고 했는데 왜 안해’ 이런 게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이 달라지고 개인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를 점검할 수 있는 게 우동사가 다른 곳과 구별되는 점 같아요. 아까 말씀하신 결속력도 그 이미지를 고정하는 거잖아요. 지금 나의 상태는 달라질 수 있는데 그걸 못보고 정해진 쪽으로만 끌려갈 수 있고요. 우동사는 개인들의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뭐든 가능하다는 게 신기했어요. 우동사에 친구들을 데려오면 편안하고 즐겁다고 해요. 공동체라고 하면 경직된 이미지가 있는데, ‘우동사’라고 했을 때는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게 다른 지점인 거 같아요.


전지영 우동사와의 인연은 한번 방문하고 끝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것도 신기한 매력인데 재미있는 건, 여기는 늘 새로운 이야기가 있어요. 우리가 직장생활이나 일상생활을 할 때 무언가에 메여서 해야만 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기는 일들인 거죠. 그것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고 다양하게 자주 일어나고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힘이 있어요. 다른데서 느끼지 못하는 그 힘이 어느 한분에게 치중된 것 같지는 않고 골고루 퍼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도 독특한 지점이면서 한편 우리에게 필요한 지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조정훈 이번에 우동사 포럼을 준비하던 과정이 떠오르는데요. 포럼이 끝나고 사람들 이야기가 궁금해서 뒷풀이를 하자고 했어요. 그 때 한 친구가 카톡을 보내서 이번에 고생한 사람들, 주로 일했던 스텝들 상이라도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뭘 하면 좋을지 상의하는데 ‘주로 일했던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어떠한 기준으로 판단해야할지 모르고 또 그걸 다들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다같이 재밌게 잘 놀았다는 것으로 마무리 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정리가 됐어요. 저는 이번 포럼하면서 우동사의 컨디션을 점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뒷풀이할 때 혹시 마음이 불편했던 사람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한데 제 눈에는 그런 사람이 잘 안보였거든요. 그게 우동사의 하나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날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요즘에 사람들 관찰하는 재미에 빠져있기도 하고 사람들이 우동사에서 편안해지는 요소가 뭘까 궁금해서 보고 있거든요. 아까 결과와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했지만, 우동사가 해체주의라고 표현되는 건 수단과 목적이 자기 자리를 찾게 만드는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서인 것 같아요. 귀농의 경우도, 강력한 욕구와 의지로 시작했는데 계속 보다보니 ‘그게 괜찮을까’ 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됐어요. 시골에 가는 게 목적이라기보다 시골의 따뜻한 풍경들이 그리웠던 거 아닐까 생각해요. 우리는 여기서 따뜻한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데 말이에요. 커뮤니티펍도 처음에는 재밌자고 열었는데 어려워졌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지 계속적으로 점검하는 거죠. 강령이나 방향이 뚜렷할수록 목적과 수단의 경계가 지워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걸 점검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작업을 일상적으로 해나가는 게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전지영 일반적인 공동체에서 우동사처럼 계속 점검하고 이야기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조정훈 이야기하는 장이 재밌으니까 계속 모이는 거 같아요. 또 한 가지 사람들의 변화를 관찰해보면, 어릴 때부터 만들어온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생겨서 그걸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점검해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가고 그 생각이 옅어지면 그때야 하고 싶은걸 하게 돼요. 그럴수록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편안해하죠. 아직까진 저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하고 싶은걸 마냥 마음껏 하는 건 아니고요, 지금은 적어도 그 해야 하는 것을 흐릿하게 만드는 단계로서는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 같고요.


전지영 문화예술교육활동을 지원할 때 자주 나오는 키워드가 ‘공동체성의 회복’인데요, 지금은 공동체라는 말이 너무나 많은 결로 이해되는 세상이 아닌가 해요. 공동체의 공통의 지표를 만드는데 연구 사업을 해서 자문을 구한다든가 용역을 요청할 수 있겠지만 그게 답은 아니라고 봐요. 공동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개별의 생각과 느낌들을 친밀하게,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공동체성을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회복할 수 있는가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해보고 싶어요. 그런의미에서 우동사에서는 공동체를 어떻게 인식하고 계신지도 궁금합니다.


조정훈 이야기가 나온김에, <공동체와 공동체가 아닌 것>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지요.


정명주 공동체가 아닌 게 있나 싶어요. 또 우동사에서 살다가 집을 따로 구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이 동네에서 살다가 우동사와 관계를 맺은 친구들도 있었는데, 우동사 멤버에 대한 규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혹은 관계 맺고 지내는 이웃들은 어떤지를 생각해보면 그 구별이 모호해요. 굳이 함께 살지 않아도 관계가 형성됐기 때문에, 그렇게 보면 공동체가 아닌 건 이 사회에서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누구나 어딘가에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질문이 어렵게 느껴져요. 생각할 지점이 많은 것 같아요.


김진선 저는 어떤 일이든 누구와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해요. 결국은 어떤 조직을 만들거나 도움을 받아서 하고요. 공부도 혼자는 어렵더라고요. 주변 친구들로부터 공동체에 대해‘ 나는 개인주의자라서’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 개인주의’는 뭘까 궁금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취향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같이 할 수 있고 서로 지지받는 느낌이 드는 친구도, 가족도, 회사도 공동체인데 왜 자꾸 개인주의를 주창하는 건지 신기했어요.‘ 공동체는 뭐다’라고 이야기하기보다 개인에 대한 다른 지점에서의 공동체를 생각해봐야겠어요.


이성희 처음에 우동사에도 울타리가 있었어요. 우동사에서의 6년의 과정을 보면, 6명이 살 때는 그 6명이 우동사라고 생각했고 집이 커지면서 집에 한정해서 생각하다가 지금은 마을로 나아가 그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게 공동체라는 인식하는 것 같아요. 평소에 공동체라는 인식은 주변 사람의 존재에 따라 달린 것 같아요.


임정아 소위 얘기하는 공동체의 회복이란 표현이 왜 생겼을까 생각해봤어요. 원래 있었는데 사라졌으니까 ‘회복’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 같은데요, 개념 상의 느낌인 것 같아요. 예전에는 다같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도시의 삶이 되면서 옆 사람을 생각하는 감각을 잃게 만든 느낌이에요. 공동체를 회복한다는 건 옆 사람을 생각하는 감각에 빛을 비추려는 작업이지 않을까요? 실제로 우동사를 공동체라고 생각하면 낯간지럽고 어색해요. 공동체와 공동체가 아닌 것은 자기가 인식하는 범위에 따라 구분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 명명해주고 불러줄 때 그게 마치 공동체가 되는 것 같은데요, 태어나서 약 15년 정도는 친구나 눈에 보이는 관계를 나름의 관계망이라고 생각하면서 지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여러가지 질문이 드는데, 잘 모르겠어요.


전지영 공동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어요. ‘운명이나 목적 등을 같이 하는 두 사람 이상의 관계’ 로 나와 있네요. 이걸 보니 일단 두 사람 이상은 모여야 하는 거구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운명을 같이 한다는 것, 목적을 같이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오랫동안 막연하게 해왔었는데요,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이 뜻이 맞아 같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가족이나 이웃, 조직 사회 안에서는 서로 좋아하는 관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음에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사는 관계도 있잖아요. 공동체와 공동체가 아닌 것에 대한 생각해 봤을 때, 공동체가 반드시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전제되지는 않았으면 해요. 필연적으로 원하지 않더라도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상황 안에서 절제, 배려, 희생, 헌신, 고민을 하면서 맞춰갈 수 있는 ‘자기 깎기’의 부분이 있는 거죠. 저는 그거에 익숙해요. 물론 지치기도 했지만 힘이 되었던 때도 있었고요. 공동체가 이미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걸 어떻게 조화롭게, 그 사람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면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더 익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김진선 우동사 포럼 때 재밌었던 건, 우리가 실제로 같이 살고 있고 식구 같다는 거였어요. 그 때 ‘빈집’이라는 곳에서 오셔서 규칙을 주제로 이야기를 함께 했어요. 어떤 규칙, 내부 윤리를 정해놓고 지킨다고 했을 때 같이 살게 되면 실제로 불편한 것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맞춰가는 과정이 내가 확장되는 경험이냐, 아니면 나와 분리하고 이용하는 느낌이냐가 가장 큰 차이인 것 같아요. 규칙화될 때에는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인가 확인하는 대화보다 규칙이 지켜졌는지 아닌지 판단과 확인만 하는 것 같아요. 우동사에서 같이 사는 친구 중 하나가 한 말인데, ‘여럿이 살 때 내가 여럿이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최근에 우동사에서 한명이 나가기로 했는데요, 단순히 ‘서로 맞지 않으면 나갈 수도 있지’할 수도 있지만 어떤지 살펴보고 싶었어요. 이런 경우는 분리가 아니라 확장되는 느낌인 것 같아요. 감각적으로 다르죠.


이광민 우동사에 이사 온 첫 해에‘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어떤 삶인가?. 이게 영리 사업도 아니니 이걸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분담하는 게 합리적이다’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 필요와 맞아 떨어지니까 이해관계가 맞아서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각자 필요한 만큼씩 나눠서 잘 살 수 있게 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사람이 생활하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이 많이 필요해요. 집을 잘 꾸려가고 잘 지내는 거에 관심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걸 내가 못 보던 부분이 있더라고요. 생활에는 많은 요소가 필요한데 내가 모든 것을 다 잘 할 수는 없어요. 삶이 그냥 잘 진행되는 건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함께 신경 써주고 같이 상을 받치고 있는 다리가 되어주니 공동체가 연결되어있는 느낌이 있죠. 이해관계에 따른 공동체인가 필요한 의제에 따른 결사체인가 하는 것처럼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좋고요. 책이나 이론을 보면서 ‘나는 세계시민이지’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원래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 생활에서 얼마나 생생한 느낌을 가지고 마주하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공동체의 회복도 원래 연결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상기시키느냐 하는 거고요. 목적이 맞아서 잘 될 수도 있지만 그런 게 없어도 즐거운 공동체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정명주 공동체는 ‘우리가 어떻게 보고 있는 가’에 초점이 있는 것 같아요. 결국 공동체는 안정된 관계망을 회복하고 싶다는 결핍에서 시작된 거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안전한 관계망, 편안한 관계망으로 연결되는 걸 떠올려봤어요. 우동사에서 커뮤니티펍 지기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데요, 그 안에서 어떤 관계가 내가 펍지기로서 활동하게 하는가 생각해 봤어요. 회사 다닐 때는 연봉에 대한 고민을 하거나 직장에서 자기계발을 한다거나 했지, 성찰을 할 수 있지는 않잖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건에 맞춰 생활한다고 생각했고요. 지금 펍에서 일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것 같아요. 흔히들 말하는 ‘애사심과 연봉이 비례한다’는 말과는 반대되는 상황이죠. 그런데도 펍에 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관계맺음에 있는 것 같아요. 항상 편안하고 평온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살피려는 것이 동력이 되요. 처음 우동사에 와서 관망하는 느낌으로 친구들을 보던 시기가 있었어요. 어떤 친구가 펍에서 일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는데 ‘마음이 안가서’ 일을 못하겠다고 얘기하고 실제로 집에 갔어요. 그동안 내가 생각해온 사고방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긴데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보다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만약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봤다면 원래의 사고대로 생각했을 텐데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상황에서도 자기의 마음을 따라 행동하고 다른 친구에게 얘기해서 도움을 받았다는 것도요. 자기의 마음을 살폈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걸 이해해주는 친구 관계가 신선했어요. 내 마음이 이렇다고, 상황을 충분히 드러내고 표현하고 상대가 그걸 받아줄 수 있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한데, 그걸 받아주는 관계가 좋아 보이는 거예요. 그게 편안하고 안정된 관계라고 생각해요.


이성희 공동체를 이야기할수록 그것이 개념적인 용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지하는 것과 인지되어지는 것은 다른데, ‘인지한다는 것’은 생각의 영역이고 ‘인지 된다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거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인거죠. 우동사를 시작할 때는 6명의 멤버라는 개념이 강했어요. 그런데 우동사의 틀이 점점 약해지고 이 사람의 안위가 궁금해지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이 나의 ‘환경’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들어서 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하거나 지탱하게 하는 힘인 ‘환경’이 얼마나 안정적인가 신경 쓰는 거예요. 이러한 의미에서 이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나의 안위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어요. 나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누군가의 호의가 쌓이는 경험을 우동사에서 했고요. 우동사 포럼에 왔던 사람들도 같이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고민하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 거예요. 물리적인 근접성보다 마음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거죠.


전지영 저의 경우 가족처럼 오래 함께 지내온 친구가 있는데, 가족이 아니어도 같이 생활할 수 있고 서로 배려할 수 있으니 이걸 확장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좋은 것은 본능적으로 확장하고 싶은가봐요. 근데 이상하게 그게 안돼요. 이런 관계망을 확장하려고 5년 쯤 노력했는데 잘 안됐어요. 저도 ‘왜 확장이 안 될까?, 움직임이나 활동성이 필요한 건가?’하는 고민을 했어요. 저는 이 친구와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사람들과 나눠볼까 했는데 교회에서 막혔어요. 신학전공을 하지 않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를 하는 것에 대한 벽이 생각보다 높아서요. 신앙이라는 씨알이 공통분모로 박혀있었는데, 그 씨알을 확장하는 게 생각보다 잘 안됐던 거예요. 우동사도 많은 분들과 공유하며 관계성을 널리 가지는데 그때 그 씨알 같은 게 하나 있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게 우동사의 공동체성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그것보다 좀 더 개인적인 뭔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조정훈 저는 다른 곳에 가서 우동사가 확장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그 의미는 처음에는 ‘사람이 늘었다’의 개념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관계 맺음’의 뜻이 담겨 있어요. 내가 저 사람에게 관심이 가고 친해졌다, 편해졌다는 것이 어떻게 생겨날까 생각하는 것이 재미있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이 없다는 게 이 관계를 끈끈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죠. 해야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관심이 사람으로 가는 거예요. 공동체의 확장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개념에 가까워요. 어떤 사람한테 마음이 쓰이고, 고민하는 걸 나누고, 함께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같이 살지 않거나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데서 공동체성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올해 초, 몸이 많이 아파서 저의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몸을 회복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컸죠.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는 건 공동체가 약화 됐다는 뜻 같아요. 몸이 아프면 빨리 회복하기 위한 에너지를 투입하죠. 지금 우리는 그 감이 둔해져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런 상황이 암 덩어리처럼 커지면 전쟁이 나는 거예요. 몸이 아픈 것, 굳어있어서 혈액순환이 안 되거나 신경이 눌려서 무감각해 지는 것인데요, ‘몸의 굳음’처럼 ‘정신의 굳음’도 공동체성을 파괴시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규칙이라는 것이 우동사에서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 것은 ‘정신의 굳음’을 방지하는 하나의 흐름이 아닐까 생각해요. 요즘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니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가요. 예전에는 일을 많이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남는 것은 사람뿐이더라고요. 사회도 사람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잖아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행복하고 즐거워지면 행복한 사회가 되죠.




오늘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봤는데요, 공동체라는 고정된 개념을 분석하는 것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어요. 오늘 각자 어땠는지 이야기하고 마무리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문득 ‘오늘 어땠지?’ 하고 돌아보니 함께하신 센터장님이 신경 쓰였어요‘. 이 침묵이 불편하시면 어떡하지(웃음)’ 생각하면서요. 최근에 우동사에서 3개월 동안 같이 살아보는 프로그램을 했는데 그 때 참여했던 친구가 처음 우동사에 왔을 때 한 달 동안은 이 침묵이 너무 불편하고, 뭔가 말을 해서 침묵을 깨야할 것 같은 압박이 있었는데 이제는 이 침묵이 너무 편해졌다고 하더라고요. 단순히 문화나 습관을 공유했다기보다 그 친구가 질문을 많이 하면서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요즘에는 사람의 성장에 꽂혀 있는데요,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명쾌함이 생겼어요. 우동사라는 틀에서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 사람이 편안해지고 지혜로워지는 방향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그러려면 내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우동사를 편하게 느끼는 건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지내는 사람들이 편안해지고 지혜로워지고 여유로워지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거기는 좋은 사람들이 사니까 그렇지’라는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이성희 센터장님 말씀 듣는데 울림이 있었어요. 저도 우동사에서 지내면서 체험한 건데요, 다른 사람이 하는 말과 그 사람이 표현하는 것에 대해 단정 짓지 않고 대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내가 ‘이건 이래서 문제고 저래서 나쁜 거야’ 하고 꺼내놔도 같이 살펴봐줄 뿐이지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인 거예요. 이런 분위기가 놀랍고 감동이었어요. 마지막으로 오늘 만나 뵙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고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 또 다른 생각거리를 많이 만들어줬어요.


김진선 저도 오늘 굉장히 재밌었고요. ‘무장 해제’라는 단어가 와 닿았어요. 우동사의 이러한 분위기가 가풍이라면 가풍일 수 있겠다 싶어요. 서로를 드러내는 친구들을 보면 나도 드러낼 수 있겠다 생각하는 거죠. 한번은 제 친구가 동네에 놀러왔었는데 처음에는 자기의 일 그리고 성취가 중요 말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우동사에서 한 달을 지내더니 ‘아 우동사에 살아도 되겠다’하는 거예요. 이 동네의 편안한 분위기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맘에 들어 하더라고요. 편안하게 자기를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든지 하는 거요.


전지영 이런 분위기면 저는 똑똑한 척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재단에서의 제 자리에서는 그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일 때가 있거든요. 그런 척을 하지 않으면 상대가 편하게 자기 얘기를 못할 거라는 생각에 호응 차원에서 끄덕이면서 결국 아는 척하며 반응을 하곤 하는데 오늘은 그런 스트레스가 없고 편안해요.


임정아 오늘은 호흡이 더 길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길게 생각해보는 분위기 자체가 좋았고요. 그냥 생각 없이 살다가 누군가가 좋은 질문을 해줄 때 드는 해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있어요.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선에서 만나는 것이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공동체가 어떻다고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주변 환경이 좋아지면 내가 편해지는 것도 맞는데, 어느 순간 주변 사람이 다 편해지는데 내가 편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 때에 내가 어떤지 살펴보는 감각이 생겨요. 같이 산다는 것은 그런 것도 포함인 것 같아요. 내가 편해지는 것과 함께 편해지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밀접하게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죠.


전지영 사회에서 친구를 만나는 게 어렵다는 사회적 편견을 깨고 싶었는데 여기서 그걸 보고 가는 것 같아요. 물론 보편화는 쉽지 않겠지만요.


조정훈 비행기 만드는 것보다 쉽지 않을까요(웃음). 저는 비행기 만드는 건 절대 못할 것 같거든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은 생각보다 더 쉬울지 몰라요. 어떤 지점을 건드려야 하는지 몰라서 그런 거죠. 가능할 것 같아요.


단디 저는 오늘 우동사와 ‘공동체’라는 단어에 대해서 오랜만에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기회였던 것 같아요. 여러 사람들 이야기 들으며 최근에 느끼는 것들인데요, 우동사는 고정된 실체가 없구나 하는 거예요. 공동체라는 자체도 실체는 없다는 생각이고요. 근래에 우동사는 5채 집에 30명이 인천의 검암동을 중심으로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것 같아요. 이렇게 모인 우동사가 있고 멤버가 다른 우동사는 또 다른 우동사를 이해하고 가셨을지 모른다는 거죠. 매순간 정해진 것 없이, 변하지 않는 핵은 없구나 하는 것을 느껴요. 각자가 연결된 상태, 그 자체이고요. 저는 방황을 많이 했어요. 우동사에서 총 세 번 집을 바꿨는데 여기서도 또 나가려고도 하고요.(웃음) 개인적으로는 여러 부딪침이 많았고 아직 그 과정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우동사 자체는 좋은데 나의 우동사는 왜 이렇지?’하는 고민이요. 이전에는 그런 생각이 들면 ‘여기는 나랑 안 맞아’하고 있던 곳의 단점을 찾거나 했는데 여기 와서는 단점 찾기가 어려울 정도예요. 우동사는 참 괜찮고 딴 데 가서도 이런 사람들 만날 수 있을까, 잘 맞다고 생각하는데 왜 나는 자꾸 불만족스러운가에 대해 생각했어요. 결국 우동사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공동체도 어떤 사람의 수준과 인식, 개념 지을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달린 것 같아요. 우동사는 각자의 우동사구나 생각해요. 각자가 다른거죠. 의견이 대립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원래 다 다르게 존재하는 거라는 거죠. 다른 데로 떠나는 게 절대 해답은 아니겠구나 했어요. 저도 성장하고 있고 변하는 중이고, 정해진 바 없이 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느낌이에요. 오늘 이야기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했어요. 이렇게 정해지지 않은 것이 우동사의 강점인 것 같고요. 그 우동사의 가변성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유연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요.


이광민 이야기가 오가는 걸 들으면서 마음이 좀 더 따뜻해졌어요. 어제 한 주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했었는데요, 최근 저의 감정 상태를 공유하고 싶었어요. 커뮤니티펍에서 회의를 하며 느낀 것이나 포럼을 진행하면서 느낀 것 혹은 어떤 공통의 마음이나 개인적으로 수련회 갔다 온 것도 공유하고 싶었어요. 우동사 포럼에서는 ‘내가 왜 살고 있을까, 나는 뭘 기대하거나 바라고 있을까?’ 이야기했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입시가 중요해서 내가 몇 점짜린지 질문했고 대학 때는 공부를 하면서 의식화되니 관념적으로 생각했어요. 요즘에는 살면서 구체적인 감각으로 느껴요. 서로 증명하길 요구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상황이 안정감을 주는 거죠. 일면에서는 혹시 내가 외골수가 되지 않을까 걱정도 돼요. 나를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못해 미안하거나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은 없는데 그러면서도 그 이상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 하지 못 하는 것 같아요. 꼭 그래야한다거나 그게 숙제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많아졌으면 해요. 마음의 거리가 가까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도 내 마음을 내놓기가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스스로는 그것도 잘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지금 제 상태가 좋다고 느껴지니까요.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서 지내는 것 같아요.


전지영 지지봄봄 19호를 시작할 때, 문화예술교육의 비평담론을 말하는 편집장으로 왜 우동사의 조정훈 선생님을 위촉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저는 ‘성장’을 통해 사람이 있는 그대로 피어나게끔 하는 이슈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문화예술교육’은 인간이 그 자체로서 살 수 있게 북돋아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조정훈 선생님을 지지봄봄 편집장으로 추천했습니다. 우동사가 가지고 있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편안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의 맥락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오늘 이 자리를 가지면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를 느낄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오늘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세부정보

  • 웹진 '지지봄봄'/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에서 2012년부터 발 행하고 있습니다. ‘지지봄봄’은 경기도의 문화예술교육 현장을 가까이 바라보며 찌릿찌릿 세상을 향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문화예술교육 현장이라면 어디든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다양한 삶과 배움의 이야기와 그 안에 감춰진 의미를 문화, 예술, 교육, 생태, 사회, 마을을 횡단하면서 드러내고 축복하고 지지하며 공유하는 문화예술교육 비평 웹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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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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