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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경기지역 고려시대 발굴조사 성과 ③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경기지역 고려시대 발굴조사 성과


김영화 | 경기문화재연구원




|목차|

   Ⅰ. 머리말

   Ⅱ. 주요유적

   Ⅲ. 맺음말


Ⅱ. 주요유적


2. 행정유적


행정유적은 궁궐·도성·관아 등으로 구분하였다. 궁궐지는 개성 만월대, 강화 가궐지와 이궁, 행궁지로 파주 혜음원지가 조사되었다. 개성 만월대는 남·북한공동으로 7차례 발굴하였고, 혜음원지는 행궁지, 원지, 사지가 복합된 유적으로 10차례 발굴되어 유구와 유물이 개성 만월대와 유사함을 확인하였다. 강화에서는 이궁과 가궐지에 대한 조사가 있었으나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관청리, 월곳리 등에서 관영건물지일 가능성이 있는 유적이 다수 조사되었다. 관아와 읍성은 온전하게 조사된 사례는 없지만 하남 교산동 건물지, 광주 향교, 양주 관아지, 수원 고읍성 등지의 발굴조사에서 단편적인 유구와 유물, 문화층이 확인되어 읍치의 행정치소로 고려시대부터 계속되어 사용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개성 만월대


만월대는 둘레 2,170m, 넓이 25만㎡로 개성의 송악산을 주산으로 해서 남쪽으로 해발 약 40 ∼ 60m의 낮은 구릉에 자리한다. 궁성은 길이 북벽 220m·남벽 450m·동벽 755m·서벽 745m이며 남쪽이 넓은 형태로 성벽에는 황성으로 통하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만월대’는 ‘발어참성’을 바탕으로 광종 원년(950년)부터 규모가 확장되고, 이후 현종 대에 두 차례 대대적인 복구를 통해 중세수도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만월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회경전’과 4개의 대형 돌계단도 이때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에는 이자겸의 난과 무신정변, 몽고 침략을 거치면서 차츰 쇠락하고, 특히 원제국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놓이면서 정궁보다는 별궁으로 운영되다가 점차 상징적인 존재로 변해 갔다. 500여 년을 이어온 만월대는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으로 파괴되고 1392년 조선의 건국으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만월대의 학술조사는 남북한 공동으로 2007년부터 2015년까지 7차례 진행되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차는 2007년 5월 15일부터 7월 13일까지 회경전 서쪽 ‘서부 건축군’ 33,000㎡에 대한 시굴조사로 조사결과 ‘서부 건축군’ 내부 건물지 배치 양상을 파악하였고, 『고려사』에 기록된 5대 왕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는 ‘경령전’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2차는 2007년 9월 7일부터 11월 16일까지 ‘서부 건축군’ 북동쪽 1건물지군을 조사하였다. 조사결과 동서 47m, 남북 90m 규모로 7개의 건물이 일곽 건물지군을 이루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고, 북쪽과 남쪽의 계단과 문지를 조사하였다. 3차는 2008년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 ‘서부 건축군’ 북쪽 2건물지군과 북서쪽의 3건물지군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2건물지군은 동서 32m, 남북 37m로 건물 내부에 벽이 설치된 특수한 용도로 추정되는 2-1건물지 3동의 건물이 둘러싼 일곽 건물지이다. 4차는 2010년 3월 23일부터 5월 18일까지 ‘서부 건축군’ 1·2·3 건물지군 토층조사로 건물지군의 아래에서 선대 유구의 흔적이 확인되어 이 지역이 궁성축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사용되었음을 파악하였다. 5차는 2011년 11월 24일부터 12월 20일까지 폭우로 파괴 위험성이 높은 1건물지군 남쪽 석축과 건물지 등에 대한 보존 조치를 중심으로 긴급 조사가 이루어졌다. 6차는 2014년 7월 22일부터 8월 16일까지 ‘중심 건축군’과 ‘서부 건축군’을 연결하는 5건물지군을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 대형 계단 2개소, 계단과 연결되는 문지, 계단주변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7차는 2015년 6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서부 건축군’ 5·6·7·8 건물지군 7,000㎡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경령전 일곽과 대형 계단, 회랑, 6차 조사에서 확인된 대형 계단 서쪽의 보도와 문지, ‘중심 건축군’ 장화전 서쪽 축대, 우물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7차에 걸친 조사를 통해 ‘서부 건축군’의 전체 면적인 33,000㎡ 중 약 56%인 18,700㎡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였으며 고려 궁성의 건립 당시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제2정전인 건덕전을 비롯하여 대형 축대 3개소, 건물지 40여동, 대형계단 2개소가 확인되었고, 7차 조사에서 확인된 만월대 금속활자, 원통형 청자, 용두 등 13,500여 점의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강화 중성


강화 중성은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를 단행한 강도시기(1232∼1270)에 축조한 성곽이다. 『고려사』에 몽고의 침입으로 1232년 강화로 천도한 뒤 궁궐 보호를 위한 내성 쌓고, 1237년에는 외성을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중성은 내성 방어를 목적으로 1250년 축조하였으며, 둘레는 8.1km이다. 4개 지점에서 조사가 이루어져 구간별로 다양한 축조기법이 확인되었으며 옥림리 구간에서는 중성의 토축 구간 120m를 비롯한 고려시대 건물지 6동 등이 확인되었고, 성벽의 축조를 위한 판축용 틀인 석렬 유구와 이를 고정하기 위한 기둥이 확인되어 고려시대 토목기술 복원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유물은 고려 중기에 편년되는 자기류, 기와류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는데, 접시·대접·잔 받침 등 최상품의 다양한 청자와 일휘문 막새와 어골문 평기와 등은 강도시기와 고려 중기의 문화상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파주 혜음원지


혜음원은 『동문선』 권 64 「혜음사신창기」에 창건배경과 그 과정, 창건과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혜음원은 남경과 개성 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고려 예종 17년(1122)에 건립된 국립숙박시설이며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고려 및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혜음령이라는 명칭의 유래에서 그 위치가 추정되어 오다가 1999년 ‘혜음원’이 새겨진 암막새가 수습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2001년부터 2015년까지 10차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혜음원지는 크게 행궁지, 원지와 사지로 구분되는 2개의 건물 일곽임을 알 수 있는데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동서 약 100m, 남북 약 129m에 이르는 면적에서 11개의 단으로 이루어진 경사지에 35개의 건물지와 외곽 담장지, 수로, 집수정, 우물, 화계시설, 연못지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행궁지는 북동쪽에 1∼4단 위치하며 원지를 헐고 조성한 흔적을 확인되어 원지보다 나중에 축조하였다. 가장 위쪽에 정전, 입구 쪽에 연회나 모임을 위한 대형 누각지가 위치하는데 두 건물지의 중앙을 연결하는 중심축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다. 외곽 담장과 별도로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내곽 담장을 시설하였다. 사지와 원지는 같은 건물군으로 앞쪽(5∼9단)에 원지가, 뒤쪽(3∼4단)에 사지가 있다. 금당지, 중정이 있는 건물지 등 축조방법이나 석재가 원지 건물지와 차이가 있으며 경전을 보관하는 윤장대와 청자 등 생활유물이 집중 출토되기도 하였다. 원지는 2×1칸이 하나의 방을 이루고 있는데 2칸에 하나씩 한쪽으로 치우쳐 4각형의 화덕과 같은 난방시설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남쪽에 혜음원의 정문으로 볼 수 있는 주출입문이 있다. 유물은 정전지 주변에서 용두·취두·잡상 등 건축재가, 전역에서 귀면와·막새·명문와·청자·중국자기·금동불·칠기 굽접시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혜음원지는 문헌과 유구, 유물을 통해 원(院)의 구조와 형태, 운영 실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왕실·귀족·평민 등 각 계층의 생활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고려 시대 건축 및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강화 관청리· 월곳리 유적


관청리 일대에서는 소규모 시설이나 건축을 위한 조사가 다수 이루어졌다. 한정된 조사구역에서 확인되기는 하였으나 궁궐이나 관아의 시설일 가능성이 회랑건물지기가 조사되었다. 월곳리 유적은 강화 중성의 바깥쪽, 외성의 안쪽에 위치하며, 건물지 7동을 비롯하여 건물지와 관련된 기단석축·축대·배수로·담장지 등이 확인되었다. 건물지는 상단과 하단 계단식으로 조성되었고 중정이 있는 ‘ㅁ’자형 중앙 건물지를 중심으로 좌우측과 앞쪽에 배치되어 있다. 중정의 바닥에는 연화문 청석이 깔려 있고 배수로와 집수지가 있으며 집수지 상부에 누각으로 추종되는 초석이 남아있다. 상단의 중앙 건물지와 하단의 누각 건물지는 계단으로 연결되며, 7동의 건물지에서 온돌 관련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월곳리 건물지는 파주 혜음원지, 개성 만월대 등 고려시대 관영건물지의 배치양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강도시기 고려 건물지의 구조와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유물은 강도시기인 13세기대 청자가 대부분으로 기종은 발·대접·완·접시·잔·뚜껑 등 일상기명이 주를 이루며, 발우·잔탁·항·병·매병·마상배·베개·연적 등 특수기종과 중국자기편, 차마구로 추정되는 철기가 출토되었다.


하남 교산동 건물지


1998년 세종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하남시 광역지표조사에서 지표면에 초석이 일부 노출된 상태로 확인되어 보존 및 관리대책 수립을 위하여 1999년부터 2003년까지 4차에 걸친 학술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건물지는 『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보면 광주 고읍의 위치와 비교된다.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중복하여 조성된 동·남·서측의 건물지 3개소를 비롯하여 용도를 알 수 없는 집석유구, 소성유구, 석축 연못지가 확인되었으며 건물지 외곽으로 담장지 혹은 토루가 둘러져 있다. 유물은 귀면와·막새·평기와 등 기와류, 주름무늬병편·파상문토기편·도기와 흑유도기, 청자와 백자 등이 출토되었고, 건물지의 성격과 조성주체를 추정할 수 있는 ‘광주객사(廣州客舍)’, ․‘성달백사(成達伯士)’, ․‘애선백사(哀宣伯士)’ 명문와도 수십 점이 출토되었다. 명문기와로 볼 때 이 건물지는 통일신라 말기 및 고려 초기 향촌의 토호세력의 거점이거나 고려 전기 광주 읍치소의 객사와 관련된 관영 건물지로 추정된다.


수원 고읍성


고읍성이 위치한 곳은 고려시대에 수주의 읍치 있었던 곳으로 정조 13년(1789)에 사도제자의 능을 이곳으로 옮기기 전까지 수원지역의 행정 중심지이었다. 1999년 발굴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층, 고려시대 전기와 후기층,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층이 확인되었다. 고려시대 문화층은 트렌치조사로 일부만 이루어졌는데 직경 2m의 적심이 확인되어 건물지가 존재할 가능성을 파악하였다. 유물은 해무리굽 청자 완과 고려 백자, 어골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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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글쓴이
경기역사문화유산원
자기소개
경기도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경기역사문화유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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