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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지역 고려시대 발굴조사 성과 ⑤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경기지역 고려시대 발굴조사 성과


김영화 | 경기문화재연구원




|목차|

   Ⅰ. 머리말

   Ⅱ. 주요유적

  Ⅲ. 맺음말


Ⅱ. 주요유적


5. 생산유적


생산유적은 자기가마, 도기가마, 기와가마가 주로 조사되었다. 고려시대 자기가마는 축조 재료에 따라 벽돌가마와 진흙가마로 구분되며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변화하며 양상을 보인다. 벽돌가마는 용인 서리 중덕 하층, 시흥 방산동에서, 벽돌가마와 진흙가마 혼축은 여주 중암리, 용인 서리 중덕 상층과 상반에서, 진흙가마는 인천 경서동, 용인 서리 하덕, 용인 보정리, 여주 안금리, 부평리에서 조사되었다. 도기가마는 시흥 방산동, 안성 화곡리·오촌리, 용인 동백동·죽전지구·청덕동·보정리, 화성 가재리·매곡리, 여주 연라리·안금리 등지에서 고화도 소성의 도기 가마들이 발굴되었다. 도기가마는 생토층을 굴착하며 만든 지하식 등요로 연소부, 소성부, 연도부를 갖추고 있으며 평면형태가 대부분 ‘고구마형’이다. 기와가마는 용인 서천동·역북동·남사 완장리, 안성 만정리·도기동(중앙), 화성 청계리·분천리, 이천 장천동, 양주 삼숭동, 평택 남산리, 이천 목리, 파주 운정(3)지구 등에서 조사되었다. 제철유적은 고양 벽제동, 수원 영통, 용인 서천동·남사 완장리, 오산 세교지구·가장동(서해), 평택 토진리·평택 고렴리에서 조사되었다. 그리고 고양 벽제동과 용인 남사 완장리에서는 철제 솥 주조, 봉업사지에서는 범종 주조 등 금속기 생산유적도 조사되었다.


시흥 방산동 청자·백자요지


이 유적은 1990년대 초반에 알려져 1997년과 1998년 2차례 발굴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청자와 백자를 함께 생산한 자기가마 1기와 도기가마 2기가 조사되었다. 자기가마는 천정부만 함몰되었을 뿐 봉통부, 소성부, 굴뚝부 등 모든 구조가 완전하게 확인되었는데 규모는 길이 39.1m, 폭 2.22m이다. 초축 이래 2회 보수과정을 거쳐 개축되었는데 초축 당시보다 규모가 축소됨을 알 수 있다. 유물은 청자와 백자 함께 출토되나 청자가 주를 이루고, 기종은 대접, 접시, 발, 완, 잔 등 20여종이 있으며 완이 50%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해무리굽 완, 화형접시 등 중국 월주요 청자와 유사한 것 출토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제작기술을 수용하여 제작했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용인 이동 서리 백자요지


용인 이동 서리 백자요지는 1984년·1987년·1988년 호암미술관에서 중덕요지를 조사하였고 2001∼2006년까지 5차례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상반요지를 조사하였다. 중덕요지는 하층에 벽돌가마, 상층에 진흙가마가 중첩되어 있으며, 퇴적층은 거대한 ‘M’자형을 이루고 있다. 벽돌가마는 길이 40m, 너비 1.8m이고, 그 위에 개축한 진흙가마는 길이 83m, 너비 1.2∼1.5m에 달하는 대형으로 측면출입구가 23개소 확인되었다. 이 요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알려진 벽돌가마이고 진흙가마로는 최대 규모이다. 요지 발굴에서 4개의 자연층위를 확인하여 우리나라 자기의 발생 및 변화과정을 파악하는 중요한 근거자료를 확보하였다. 출토유물 완, 발, 화형접시 등이 있으며 완이 주류를 이룬다. 퇴적층의 유물출토 상황으로 보면 처음에는 청자를 굽는 가마에서 백자를 같이 굽게 되고 이어 백자만 굽는 가마로 변화하며, 우리나라 청자나 백자의 가장 이른 굽 형식으로 알려진 해무리굽보다 더 이른 시기의 선해무리굽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가마의 제작시기는 10세기 중반부터 11세기 전반까지로 추정한다. 상반요지는 반지하식 진흙가마로 길이 53m, 폭 1.5∼1.7m, 아궁이 4개소, 측면출입구 4개소가 확인되었다. 아궁이는 입구는 갑발로, 벽면은 진흙과 갑발을 이용하여 축조하였고, 고려시대 가마에서 드물게 연도시설이 확인되었고 갑발을 사용하여 배연시설을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물의 기종은 일상 용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보, 궤로 추정되는 제사용기가 상당수 출토되었다. 사용 시기는 중덕요지 3·4기층과 유사하며 10세기 후반부터 11세기 중반으로 추정하였다.


여주 중암리요지


가마는 경사면에 조성한 등요이며 규모는 길이 20.4m, 너비 1∼1.7m이다. 아궁이, 소성실, 굴뚝부가 완전하게 남아있고, 5회 이상 수축과 개축이 있었는데 축소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최초에는 벽돌가마로 축조되었으나 3차 개축이후부터 진흙가마로 변화하며 가장 늦은 시기에는 아궁이와 굴뚝부에 석축으로 벽체를 조성하였다. 벽돌가마에서 진흙가마로 변화하는 고려전기 가마유적으로 중요하다. 유물은 완·발·화형접시 출토되었는데 5층인 최하층에서는 선해무리굽 완·음각연판문 발․·연판문 잔탁이, 3층과 1층에서 제기편이 출토되었다.


용인 보정리 청자요지


청자가마와 도기가마, 공방지 및 기타 석렬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가마는 경사면을 따라 조성된 등요로 소성실 격벽시설이 없는 단실요이며, 규모는 길이 약 16m, 너비 1.1∼1.4m, 경사도는 10∼15°로 잔존 깊이는 10∼86㎝이다. 가마의 구조는 아궁이, 소성실, 연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4회 이상 보수가 있었다. 가마는 진흙으로 축조하였으며 아궁이와 연도에 인접한 소성실 뒤쪽은 할석을 이용하여 조성하였다. 유물은 청자가 대부분이고, 백자는 소량 수습되었으며, 기종은 청자는 대접, 접시 등 24개로 다양하나 백자는 대접·발·완·접시·잔·뚜껑만 확인되었다. 유물의 대다수가 일상기명이지만 불교 공양구와 화분 특히 출토예가 드문 보살상과 나한상으로 추정되는 청자 불상은 등도 수습되어 주목된다. 또한 자기의 제작생산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작업장 시설과 도구 수비공 역할을 한 도기도 출토되었다. 가마의 규모나 구조, 연판문의 대접·접시·통형잔, 압인양각기법의 접시 등 유물의 특징이 고려 중기에 유행하던 양식으로 연대는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이 위치한 곳은 고려시대 읍치가 있던 용인 구성의 외곽지대로 인근에서 조사된 고려시대 건물지와 분묘에서 유사한 청자가 확인되므로 이 일대에서 소비되는 자기를 생산하는 공급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 중기 도자의 생산과 유통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용인 죽전 도기 가마


도기가마는 4기가 조사되었으며, 구릉의 사면에 축조되었다. 가마는 단실의 지하식 평요로 잔존길이 4.45m, 폭 1.66m, 높이 1m 내외이다. 아궁이와 연도는 거의 유실되어 소성실과 연도 일부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며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이다. 소성실은 타원형으로 경사도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벽은 진흙을 발라 조성하였다. 가마의 주변으로는 폐기장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유물은 대부분 폐기장에서 수습한 것으로 호·병·옹·장군·시루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는데 평저의 호가 압도적으로 많고 호와 같은 방법으로 제작하여 동체부에 구연부를 만든 장군도 다수를 차지한다. 유물중 ‘司醞署(사온서)’라는 음각명문이 새겨진 호편이 포함되어 있는데 ‘사온서’는 고려시대 궁중에서 술의 공봉을 맡아 보던 관청으로 유물의 시기와 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용인지역에서는 성복리 통일신라시대 가마, 보정리, 청자가마, 동백지구 도기가마 등 다양한 가마가 조사되었는데 이 일대가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에 도자기 생산지로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생각된다.


이천 목리 기와가마터


통일신라 ∼ 고려시대 기와가마 6기와 적석유구 1기가 확인되었다. 가마는 등고선과 직교하게 비교적 등간격으로 조성되었다. 모두 지하식 등요로 요전부는 점토층의 굴착면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아궁이는 석재를 사용하여 조성하였고 아궁이에서 연소실로의 불턱은 가파르다. 소성실은 무시설, 주형으로 6열의 횡와열 시설, 방형으로 구들장을 기와편으로 대체한 토대식인 점. 6호는 바닥의 부와(敷瓦)시설이 주목된다. 연도부 굴뚝은 석재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출토유물은 모두 평기와로 문양의 종류는 고려초기의 대표적 문양인 태선문 계열을 비롯하여 사선문, 집선문 격자문, 어골문, 방사선문 등이 중심이다. 명문와는 집선문에 시문된 ‘因囯(인국)’명과, 사격자문에 시문된 ‘南川官(남천관)’명, 방사선문에 횡으로 시문된 ‘南川(남천)’銘 그리고 어골문에 시문된 ‘田(전)’자 명문와 4가지 종류이다. 특히 ‘南川官(남천관)’銘 명문와가 주목되는데, ‘官(관)’이라는 의미에서 수요처로서의 관영시설을 추정할 수 있다. 인근의 관방유적인 설봉산성에서 사격자문에 ‘南(남)’명문, 집선문 ‘因囯(인국)’명문, 어골문 ‘田(전)’ 명문와가 확인되는데 문양의 구성이 동일하므로 설봉산성에 기와를 납품하던 공급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목리 기와가마터의와 설봉산성 편년의 간극과 설봉산성의 ‘南(남)’ 명문와를 신라의 ‘南川州(남천주)’, ‘南川停(남천정)’과 관련시켜 해석이 있어 검토가 필요하다.


주조·제철 유구


봉업사지 3차 발굴조사에서 범종을 주조하기 위한 주형유구와 용해유구가 조사되었다. 주형유구는 형틀을 놓았던 흔적이 원형으로 남아있는데 주변은 열에 의해 단단하게 소결되어 있으며 종구의 지름은 76㎝, 폭은 5㎝로 확인된다. 주형유구의 하부에서는 석재와 기와를 이용하여 기초와 가스배출을 위한 통풍시설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용해유구는 주형에 주입할 청동을 녹이기 위한 시설로 장방형의 적석 하부에 목탄이 다량으로 퇴적된 양상이다. 고양 벽제동과 용인 남사 완장리에서는 무쇠 솥 주조와 관련한 용해로와 용범제작소, 용범을 만들기 위한 토취장, 공방지 등이 조사되었다. 완장리에서는 무쇠 솥 뚜껑, 몸체, 다리부분을 제작한 용범 출토되었는데 남아있는 용범으로 추정할 때 다리는 단면 삼각형이고, 뚜껑과 전에는 침선이 외면 전체에 횡선문이 돌려진 형태로 서긍의 ‘고려도경’에 발이 세 개 달린 ‘죽부’로 소개된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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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글쓴이
경기문화재연구원
자기소개
경기도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경기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