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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고려시대 경기지역의 명문 기와 사례와 명문의 성격 ②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시대 경기지역의 명문 기와 사례와 명문의 성격


홍영의 | 국민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경기지역 명문 기와의 출토 현황

  Ⅲ. 경기지역 명문기와의 연호명 사례

  Ⅳ. 명문기와의 해독과 활용과제

  Ⅴ. 맺음말


Ⅱ. 경기지역 명문 기와의 출토 현황


오늘날 경기지역은 고려시대 양광도 지역이다([그림 1] 참조).1* 오늘날 경기와 충청도 지역에 해당하는 양광도는 양주·광주 등의 주현은 관내도에 소속시켰고, 충주·청주 등의 주현은 忠原道로 하였으며, 공주·運州 등의 주현은 하남도로 하였다. 예종 원년(1106)에 합하여 ‘양광충청주도’로 하였다가, 1171년(명종 원년)에 두 개의 도로 나누었다. 1314년(충숙왕 원년)에 양광도로 정하였다가 1356년(공민왕 5)에 ‘충청도’로 하였다.2* 1391년(공양왕 2) 경기 좌·우도로 개편될 때 양광도와 교주도 일부, 그리고 서해도의 일부를 편입시켰다. 1414년(태종 4)에 경기 좌·우도를 개편하여 ‘京畿’라고 칭하고 관할 영역의 범위를 새로 정하였다.3* 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수안·곡주·연안 등 이전 경기의 서북지역은 豊海道(황해도)로 속하고 광주·수원·여주·안성을 비롯한 동남지역이 경기로 이속되는 등 그 뒤 세종 때에 이르러 경기는 대체로 오늘날 경기도 관내와 일치 하게 되었다. 또한 충청도는 정식명칭이 쓰이기 시작한 1395년(태조 4)에 楊廣州 예속의 군현을 나누어 경기도와 충청도로 분할시켰고 觀察使營을 충주에 두면서 비롯하였다.4* 그리고 1413년(태종 13)에 여흥·안성·음죽·양성·양지를 떼어 경기에 붙이고, 경상도의 옥천·황간·영동·청산·보은을 충청도에 소속시켰다.5*


따라서 고려 때는 수도 개경과 인근의 경기, 그리고 양광도의 양주·광주·충주·청주·천안·원주 등지가 대표적인 거점 지역이었다. 위의 (표 1)의 명문기와 출토 유적도 대부분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은 그러한 조건, 즉 대읍 중심의 생활권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1. 고려시대 경기와 양광도 범위


대개 우리나라 사찰의 입지는 주변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전략적 거점이나 교통로에 사찰이 창건되었다. 나아가 불교가 정치적 측면에서 일상적인 생활종교로 바뀌면서 인구 이동에 따른 숙박시설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 기능을 院이 대체하였다. 이 원은 사찰과 함께 위치하면서 실용적이고 다양한 기능을 수용할 수 있었다.


예컨대, 북한강 유역은 산에 연이은 강변이 넓지 않은 반면 남한강 유역은 주변에 넓은 평야와 분지가 곳곳에 펼쳐져 있다. 이런 지리적 조건으로 북한강 유역보다 남한강 유역에 사찰이 많았다. 특히 여주 평야와 충주 분지는 내륙에 위치한 대표적인 평야와 분지였고, 남한강의 물길이 고려시대에 주요 수운로로 이용되면서, 이곳에는 개경과 연결된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고려시대 사찰은 북한강 유역의 청평사와 남한강 유역의 흥법사·법천사·거돈사·정토사·숭선사·청룡사 등이 대표적이다. 나말여초에 남한강과 蟾江 일대에 집중적으로 대형 사찰들이 밀집되어 있었던 것은 이곳이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역사의 무대였고, 한반도의 중심인 한강의 중요 교통로였기 때문이다.6*


또한 8목 가운데, 廣州는 신라 때 漢山州 또는 漢州 지역으로 궁예의 태봉에 속하였다가 왕건의 고려에 귀속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 정치·군사적으로 중시되어 온 곳 가운데 하나였다. 광주의 경우는 태봉이 한강 이남방면으로 진출할 때에 최우선으로 확보하였던 곳이며, 궁예가 梁吉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非惱城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였다.7* 실제로 광주는 개경에서 동경(경주)를 잇는 교통망 가운데 제2로에 속해 있었다. 특히 광진을 통과해 강동구 지역을 거쳐 덕풍역이나 경안역 방향으로 내려가는 제2로가 중요시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주로 거쳐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동안 우리 문헌 연구자가 고려시기 명문기와를 주목하고 활용한 주제는 대체로 고고학의 발굴성과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앞서 살펴본 여러 판독 활용 사례는 대개 다량으로 출토(수습)된 대규모 유적이 그 대상이었다. 안성의 망이산성8*·봉업사9*, 대전 상대동,10* 보령 성주사지,11* 익산 미륵사지,12* 부여 부소산성,13*·무량사구지,14* 서산 보원사지,15* 충주 미륵사16*·숭선사지,17* 장흥 상방촌,18*·진도 용장산성,19* 대구 부인사,20* 파주 혜음원지,21* 개성 고려궁성22* 등이 대표적인 고려시대 명문기와 출토 유적들이다.


본 연구에서 경기지역 명문기와의 조사 대상 유적은 고려시대 궁성·사찰·산성·읍성 등의 건물지 유적을 중심으로 출토(수습)된 것만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유구의 성격상 다른 시기가 중첩된 것은 통일신라기로부터 조선전기의 것까지를 포함하였다([표 1] 고려시대 경기지역 명문기와의 출토 유적 현황 참조).23*



위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발굴조사보고서를 기초로 2018년(5월)까지 파악한 경기지역의 고려시대 명문기와 출토 유적은 총 70건이다.24* 고려시대 명문기와 출토 유적의 유구별 성격을 구분하여 명문기와의 출토(수습) 유적 현황을 정리하면, 경기지역은 사찰(39), 건물(향교)(14), 산성(11), 관아(읍성)(3), 가마(요지)(2), 궁성(개성)(1) 등 총 70건이다. 역시 사찰 관련 명문기와가 가장 많은 빈도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명문기와가 많이 출토(수습)된 유적은 경기도의 광주(하남 포함)(11)·용인(10)·안성(7)·평택(5) 지역 순이다.




1. 홍영의, 「고려시대 지역성과 문화권-12목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총』 41

2. 『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3. 『太宗實錄』 권27, 태종 14년 1월 18일 계사

4. 『太祖實錄』 권7, 태조 4년 6월 13일 을해

5.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충청도

6. 그동안 우리는 고려시대 유적의 입지적 조건을 조선시대나 현재적 관점에서 파악한 경향이 있다. 당시 중앙(왕실)과 지방과의 정치적 관계 뿐만 아니라 교통망이나 유통망을 통해 유적간의 연계성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7. 정요근, 「後三國時期 高麗의 남방진출로 분석」, 『한국문화』 44, 2008, 5~6쪽 참조.

8. 단국대 중앙박물관, 『망이산성 학술조사보고서』 1992 ; 『안성 망이산성 3차 발굴조사 보고서』 2006 : 忠北大學校 中原文化硏究所,

   『望夷山城 : 忠北區間 地表調査 報告書』 2002 : 중원문화재연구원, 『음성 망이산성 : 충북구간 발굴조사 보고서』 2009/2013

9. 경기도박물관, 『奉業寺』 2002 ; 『高麗 王室寺刹 奉業寺』 2005

10. 중원문화재연구원, 『대전 도안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내 대전 상대동 원골유적』 2011 : 백제문화재연구원, 『대전 상대동 원골(중동골, 양

       촌) 유적』 2011

11. 황수영, 「新羅 聖住寺의 沿革-三千佛殿의 발굴을 통하여」 ; 文明大, 「聖住寺三千佛殿址第一次發掘-聖住寺址 第二次 調査」, 『불교미

       술』 2, 동국대 박물관 1974 : 충남대 박물관, 『聖住寺』 1998 : 백제문화재연구원, 『성주사지 7~11차 발굴조사 보고서』 2011~2014.

12. 홍사준, 「백제 미륵사지 발굴작업 약보」, 『고고미술』 70, 1966 : 문화재관리국, 『미륵사지 유적발굴조사보고서』 I, 1987 ; 국립부여문화

      재연구소, 『미륵사지 유적발굴조사보고서』 II, 1996 ; 『미륵사지석탑 해체조사보고서』 I~III, 2003~2005

13.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扶蘇山城 發掘調査報告書』 1~5, 1994~2003

14. 충남 역사문화연구원, 『부여 무량사 구지』 I~Ⅱ, 2005, 2009

15.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서산 보원사지』 1~2, 2010, 2012

16. 청주대 박물관, 『충주 미륵리사지 1~2, 4~5차 발굴보고서』 1978, 79/1992,93 : 이화여대 박물관, 『미륵리사지 3차 발굴보고서』 1982

       : 청주대 박물관, 『대원사지, 미륵대원지』 1993

17. 예성동호회, 『충주 숭선사지 지표조사보고서』 1995 : 충청대학 박물관 『충주 숭선사지 발굴조사보고서』 2006

18. 목포대 박물관, 『장흥 상방촌A유적』 1(주거지), 2(건물지) 2005/2008 : 호남문화재연구원, 『長興 上芳村B遺蹟』 2006

19. 목포대 박물관, 『진도 용장성 지표조사 보고서』 1985 ; 『진도 용장성』 1990 ; 『진도 용장산성』 2006

20. 대구대 박물관, 『부인사지표조사보고서』 1986 : 경북대 박물관, 『부인사지 1차 발굴조사보고서』 1989 ; 『부인사지 2차 발굴조사보고

       서』 1991

21.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 『파주 혜음원지 1차~4차 발굴조사보고서』 2006

22.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 고려궁성 – 시굴보고서』 2008 ; 『개성 고려궁성』 2009 ; 『개성 고려궁성 남북공동 발굴조사보고서』 2012 :

     『개성 고려궁성 남북공동 발굴조사보고서』 Ⅱ 2015

23. 이러한 이유는 동일한 건물지에 통시대를 걸쳐 사용되었던 만큼 교란층이 많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일신라~고려시대의

      건물지는 특정한 유구를 제외하고는 고고학적으로 유적의 편년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기와는 사용기간이 길고 재사용되는 경우도 많기 때

      문이다. 또한 명문이 압인된 기와의 보존상태 역시 온전하지 않아 판독 역시 용이하지 않다. 이로 인해 나말려초에 걸쳐 조성되어 사용된 유적

      의 경우, 연호명 기와가 수습되지 않는 한 대체로 9~10세기로 판단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전기의 유적 가운데도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어진 것

      들이 존재한다.

24. 물론 발굴보고서 상의 70건이 경기지역 고려시대 명문기와 전체를 망라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조사보고서도 있을 수 있

       고, 보고서마다 편차가 심하여 판독되지 않은 상태로 명문와로만 적시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또 이 통계 안에는 통일신라 하대의 것이나, 조선

       초기의 것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전기의 명문기와라도 고려시대의 것과 공반될 소지가 많으나, 이에 대한 검토는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

       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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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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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경기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