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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고려시대 경기지역의 명문 기와 사례와 명문의 성격 ④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
고려시대 경기지역의 명문 기와 사례와 명문의 성격
홍영의 | 국민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경기지역 명문 기와의 출토 현황
Ⅲ. 경기지역 명문기와의 연호명 사례
Ⅳ. 명문기와의 해독과 활용과제
Ⅴ. 맺음말
Ⅳ. 명문기와의 해독과 활용과제
일반적으로 지표·시·발굴조사에서 출토되는 명문 기와의 내용은 대개 地域名, 寺刹名, 殿閣名, 紀年銘·干支·日字와 大施主·施主 및 大化主·化主, 別座, 瓦匠, 僧統 등의 인명, 官職名, 梵語 등이 기록되어 있어, 건물의 창건 또는 중수시기, 공사참여자나 시주자에 대한 기록, 복을 기원하는 내용 등을 알 수 있다.1*
사찰명은 사찰 유적 39건 중에서 여주의 ‘元香寺’처럼, ‘○○사’ 로 표기된 사찰명은 북한산 삼천사의 ‘三川夫(寺)?’, 은평구 진관동의 ’三角山 靑覃寺’, 파주의 ‘惠陰寺’, 양주 대모산성의 ‘○雲寺’, 과천 관악사지의 ‘金音(寺)?’, 하남 교산동의 ‘慈化寺’·‘藥井寺’, 하남 천왕사지의 ‘桐寺’·‘天王(寺)?’, 안양 중초사지의 ‘安養寺’, 수원 고읍성의 ‘加智寺’, 여주 고달사지의 ‘高達寺’, 여주 원향사지의 ‘元香寺’, 이천 갈산동의 ‘安興寺’·‘臨池院’, 용인 남사(아곡) 유적의 ‘彌?勒寺’, 용인 마북리 유적과 서봉사지, 용인 신갈 택지개발지(현화사지)의 ‘玄化寺’·‘瑞峯寺’, 용인 전대리 유운리, 오산 가장리의 ‘香水寺’, 안성 봉업사의 ‘華太(次)寺’, 안성 상중리의 ‘○三(王)?寺’ 등의 사찰명이 보인다.
이와 같이 명문와 가운데 많은 수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寺’명 기와이다. 명문기와가 출토(수습)된 유적의 70건 가운데 60%가 사찰명인 셈이다. 때문에 발굴과정에서 명확한 ‘사’명 기와가 출토되면 연호명, 간기명과 함께 유구의 성격과 치폐과정을 판단할 수 있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 이 가운데, 용인 마북리 일대의 ‘玄化寺’·‘瑞峯寺’의 관계, 용인 전대리와 유운리, 오산 가장리의 ‘香水寺’, 안성 봉업사의 ‘華太寺’는 그 사찰의 선후 변화관계를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위의 [표 2] 경기지역 명문기와 출토(수습) 유적과 판독 내용 가운데 중요 사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천 영종도 龍宮寺 출토 명문기와인 ‘己巳三月?○○○/寺法堂蓋瓦施主/戒松同願句當使/鄭康同寺道宣‘는 시주인 ’戒松‘의 승려 이름과 ’句當使 鄭康‘, ’同寺의 道宣‘의 이름이 보인다. 용궁사는 조선후기에 瞿曇寺로 나온다.2*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白雲寺라 하였다고 전하며, 조선조 철종 5년(1854)에 흥선대원군이 중창하여 용궁사라 개칭하고 고종이 등극할 때까지 이 절에서 칩거하였다고 한다.3* 따라서 이 절은 ’백운사‘와 ’구담사‘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있다.
‘戒松’은 고려 충숙왕 때의 승려인데, 『고려사』, 『고려사절요』에서 확인된다.4* ‘勾當使’는 고려 성종 13년(994)에 신설한 외관직으로 전국의 강과 섬의 津과 渡에서 감시·감독 기능을 하였다. 구당사는 나루와 섬을 관리하는 관직으로 994년(성종 13)에 압록강에 설치되었고, 이후 탐라 등 모든 나루터 에 구당사를 두어 도서지역 주민의 애로사항을 처리하고, 거기서 거둔 세금을 개경으로 옮겨오는 등의 국가업무를 맡았다.5* 원 간섭기 이후에도 존속한 것으로 보인다.6*
인천 남구 학익동 학림사지에서는 ‘延祐四年三月重修’명이 주목되는데, 1317년(충숙왕 5)에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학림사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輿地圖書』, 『仁川府邑誌』 등에 기록이 나와 있지 않아 그 변천 과정은 알 수 없다.7*
북한산 삼천사지는 661년 元曉大師가 창건한 이후 존속되다가 임란 이후 폐사됐다고 전해지나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고,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北漢誌』 등에 단편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8* 法相宗의 중심사찰로, 고려전기 승려인 大智國師 法鏡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銘文碑片 등 10∼13세기 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으며, ‘延祐五年/金哲○○○‘명은 중건 시기로 보여진다. ‘延祐五年’은 충숙왕 6년(1318)에 해당한다.
서울 진관동(진관사) 유적의 靑覃寺는 신라시대 華嚴十刹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이 효공왕 8년(904년)에 저술한 <法藏和尙傳>에는 의상대사와 제자들이 전국에 화엄십찰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청담사는 그 가운데 하나로 漢州 負兒山에 위치한다고 <법장화상전>에 기록되어 있다. 한주는 지금의 서울이며, 부아산은 북한산 줄기인 北岳의 옛 명칭이다.9*
파주 혜음원지는 『東文選』 권64 記 「惠陰寺新創記」에 혜음원의 창건배경과 그 과정, 창건과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혜음원은 남경과 개성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예종 17년(1122)에 건립된 국립숙박시설이며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別院도 축조되었다고 전한다.10* ‘惠陰寺’명과 함께 ’庚申二月三十日惠陰寺造匠斈明’명에서 와장인 ‘斈明’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남 춘궁리, 교산동과 하사창동 일대는11* 신라 진흥왕 14년(553) 新州였던 漢山州의 治所址로 주목되었다. 때문에 현재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에 위치한 대형 사찰(춘궁리 3층 및 5층 석탑)과 상사창리의 天王寺(춘궁리철조석가여래좌상)는 고려 초기의 호족인 왕규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된다. 현재 天王寺址는 목탑지가 남아 있는 대형 평지 절터이다. 문헌상으로는 고려 태조 대부터 조선 세종 대까지의 기록이 남아있고, 2차례 실시한 시굴조사를 통해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존속한 사찰터로 알려졌지만, 창건연대를 알려줄 만한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 「慧目山高達禪院國師元宗大師之碑」에 따르면, 元宗大師(869~ 958)가 ‘廣州 天王寺’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 『高麗史』, 『高麗史節要』에는 辛旽이 천왕사 탑에 모셔져 있던 불사리를 개경의 王輪寺로 옮겼으며,12* 조선 세종 28년(1446) 광주 天王寺의 舍利 10개를 闕內로 옮긴 일이 있었다.13*
이 지역에는 神福禪寺, 藥井寺, 慈化寺, 桐寺, 奉水寺, 禪法寺(태평 2년명 마애약사불좌상) 등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14* 이 지역에서는 이를 반영하는 ‘慈化寺’, ‘藥井寺’ ‘天王(寺)?’와 ‘客舍’ 伯士직을 가진 成達’, ‘哀宣 등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백사는 통일신라 종인 성덕대왕신종(771)의 ‘太博士’·‘次博士’, 禪林院鍾(804) ‘伯士’로부터 비롯한다. 伯士·助博士·大伯士 등으로 일컬어진 의 명칭은 기술자로서의 博士라는 이름은 본래 官匠에게 주어진 칭호로서,15* 대체로 4~6두품급의 신분층이었다.
안양 안양사(중초사)지에서는 ‘泰定’, ‘安養寺’의 명문이 주목된다. 원래 안양사는 中初寺였다. 「中初寺址 幢竿支柱」에 각자된 명문에는 신라 興德王 원년인 826년 8월 6일에 채석하여 그 다음해인 흥덕왕 2년(827) 2월 30일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중초사지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寺名과 조성시기, 참여자 명단 등이 있는 당간지주이다.16*
안양사는 신라 孝恭王 3년(900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하러 지나다 삼성산에 오색구름이 채색을 이루자 이를 이상히 여겨 가보던 중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세워진 사찰로 전해진다. 安養이란 불가에서 阿彌陀佛이 상주하는 淸淨한 極樂淨土의 세계를 말하며, 현세의 서쪽으로 10만억 佛土를 지나 있다는 즐거움만 있고 자유로운 이상향의 安養世界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태조 王建이 세운 崔瑩이 주지 惠謙과 함께 7층 塼塔을 중수하고 우왕이 내시 朴元桂를 보내 香을 내렸으며, 승려 1천명이 佛事를 올렸다는17* 기록이 있어 옛 안양사의 규모를 짐작케 하여준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八角圓堂의 浮屠와 귀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3호)가 있다. 귀부는 金富軾이 글을 짓고 명필 李元符가 쓴 비문이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태종이 충남 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 중 안양사에 들렸다는 기록이 있다.18*
고달사는 『奉恩本末寺誌』에 보면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圓鑑大師 玄昱(788~869)이 慧目山에 들어와 머물 당시의 정황이 양양 선림원지 禪林院址弘覺禪師塔碑(886)에 나와 있으며, 이후 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975)과 僊鳳寺大覺國師碑(1132)에서도 고달사지 번영기의 모습은 물론 점차 사세가 축소되어가는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그 후 절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金九容(1338~1384)의 『惕若齋集』에는 그가 驪江의 樓 위에서 고달사의 眞上人에게 보내는 시가 실려 있고,19* 韓修(1333~1384)의 『柳巷詩集』20*과 元天錫(1333~1384)의 『耘谷行錄』에는 고달사의 天台老人 2대 선사 義澄에게 보내는 시가 담겨 있어21* 최소한 14세기까지는 사찰이 경영되었음을 알려준다. 16세기를 전후해서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 『梵宇攷』에 보면 비로소 여주 고달사가 폐사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22* ‘高達寺’와 함께 ‘(太)?祖十年 太豆十石’, ‘一不絶絶 正而傳嵩福禪 眞空○(大)?禪師’, ‘丁○(亥)?年’명을 통해 ‘콩 10석’과 ‘眞空大禪師’, 干支 등을 확인할 수 있다. ‘眞空○(大)?禪師’는 고려 초 승려인 충담 (忠湛, 869년 ~ 940년) 으로 짐작되며, 고려 태조 때에도 왕사가 되었으며, 그가 죽자 태조가 친히 비문을 지어 당 태종의 글씨로 새긴 탑비를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세워주었다. 현재 보물 제463호인 탑비와 제365호인 탑 및 석관이 남아 있다. 따라서 ‘(太)?祖十年 太豆十石’은 태조 왕건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여주 원향사지의23* ‘元香寺瓦匠僧順文’명처럼, 승려 順文이 생산을 담당하기도 하였다.24* 이 명문으로만 보면 瓦匠僧의 존재도 주목된다. 와공집단으로 僧匠組織이 존재하였으며 순문을 대표하는 승장조직의 조직적 참여를 통해 사찰 조영이 이루어 진 것으로 해석된다.25*
한편, 사명만이 확인된 이천 갈산동 안흥사지의 ‘安興寺瓦草’, ‘○○辛卯四月九日造安○○’명 기와에서 알 수 있듯이, 안흥사에서 직접 기와를 수급하여 佛事를 일으켰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안흥사가 이천도호부 동쪽 4리에 위치하고 있다면서 1401년에 邊仁達이 安興亭舍에서 생도를 가르치다가 사찰을 학교로 사용할 수 없다는 여론에 밀려 별도로 향교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26* 안흥사는 조선 전기까지 사찰로 유지되다가 그 이후 어느 시점에 폐기됐을 것으로 보인다.27*
용인 마북리 건물지와 신갈 택지개발지(현화사지)는 ‘癸卯年玄化寺築(?)完念惠用’명을 통해 동일한 속성을 가진 지역으로 현화사가 위치한 곳으로 보인다.28* 마북동 중세취락과 서봉사지 역시 自福寺로서의 ‘瑞峯寺’명과 함께 ‘大匠之衤三造瑞峯’에서 와장인 ‘大匠’의 명칭이 보인다.29*
용인 전대리와 유운리 유적에서는 동일한 ‘香水寺’명과 함께 ‘大定二十六年’, 大匠金順造’ 등의 것이 있다.30* 향수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용인현 동쪽 10리에 향수사(香水寺)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17세기 중엽에 간행된 『東國輿地誌』에도 같은 기록이 있으나, 18세기 중엽이후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大匠 金順’의 명칭도 있다. 오산 가장리 유적31* 역시 ‘大德四年八月日/南書宣O官全’명과 함께 ‘香水寺瓦/大O金’명이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大定二十六年’은 명종 2년(1186)에 해당하고, ‘大德四年’은 충렬왕 25년(1300)에 해당한다.
평택의 비파산성은 평택시 서부의 안중면 용성3리 설창마을과 덕우1리 원덕마을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비파산(琵琶山 : 해발 102.2m)의 북쪽 정상부와 남동쪽 하단부의 용성리 뒷골을 포함하여 축조된 삼태기 모양의 토축 평산성이다. 고려 초기에 현성으로 축조되어 행정치소 및 해안방어의 중심기능을 했던 곳으로, 원래 백제의 上忽縣(車忽)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車城으로 고쳐 唐恩郡의 領縣으로 하였다가 940년(태조 23) 龍城으로 고쳤다. 따라서 ‘乾德三年’, ‘車城’, ‘○○縣’명은 평택의 옛 지명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乾德三年’은 광종 16년(965)에 해당한다. 또 평택 지산동 부락산 유적은32* ‘○幸述達心道恕○泰定四年丁(卯)會峰○○○○戶空淡圭戒’이나 문맥을 판단하기 어렵지만, ‘泰定四年丁(卯)’명은 충숙왕 14년(1327)에 해당한다.
안성 봉업사, 망이산성,33* 죽주산성,34* 장릉리 유적은35* 광종의 연호인 ‘峻豊四年’과 함께 竹州의 지명, ‘華太(次)寺’란 사찰명, 그리고 ‘太和’, ‘峻豊’, ‘乾德’, ‘太平興國’, ‘雍熙’ 등의 연호가 보인다. 간지명은 ‘乙酉’명기와를 제외한 나머지는 광종 때 간지이므로, 이때를 기와 제작시기로 보고 있다.36*
안성 奉業寺에 대한 문헌 기록은 『高麗史』와 『新增東國輿地勝覽』에 보이고 있다.37* 위 기록으로 고려시대 봉업사가 태조 왕건의 眞影과 관련이 있던 “眞殿寺院”이었음을 알 수 있다. 봉업사지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3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고려 이전 통일신라시대 후반 경에 창건되었으며 사찰명 역시‘奉業寺’가 아닌 ‘華太(次)寺’였던 것으로 보고되었다.38* ‘奉業寺’라는 사찰명이 처음 보이는 것은 1966년에 출토된 금속유물로 고려 문종35년(1081)에 제작된 “靑銅貞祐五年銘” 金鼓이다.39* 즉 1081년 이전에는 “奉業寺”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고려 이후 어느 시기부터 봉업사로 재창건되어 진전사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상한선을 고려 광종 2년(951)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기록에 전하는 인물명인 “能達”은 『高麗史』에 고려 초에 활동하였던 인물임을 확인하였다. 지명과 관련된 것으로 문헌에서 확인되는 것은 “大介山”, “竹州”, “皆次” 등이다. 이것은 봉업사지가 있는 죽산의 옛 지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40*
광주향교 수복사 부지의41* ‘○○泰定廣州○○’과 ‘○○二(?)年客舍○○’를 검토하면, ‘泰定二年’(1325, 충숙왕 12)으로 볼 수 있으나, 확인이 필요하다. 화성 당성의42* ‘○定四年’도 ‘(大·泰)定四年’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외에 양주 대모산성의 ‘德部舍’43*, 이천 갈산동의 ‘臨池院’, 양주 관아지의 ‘大自福寺’, 용인 마북동 중세취락의 ‘自福寺‘, 화성 반송리 중세유적의44* ‘西院’ 등도 주목된다.
한편, ‘瓦草’, 또는 ‘官草’ 관련 용례는 모두 8건에 해당한다. 인천 계양산성, 북한산 삼천사지, 양주 대모산성, 과천 일명사지, 용인 유운리, 안성 망이산성, 봉업사, 죽주산성 등에서 ‘官草’, ‘官’으로 해독하였다.45* 판독과정에서 ‘瓦’를 ‘官’, ‘凡’자로 誤讀한 까닭에 향후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官’ 1자만 독자적으로 나오는 경우는 정확한 판독이다. 이외에도 경산 중산동, 홍성 석성산성, 보령 천방유적, 익산 미륵사지, 경주 창림사지, 남한산성 행궁지의 ‘瓦’를 ‘凡’로 이해하였다. 또한 ‘官’와 ‘瓦’명 역시 마모된 명문의 경우 혼란을 가져오기 쉽다. 음성 망이산성의 ‘大官’, 화성 당성의 ‘大官’, 광주 무진고성의 ‘大官’ 등은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46* 이에 대한 판독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
1. 경기문화재연구원, 『고달사지』 Ⅱ, 2007, 834쪽 참조
2. 1872년 지방지도 「永宗地圖」(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3. (재)한국고고인류연구소, 『仁川 龍宮寺』 2017
4. 『高麗史』 世家34 忠肅王 元年 “癸丑 幸內願堂 次板上詩 命尹碩·僧戒松 及大小文臣·生徒·釋子和進”『高麗史節要』 卷24 忠肅王
元年 “幸內願堂 次板上詩 嬖臣護軍尹碩僧戒松等和進 戒松嘗有穢行 見黜於其徒 納妹於碩 碩薦于王 由是 出入無禁 史臣李衍宗曰
“王不與通儒講論治道而翫於末藝 每與尹碩戒松輩唱和 以抽黃對白爲務 何益於君道哉”
5. 『高麗史』 권3 세가3 성종 13년 8월 “以李承乾爲鴨江渡勾當使 尋遣河拱辰代之” 및 권77 志31 百官 2 外職 “勾當 成宗十三年 置鴨綠
渡勾當使 後諸津渡 皆有勾當”, 권123 列傳36 嬖幸 林貞杞 “令新島句當使韓允宜 漕運豪家田租與內庫米 並到禮成江 凡八十餘艘”
6. 『高麗史』 권106 열전19 諸臣 朴恒 “陸處者 不可不鎭撫 所以差勾當使也 曰 島民乘舟 成群往來 如生事何 恒曰 島嶼之人 以魚鼈爲衣
食 往來漁釣 非官吏所當禁也”
7. 인하 대학교 박물관,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인천광역시 남구, 남동구, 동구, 중구, 연수구, 2005
8. 서울역사박물관 『북한산 삼천사지 발굴조사보고서』 2011
9. 서울역사박물관, 『진관사 발굴조사 보고서』 2012 : 덕성여대 산학협력단·미술문화연구소, 『신라 화엄십찰 청담사지 제1차 학술대회-문화
재적 가치, 정비, 보존 및 활용』 자료집(2017. 9.22,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
10.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파주 혜음원지』 1차~4차 발굴조사 보고서, 2006 한백문화재연구원, 『파주 혜음원지』 6~10차 발굴보
고서, 2014~2017
11. 서해문화재연구원, 『하남 하사창동 유적』 III~Ⅳ, 2013, 2014 : 『하남시 하사창동 316-1번지내 유적』 2016 : 역사문화재연구원, 『하남
하사창동 393번지』 2018 : 하남역사박물관, 『하남 하사창동 354번지 유적』 2017, 『하남시 춘궁동 271-17번지 유적』 2016, 『하남
춘궁동 365-1번지 유적』 2017, 『하남시 춘궁동 264-1번지 유적』 2015, 『하남시 춘궁동 349-3,8번지 유적』 2016, 『하남시 항동 건
물지 유적』 2016 : 한강문화재연구원, 『광주 하남3지구 유적』 2017 : 한백문화재연구원, 『하남 덕풍동ㆍ풍산동 유적 발굴조사 보고
서』 2016 : 한양대학교박물관, 『하남 광주향교 경관광장 유적』 2017, 『하남 이성산성 경관광장 유적』 2018 : 혜안문화재연구원, 『하
남 하사창동 343-2번지 외 1필지 유적』 2018 : 화랑문화재연구원, 『하남 천왕사지』 I~IV, 2016, 2017. 『하남 춘궁동 301-1번지 유적』
2017
12. 『高麗史』 권132 열전45 반역 辛旽
13. 『世宗實錄』 권112 세종 28년 4월 23일(경신)
14. 황보경, 「河南地域 佛敎遺蹟에 대한 硏究」, 『고문화』 56, 2000
15. 朴敬源, 1981 「高麗鑄金匠考-韓仲敍와 그의 作品-」, 『考古美術』 149, 13~16쪽.
16. 한울문화재연구원, 『安養寺址 : 안양 구 유유부지 발굴조사』 2013
17.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0 경기 衿川縣
18. 『太宗實錄』 권22권 태종 11년 9월 12일(경오)
19. 『惕若齋先生學吟集』 上卷 「驪江樓上 寄高達眞上人」
20. 『柳巷先生詩集』 詩 「題高達寺」
21. 『耘谷行錄』 권3 「奉寄高達寺李大禪師 義澄」
22. 경기문화재연구원, 『고달사지』 Ⅰ~ Ⅳ-여주 고달사지 1~8차 발굴조사 보고서, 2000~2016
23. 경기문화재연구원, 『원향사』 2003
24. 도문선, 앞의 논문. 273~274쪽 참조.
25. 윤용희, 2001 『南漢江流域 出土 高麗前期 평기와 考察』,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6. 『新增東國輿地勝覽』 권8 경기 利川都護府
27. 중앙문화재연구원 『利川 葛山洞遺蹟』 2007
28. 세종대학교, 『龍仁 麻北里 : 건물지유적 발굴조사보고서』 2003
29. 한맥문화재연구원, 『용인 서봉사지 시굴 및 1차 발굴조사』Ⅰ·Ⅱ 2015·2016
30. 역사문화재연구원, 『용인 전대리 산21-16번지 주택부지 내 유적』 : 기호문화재연구원, 『龍仁 前垈里, 留雲里 遺蹟 : 삼성 에버랜드 유원
지 사업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2011
31. 경기문화재연구원, 『오산 가장동 유적』 2008
32. 중앙문화재연구원, 『平澤 芝山洞 負樂山遺蹟』 2016
33. 단국대 박물관 『안성 망이산성』 1~3차 발굴조사 보고서, 1992~2002 : 중원문화재연구원, 『음성 망이산성』 2009
34.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안성 죽주산성 남벽 정비구간 발굴조사 보고서」 2006 : 한백문화재연구원, 『안성 죽주산성 : 2~4차 발굴
조사 보고서』 2012
35. 중앙문화재연구원, 『안성 장능리사지』 2008
36. 김병희, 「문자기와를 통한 봉업사의 위상」, 『고려 태조 진전사원 봉업사의 역사적 가치와 보존방안』 2017 안성 봉업사지 발굴20주년 국제
학술대회(2017. 9. 22(금) 안성시립중앙도서관 2층 다목적홀) 자료집, 봉업사지 발굴20주년 기념위원회
37. 『高麗史』권40 세가40, 공민왕 12년 2월조, 『新增東國與地勝覽』 권8 경기도 죽산현 고적조.
38. 경기도박물관, 『奉業寺』 2002
39. 金鼓에 기록된 명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貞祐五年歲在丁丑名字沙門粲謙住于此竹州奉業寺發源鑄成印上大匠夫金大匠阿角三大
匠景文都邑大師洪植”
40. 김병희, 「문자기와를 통한 봉업사의 위상」, 『고려 태조 진전사원 봉업사의 역사적 가치와 보존방안』 2017 안성 봉업사지 발굴20주년 국제
학술대회(2017. 9. 22(금) 안성시립중앙도서관 2층 다목적홀) 자료집, 봉업사지 발굴20주년 기념위원회
41. 한양대학교박물관, 『廣州鄕校 : 發掘調査報告書』 2003
42. 한양대학교박물관, 『唐城』 1次 發掘調査報告書, 2次 發掘調査報告書, 1998, 2001
43. 한림대학교 박물관, 『楊州大母山城』 : 發掘報告書 1990
44. 경기문화재연구원, 『화성 반송리 중세유적』 2006
45. 김병희는 ‘官草’명을 “官에서 제작한 官窯” 또는 “官의 주도로 제작한 기와”로 보았다. 그리고 지명에서 ‘지명+官’과 연관하면 ‘지명+관청’에
공급하던 기와라는 뜻이 있으며, ‘직급+官’명은 기와를 불사한 지방관이나 유력세력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기와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凡
草’명은 ‘官草’와 대응되는 개념에서 ‘官’에 의해 제작된 기와가 아닌 ‘민간요’ 또는 ‘일반인의 주도로 의해 제작된 기와’라는 뜻으로 해석하였
다(김병희, 「안성 봉업사지 출토 고려전기 명문기와 연구」 단국대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1). 김호준은 ‘草’명을 기와로 해석하여, ‘官草’,
‘城草’, ‘大藏當草’, ‘舍草’명은 제작처와 소비처를 구분한 해석과 ‘凡草’명도 ‘민간요’ 또는 ‘일반인의 주도로 의해 제작된 기와로 해석하는 것
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김호준, 앞 논문, 2013).
46. 홍영의, 「고려시대 명문(銘文) 기와의 발굴 성과와 과제」, 『한국중세사연구』4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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