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실학박물관

‘정약용 열수에 돌아오다’ 기획연재(최종회)

2018-04-16 ~ 2018-07-15 / 다산 정약용과 열수_문제의 근원과 이치를 좇아




다산 정약용과 열수

문제의 근원과 이치를 좇아


다산 정약용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한강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강을 ‘열수洌水’라 불렀다. 다산의 5대조 정시윤(1646-1713)이 서울 정계에서 물러나 한강가에 정착하면서 열수는 나주 정씨들의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었다.

 『다산시문집』권4에는 고향집이 있는 열수를 그리워하는 다산의 시가 전한다.


저 유산 아래는 내가 사는 집이 있고 끝없이 넓은 열수에는 물고기가 가득하네

酉山之下 爰有我廬 洌之洋洋 有牣其魚.



  이 시 말미에 다산은 하늘을 나는 새에 빙의하여 날개 짓하여 금세 고향땅에 다다를 수 있는 것처럼 읊었다. 그러나 이내 날다가 화살에 맞아 떨어질까 두렵다며 고백하고는 그물에 걸린 토끼를 보며 유배 중인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1818년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온 이후 다산은 스스로를 가리켜 ‘열수옹洌水翁’․‘열수산인洌水山人’․‘열로洌老’․‘열초洌樵’라 하여 한강에 사는 사람임을 드러냈다. “너희들은 열수가에서 태어났으니 누구를 만나면 나는 열수가에 사는 정아무개라고 소개하거라”고 두 아들에게 당부할 정도로 고향에 애착을 가졌다.

   다산이 태어난 마재마을은 오늘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현 행정구역으로는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이다. 이 지역은 북한강과 남한강의 합류 지점인 양수리 일대와 맞닿아 있다. 북한강 너머에는 검단산과 예봉산, 운길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팔당댐, 남쪽으로 뻗은 능선에는 용마산이 솟아 있으며 서쪽으로는 중부고속도로가 지난다.

  수도권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이곳에 대해 다산은 “검단산은 험난하기 짝이 없고, 열수는 유유하여 끝이 없다((黔山何其險 洌水何其長)”고 했다. 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에 걸쳐있는 검단산은 산세의 막힘이 없어 남한강·북한강과 팔당댐이 한 눈에 보인다. 이곳은 과거 한강을 이용하여 한양으로 들어오는 지방 물산物産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검단산 입구에 창우동倉隅洞이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는데, 아마 물산을 보관했던 창고지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한강을 열수라 부르다

  어린 시절부터 한강을 보고자란 탓인지 다산은 하천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는 한반도의 하천명이 특별한 기준이 없이 어떤 것은 하河라고 하고 어떤 것은 수水라 하는 등 통일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는 기존의 ‘강’ 대신 ‘수’로 하천명을 통일했다. 대동강은 패수浿水, 압록강은 녹수綠水, 청천강은 살수薩水, 한강은 열수라 불렀다.



  우리나라 큰 하천으로서 북서쪽은 녹수(압록강)이고, 다음 북쪽은 살수(청천강), 다음 북쪽으로 패수(대동강), 다음 북쪽으로 저수(예성강), 다음 북쪽으로 대수(임진강)이고, 경강은 열수(남북강)이며,

다음 남쪽으로 사수(백마강), 다음 남쪽은 영수(영산강)이다.


  다산은 왜 한강을 열수라고 불렀을까? 그는 한강의 옛 이름은 열수인데, 한 무제가 위만을 평정하고 열수 이북에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남쪽의 삼한 사람들이 열수를 ‘한수漢水’라 불렀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처럼 크다는 의미의 한강이 아닌, 한사군의 경계가 되는 강이기에 삼한사람들이 ‘한강漢江’이라 불렀다는 견해다. 또한 열수의 근원은 남북 두 가닥이 있으니 북쪽 물은 ‘산수汕水’며, 남쪽 물은 ‘습수濕水’라 했다. 그 근거는 『사기史記』 <조선전>이다. 이 책에 "조선에는 습수·열수·산수의 세 물이 있어 이것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했다.


  다산은 습수는 남한강, 산수는 북한강, 열수는 한강인 것으로 추정했다. 열수는 고조선의 중심을 흐른 강이다. 이 열수를 한강으로 비정(比定)한 것은 오늘날 고조선 연구 성과에 비추어보면 오류가 있다. 당시 그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한계 때문이지 싶다.

다산이 조선의 하천 명을 개칭한 것은 나름 소신에서 출발한 것이다. 평소 조선의 언어나 문자에 대해 오류를 잡아내고 표준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가 쓴 󰡔아언각비雅言覺非󰡕는 이런 소신의 결과물이다. ‘아언雅言’이란 바른말, 즉 표준이 되는 말이란 뜻을 담고 있다. ‘아언각비’란 바른 말로써 그릇된 말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이 책은 당시 잘못 사용되고 있는 말과 글의 참뜻과 어원을 밝힌 것으로, 해배 후인 1819년 겨울에 완성되었다.

 『아언각비』 서문에 다산은 “학學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학이란 무엇인가? 학이란 깨닫는 것이다.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 깨닫는 것은 잘못된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잘못된 것은 어떻게 깨닫는가? 바른말에서 깨달아야 한다.




  다산은 사슴을 말이라고 했다가 잘못을 깨달아 다시 사슴으로 고치는 것이 곧 ‘학學’이라고 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야말로 학에 이르는 과정이다. 실제 지식은 전해 듣는 것이 많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많다. 다산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각종 문헌을 검토하며 말과 글의 어원을 찾았고, 그런 취지에서 조선의 하천명도 바꾸었다고 본다.

  오늘날 하천은 경제적 이익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지역 경제에 큰 이익을 주었다. 다산은 큰 하천에는 어량魚梁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또 선박이 모여드는 곳이니 지역에 주는 이익이 매우 크다고 했다. 두 강이 만나는 접점엔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 실제로 그가 살았던 열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으로 조선시대 유명한 어장漁場 지역이었다.

  다산은 지역 경계는 자연경계 즉 큰 산이나 냇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에게서 열수는 한반도를 가르는 중요한 경계가 되는 하천이었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인데다가 하천들은 씨줄이 되어 조선시대에는 강과 바다에 많은 배들이 다녔다. 각 지역의 물산들이 모두 배로 운반되었다. 다산은 “나라에는 수레가 없고 망아지가 달리는 풍속이 없다. 모든 일용 백물을 운반하는 방법이 배 아니면 이고 나르는 두 가지뿐이니, 배의 쓰임이 매우 긴요하다.”고 했다. 강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식견이 아닐 수 없다.




 


소동파의 아미산도와 다산의 초계도

  다산은 유배지인 강진을 떠나 1818년 음력 9월 14일 마재 고향집에 돌아왔다. 열여덟 해를 유배지에서 보낸 그는 다시 같은 햇수를 고향에서 보냈다. 18년 만에 돌아온 고향집 ‘여유당’은 실로 어머니 품 같았으리라.

 다산에게 고향 마재 마을 앞을 흐르는 소내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소내는 초계苕溪 혹은 초천苕川, 우천牛川이라고도 불렀다. 그물치기와 낚시는 그의 일상이었고, 집 뒤의 철마산, 운길산과 수종사, 강 너머의 천진암 등은 부친을 모시고, 형제들과 함께, 어느 때는 벗들과, 때론 홀로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강진 유배 생활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다 지친 다산이 낸 아이디어는 바로 소식蘇軾의 ‘아미산도峨嵋山圖’였다. 소식은 소동파蘇東坡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송나라 문인이다. 소동파는 1097년 신법당의 미움을 받아 중국 최남단인 해남도까지 귀양 갔다. 고향 생각에 소동파는 아미산을 그려 놓고 자신의 향수병을 달랬다. 중국 사천성에 위치한 아미산은 멀리서 보이는 산세가 마치 여인 눈썹처럼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다. 소동파는 여인보다 아름다운 고향산 아미산에서 한시를 읽고 지었다.

  다산은 소동파의 아미산도를 떠올리며 고향집 앞을 흐르는 소내를 그렸다. 이 과정이 ‘희작초계도戲作苕溪圖’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희작초계도를 번역하면 ‘거칠게나마 그려본 소내’란 뜻이다.


소동파는 남해 땅에 귀양가서

아미산(峨嵋山)을 그려놓고 병이 나았다지

나도 지금 소내[苕溪]를 그려 놓고 싶은데

이곳엔 화가가 없으니 누구에게 부탁할까

시험 삼아 수묵으로 밑그림을 그려 보니

먹 자국만 낭자하니 먹칠되고 말았구나.

밑그림 몇 번 고치다 손에 익어졌지만

산 모양과 물빛은 여전히 어렴풋하네

- 정약용 시, <희작초계도>



다산은 초계도를 다산초당에 걸어 놓고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선한 그림 속 고향은 갈수 없는 곳이었다. 이를 두고 다산은 “소나무·회나무 덮힌 문은 우리 정자, 배꽃 한껏 핀 정원은 우리 집, 내 집이 저긴데도 갈 수 없으니 이 그림이 나의 마음을 방황하게 하네.”라고 읊었다. 고향집을 그려 놓고 보며 마음을 달래보려 했지만, 갈 수 없는 현실이 오히려 더 큰 슬픔을 가져다 준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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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성희 수석학예연구사(실학박물관 학예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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