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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인평대군 치제문비 麟平大君 致祭文碑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5호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인조의 셋째 아들이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 이요李㴭(1622~1658)의 죽음을 애도하며 5명의 임금이 지은 제문을 새긴 비석 2기를 가리킨다.

인평대군의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인조를 호종扈從하였고, 1640년(인조18)에는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후 사은사謝恩使로 네 차례나 청나라에 다녀왔지만 병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학문에도 뛰어났고 서화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송계집松溪集』이 있는데 영조의 명으로 1774년(영조50)에 간행되었다. 그의 묘는 광주廣州에 있었지만 1693년(숙종19)에 포천 왕방산旺方山으로 이장되었고, 묘소 왼쪽에는 2기의 비가 전하고 있다.


인평대군 치제문비 비각,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비각 내 인평대군 치제문비,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하나는 묘를 이장할 때 세운 것으로 전면에는 효종이 지은 제문을 효종 어찰에서 집자集字하여 새겼고 두전頭篆 비석 머리 부분에 전서로 새긴 비석의 명칭은 ‛효묘어제어필孝廟御製御筆’이다. 뒷면엔 숙종의 친필 제문을 새겼으며 두전은 ‛숙묘어제어필肅廟御製御筆’이다. 비문 말미에는 대군의 손자 양원군 이환陽原君李煥의 추기追記가 있다. 이에 따르면 1693년에 비석을 준비했지만 바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가 1724년(경종4) 서평군 이요西平君李橈가 쓴 두전을 더해 세운 것이다.


 

<인평대군 치제문비> 효묘어제어필, 숙묘어제어필,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또 하나의 비석은 영조·정조·순조의 친필 제문을 새긴 것이다. 이 비석은 독특하게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는 1762년 (영조38)과 1765년(영조41)의 영조 제문, 중단에는 1792년(정조16)의 정조 제문, 하단에 1825년(순조25)의 순조 제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정조는 1792년에 인평대군 묘정墓庭에 영조와 정조의 제문을 새긴 비를 새우라는 명을 내렸다. 아울러 호조에게는 물자를 공급케 하였고, 경기감영에는 비각을 한 칸 지어 두 비석을 보호하도록 했다. 


 

<인평대군 치제문비> 영묘어제어필, 당저어제어필, 영묘어제어필 비석 후면,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특이한 점은 비석 전면을 3등분하여 위에는 영조의 제문을, 중간에는 자신의 비문을 새기게 했는데, 하단과 뒷면은 비워두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이후 순조가 친필 제문을 내리자 비어있던 하단에 새겼다. 영조 제문의 두전이 ‛영묘어제어필英廟御製御筆’인데 반해, 정조와 순조 제문의 두전은 모두 ‛당저어제어필當宁御製御筆’로 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만 순조의 제문을 새길 때 정조의 두전 앞에는 ‘정묘正廟’라는 글자를 해서楷書로 작게 새겨 ‘당저當宁(현재 임금의 뜻)’의 중복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했다. 인평대군 치제문비는 한 인물의 묘소에 다섯 임금의 친필 제문이 새겨진 비석으로 조선시대의 유일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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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시대/ 조선시대

    규모/ 2기

    / 1비 200×88×34cm, 2비 204×87×38cm

    재질/ 석재(화강암, 오석)

    주소/ 포천시 신북면 신평로222번길 12-48

    지정일/ 1978.10.10

    소유자/ 전주이씨 인평대군파 종중

    관리자/ 이씨종중(이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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