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경기천년 장인발굴단 23

신유진, 고양 , 민예기술

북만 들면 신이나는 재간꾼, 심금을 울리는 회방아소리의 고수





고양시 일산동구 성석동 684번지에서 출생한 신유희 선생은 당시 너나없이 힘들었던 나라 형편과 일찍 부친을 잃은 상황이었기에 어린 나이부터 매우 고생스런 삶을 살았다. 하지만 타고난 낙천적인 성격과 사람을 좋아하고 소리를 잘했기에 그의 삶에는 늘 즐거웠다. 그는 30대 중반부터 선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워낙 소리를 잘했기에 이 동네 영자였던 이정인 선생이 “너 목청도 좋고 기억력도 좋으니 배워봐라” 며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신유희 선생에게 이정인 선생은 하늘 같은 존재였고, 최고의 스승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초상이 나면 이정인 선생은 젊은 신유희를 데리고 다니며 회방아 다지는 소리를 가르쳤다. 인근 마을뿐만 아니라 더 먼 곳에서도 초상이 나면 이들을 데리러 왔다고 한다. 그렇게 초상집에 가서 회방아다지는 소리를 하고 얻은 수입으로 쌀을 사다 먹기도 했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인지, 그가 북을 덩덩 치면서 회방아 다질 때 회심곡을 부르면 울지 않는 이가 없었고 그가 없으면 장례를 못치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젊었던 60~70년대 초만 해도 모내기와 김매기할 때 두레패가 마을 일을 몰아 했고, 풍물을 치며 논으로 함께 일하러 다니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조사였던 그는 새벽에 제일 먼저 일어나 마을 창고에 가서 태징을 3번 쳐서 일꾼들을 깨웠다. 두레 대원들이 호미들고 우장을 메고 다 모이면 35~36명 정도였는데 다들 막걸리 한 잔씩 먹고 나서 재비를 치며 그 날 일하러 가기로 된 논으로 향했다. 논에 도착해서는 제일 아래에 징을 놓고 그 위에 장구와 북을 올려놓고, 제금은 장구의 줄 사이에 끼웠다. 상쇠는 농기줄에 꽹가리를 매달았다. 다른 악기들을 정리해놓고 그가 북 하나만 들고 논으로 들어가 선소리를 하면 일꾼들이 그의 소리에 맞춰 모를 내거나 김을 맸다. “내 소리가 잘 맞아야 모든 게 이뤄지기 때문에 책임도 있었지만 나는 노래하는 게 좋아서 힘든 줄 몰랐다” 고 한다. 실제로는 종일 노래하는 것이 논에서 일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지만 흥이 많고 소리하는 것이 좋았던 그는 고된 일상도 “재미났다.” 고 한다.


목청도 좋고 기억력도 좋았던 그는 영자를 모시는 조사로서 두레패 관련한 일을 하면서 논일하러 갔을 때는 농부들을 위해 선소리를 도맡아 했다. 오랜 세월 그가 선소리를 하며 이끌었고, 이후 진밭두레보존회 회장을 역임하며 맥을 이었던 성석동 진밭두레패는 2005년 고양시 무형문화재 42호로 지정되어 고양시 전통농경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도 진밭두레패가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북만 들면 신이 나는 재간꾼이며, 고양시의 진정한 소리꾼인 신유희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적극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유진 선생은 진밭두레패의 마지막 조사였다.

회방아 소리와 선소리의 최고수였다. 그가 없으면 장사를 치르지 못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지금도 마을 청년들에게 소리를 전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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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 경기도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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