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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韓濊之地'의 형성과 임진강 유역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이 글은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 임진강 유역, 분단과 평화의 고고학'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韓濊之地'의 형성과 임진강 유역


윤용구(인천도시공사)


Ⅰ. 머리말

Ⅱ. 《삼국지》 한전의 '韓濊'

Ⅲ. 〈광개토왕능비문〉의 '新來韓穢'

Ⅳ. 《수서》 신라전의 '韓獩之地'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중부고고학회로부터 부여받은 과제는 「삼국 전야기의 임진강 유역」이다. 임진강 유역을 비 롯한 경기북부 지역의 고대사 복원에 있어서 문헌사 분야의 제반 문제를 통해 물질문화 해석의 다양성을 위한 토대로 삼고자 한 것이다. 사실 임진강 유역은 인접한 한강 유역과 함께 남북 간 물류와 人流가 교차하는 곳이고, 기원 전후하여 뚜렷한 존재를 드러낸 馬韓과 고대국가로 성장 한 백제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論題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내 연구자에 의한 마한백제사 연구의 토대가 만들어진1) 1980년대 이후 한반도 중부지역 은 마한사회의 형성과 백제의 성장, 그리고 삼국간 쟁패의 무대로서 주목을 받아왔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마한사회 내에서 伯濟國의 존재양태나, 百濟 건국의 시기, 주도세력의 실체나 문 화의 계통 등 기초적인 문제조차 여전히 논란이다.


  문헌과 물질자료 이해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원인으로는 첫째, 한반도 중부지역의 고대사를 백제의 성장에 의해 지배된 무대로 이해하는 점이다. 『삼국지』와 『진서』 마한전에는 4세기 전 반까지도 백제의 존재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의거 3세기 중엽 중부지역의 맹 주가 백제였다는 이해에 따라 마한 정치체의 다양한 역사상이 사상되고 있는 것이다. 백제 고 이왕 기록에 따라 만들어진 백제상은 실제 물질자료의 편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둘째, 마한사회 내에서 경기북부를 포함한 한강유역이 차지하는 지역적 특색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혼란 이다. 일찍이 한강유역을 馬韓과 구별되는 여러 流移民集團으로 구성된 辰韓이라거나(李丙燾 1936), ‘예계의 중도유형문화’가 마한계 문화와 구별되는 중부지방 기층문화하는 해석(朴淳發 1996)이 그것이다. 한강유역을 辰韓으로 보지 않으면서 문헌과 물질자료를 결합하여 해석하 려는 것이 현재의 추세지만(尹善泰 2001 ; 宋滿榮 2003 ; 권오영 2009) 견해차를 좁힐 정도의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은 형편이다.


  그렇다고 한반도 중부지방 삼국 전야기연구의 문제로 제기한 것이 적절한지, 나아가 해결의 실마리는 무엇인가는 필자가 감당할 문제가 아니다. 다 아는 대로 史書와 개별 사실에 대한 분 석에 치중하여 왔을 뿐이다. 담론에 의하지 않고 개별 사실의 이해를 바탕으로 그 사이의 연관 성을 추구할 때, 해석의 다양성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왔다. 이런 측면에서 기원 2세기 후반 처음 등장한 ‘韓濊’의 실체와 그 추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 아는 대로 ‘韓濊’는 후한 말 낙랑군의 지배력 이완에 따라 군현민이 韓國으로 대거 흘러 들어가고, 동시에 옥저·동예지역이 고구려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濊系住民들이 남하하면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역적으로 한반도 중부지방의 경기북부와 북한강과 남한강 에 걸치는 지역이 대상이다. 최근 10년간 이에 대한 학문적 토대가 축적되고 있지만(金昌錫 2008·2013·2014·2018) 『三國志』 韓傳에 처음 나타나는 ‘韓濊彊盛’의 用字 풀이로부터, 「광개 토왕능비」의 ‘新來韓濊’의 의미와 해석은 견해차이가 심하다. 또한 『수서』 신라전에 보이는 ‘韓 濊之地’는 ‘韓濊’출현이후 ‘新來韓穢’를 거쳐 6세기 중엽이후 변화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동 안 주목하지 못하였다.


Ⅱ. 『삼국지』 한전의 ‘韓濊’


1) ‘韓濊’: 稱, 通稱, 連稱


【사료1】 『삼국지』 30, 韓傳

① 桓靈之末, 韓濊强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②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 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사료1〕은 후한 말 韓濊가 강성해져 군현의 통제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군현민이 韓國으 로 유입되는 상황과(①), 이를 회복하기 위해 대방군을 설치하고 韓濊를 정벌하여 흩어진 군현민을 수습한 결과 韓이 다시 군현에 복속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②)


  여기서 두 차례 나오는 ‘韓濊’는 ‘한과 예’(韓·濊)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2) 『후한서』 한전의 독법을 따른 것이다.3) 그런데 ‘한과 예’로 따로 읽으면 위의 사료는 여러 모순이 생긴다. 곧 ‘韓 과 濊’가 강성하여 군현민 통제가 어려워져 발생한 流民이 韓國으로만 유입된 점, 그럼에도 군 대를 일으켜 한과 濊까지 정벌하였지만 정작 대방군에 복속된 것은 濊가 빠진 韓만인 점이 설 명이 되지 않는다.


  이 같은 이유에서 韓濊를 韓과 韓濊를 通稱이거나(권오영 2009), 韓과 濊가 혼유(혼융?)된 정치체(송만영 2003·2010)로 존재하였다는 이해도 있다. 좀 더 부연하면 ‘韓 같은 濊’, 때로는 ‘韓과 濊’라는 의미에서 한예가 사용된 것은 아닌지 추정하고, 그 범위는 동해안의 濊를 제외한 영서와 서울-경기, 강원 영서지역의 집단의 통칭으로 보았다.(권오영 2009 : 41〜42) 통칭이 라 하면서도 韓과 濊는 별개의 종족 표기로 보고 있는데, 이에 따른다면 ①과 ②에서 韓濊와 韓 國이 구분된 점을 설명할 수 없다.


  최근 사료의 ①과 ②에 모두 濊가 사건의 발단에 등장하지만, 결말에는 韓濊가 보이지 않는 다는 점에서, 한과 예는 별개의 종족을 나타낸다는 견해(김재홍 2017)도 있다. 그러나 ②의 ‘興 兵伐韓濊’는 사건의 발단이 아니라, ①의 ‘韓濊彊盛’에 따른 군현체제의 붕괴를 수습하고 군현 민 귀환을 위한 해결책으로 시행된 것이다. 예와 한이 별개의 존재라면 군현민 유입도 없는데, 정벌의 대상이 될 이유를 찾기 어렵게 된다.


2) 韓濊 : ‘韓地 내의 濊’

  ‘韓濊’는 ‘韓地 內의 濊’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 경우 韓은 지역명 韓國(韓地)으로, 濊는 그곳에 거주하는 濊民이다. 중국사서의 이민족 표기는 2가지 방식이 사용되었다.


【사료2】

① 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内附, 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内屬, 東夷馬韓新彌諸國 鮸出薉邪頭國, 韓那奚等數十國各率種落降, 樂浪外夷韓濊貊, 各率其屬來朝貢

② 夫祖薉君, 不耐濊侯(王), 狗邪韓國, 臣濆沽韓, 嶺東濊(東濊), 小水貊, 大水貊


  ①은 종족명이 지명(정치체) 앞에 오는 것으로 本紀의 기록에 흔히 사용되는 방법이다. ②는 지명(정치체) 다음에 종족명이 배치되는 형식으로 列傳에 주로 사용된다. 嶺東濊(東濊)의 사례 처럼 韓濊도 지명(정치체) 다음에 종족명을 쓴 유형이라 할 것이다. ‘夫祖薉君’, ‘不耐濊’(國· 侯·王)의 경우를 비롯하여 ‘臣濆沽韓’, ‘狗耶韓國’, 小水貊, 大水貊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표현 이다.


3) 韓濊의 범위 : 郡縣故地, 近郡諸國


【사료 3】 『삼국지』 30, 韓傳

① 桓靈之末, 韓濊强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 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② 其北方近郡諸國 差曉禮俗, 其遠處, 直如囚徒奴婢相聚.


  【사료 3】은 3세기 초 ‘韓濊彊盛’에 따른 ‘伐韓濊’의 대상이 된 범위는 우선 韓地로 인식되고 있 었다는 점, 그리고 帶方郡이 설치된 곳과 가까운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①) 대방군의 남쪽 경계는 과거 진번군의 廢縣 8곳이 연접된 곳이다. 한예는 진번군 退縮에 따른 郡縣故地와 그와 가까운 韓에 이르는 완충지대가 포함될 것이다. 군현에 가까운 마한의 近郡諸國이 ‘韓濊彊盛’에 따른 ‘伐韓濊’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韓濊는 본래 韓地가 아닌 곳도 포함되었다고 생각된다. 2세기 중반을 지나면 서 낙랑군 남부지역의 荒地化가 급속히 진행되면서,4) 韓과의 완충지대와 郡縣故地까지 韓國의 범위가 확장된 결과였다. 이는 韓의 지배력이 확장되었다기보다 군현 측에서 韓의 居住空間처 럼 인식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경기북부의 대방군 방면만이 아니라 북한강 상류의 옛 임둔군 고지에서도 마찬가지 였을 것 이다. 그곳의 주민을 모두 먼 곳에서 이동해 온 流移民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濊民 의 구성 분자도 실제는 동일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삼국지』 예전의 서 술 대상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된다. 3세기 경기북부와 북한강 상류는 東濊의 일부가 아니라 ‘韓 濊’라 불러야 할 것이다. 2세기 후반 군현지배의 후퇴에 따라 형성된 韓濊는 ‘한지 내의 예민’을 가리켰지만, 점차 군현에 인접한 마한의 ‘近郡諸國’으로 확대되면서 지역 개념으로 변모해 갔다.


Ⅲ. 「광개토왕능비문」의 ‘新來韓穢’


  「광개토왕능비」(이하 「능비」로 약함)에는 396년 광개토왕이 백제로의 親征을 감행하여 함락 시킨 58개성의 城名과 함께, 그 가운데 36곳의 복속민을 수묘인으로 차출한 기록이 적혀있다. 그리고 수묘인으로 차출된 백제주민을 ‘新來韓穢’로 표현하였다. 백제를 ‘百殘’이란 卑稱을 사용 하는가 하면, 그 주민에 대하여 ‘韓穢’라는 漢代이래 중국인이 붙인 종족명으로 표기하였다. 백 제 주민에 대한 백제 왕실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라 하겠다.


  그 동안 수묘인으로 기록된 ‘新來韓穢’는 광개토왕의 유언에 따라 그가 친정한 396년에 함락 한 58개성에서 차출하였다. 일부 다른 지역명이 보이지만, 대부분 58개 城名과 일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36곳 가운데 31곳이 〜城, 4곳이 〜韓, 기타 한 곳(勾牟客頭)이다. 31곳의 성명 가운데는 巴奴城韓, 舍蔦城韓濊 두 곳이 城名 뒤에 韓 혹은 韓穢를 덧붙였다. 대체로 성명이 붙 은 것은 백제의 성 지배를 계승한 것으로, 〜韓은 고구려가 새로 편재한 종족 지배의 모습이며, 성명 뒤에 붙은 종족명이 붙은 巴奴城韓, 舍蔦城韓濊는 城 지배와 함께 징발 대상을 특정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武田幸男 1977)


  ‘新來韓穢’ 36곳의 위치와 城名과 종족명을 부가한 차이를 통해 고구려의 백제지역 지배방식 에 대해서는 수다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城名이 부가된 지역은 대부분 韓人이라 거나(武田 幸男 1977), 반대로 예민도 상당부분 차지할 것이라는 견해(金昌錫 2013·2018)로 나뉘어 있 다. 또한 豆比鴨岑韓·求底韓·客賢韓·巴奴城韓·百殘南居韓의 경우는 58성 가운데 보이지 않는 지명이다. 이 때문에 백제 영역 밖의 복속민이라거나(孔錫龜 2013) 광개토왕에게 백제왕 이 항복하면서 받친 生口의 출신지(趙法宗 1995) 혹은 영산강유역의 복속민(李道學 2013)으로 보기도 한다. 舍蔦城韓穢의 경우 58성 가운데 古舍蔦城을 개편한 것인지, 아니면 별개의 성에 韓穢의 집단 거주지가 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처럼 新來韓穢의 지배방식에 대한 논란과 함께 이들은 차출하게된 396년 광개토왕의 南征 地域도 이견이 있다. 『삼국사기』 광개토왕조에 의거하여 임진강유역에서 한강 하류역에 미친다 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고 거기에 58성 중 하나인 ‘古牟婁城’이 확인되 면서 남한강 중상류까지도 포함하는 견해가 우세해 지고 있다.(장창은 2014) 396년 신라로 통 하는 내륙교통로의 주요 거점은 확보하였을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비」의 新來韓 穢의 공간적 범위는 경기북부와 한강, 남한강유역에 걸쳐있는 셈이다. 『삼국지』 한전의 ‘韓濊’보 다 남한강유역이 늘어난 범위를 지칭하게 되었다.


  「능비」의 수묘인과 특히 新來韓穢의 표기를 두고 고구려의 영역지배 방식에 대한 많은 논란 이 있지만, ‘韓穢’를 種族 표기라 보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韓穢’라는 用字에서 종족의 의미를 부정할 수 없으나, 지나친 해석도 없지 않다. 예컨대 韓 혹은 韓穢 표기와 관련 없이 그 전 체를 新來韓穢라 표현하였음에도, ‘舍蔦城韓穢’한 사례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가 그것이다.5)


  「능비」의 ‘新來韓穢’는 고구려가 주변에 대한 공간인식, 곧 天下觀에 따른 표현으로 보아야 한 다는 생각이다.(여호규 2009) ‘新來韓穢’는 새로 확보한 종족과 그 人民이기 보다는 그들의 居 住地域을 중시한 표현이다. 본래 ‘韓濊’는 한대의 樂浪郡, 후한 말 이래로는 帶方郡이 한반도 중 부 이남의 동이족을 지칭하는 華夷論的 표현이다. 그런데 「능비」에는 韓濊 외에도 夫餘, 新羅, 加羅, 倭 등 남북의 東夷諸族 만이 아니라, 稗麗, 帛愼(肅愼?) 등 遠夷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던 종족도 보인다.


  이처럼 ‘新來韓穢’는 단지 백제의 卑稱으로만이 아니라, 낙랑군과 대방군을 매개로 韓濊의 朝 貢을 받아온 중국 황제를 대신하여 고구려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5세기는 광개 토왕, 장수왕을 거치면서 활발한 영토 확장과 함께 중국식 천하관념을 받아들여 왕권의 신성관 념과 함께 주변 세계에 대한 고구려 중심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었다.(노태돈 1999) 좁혀 말 한다면, 魏晉代 東夷觀念을 고구려가 계승한 것이다.(여호규 2009·2017) 이는 한반도 중부이 남 세계에 대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대신하여 고구려가 새로운 지배질서를 표방하는 것이라 하겠다.


Ⅳ. 『수서』 신라전의 ‘韓獩之地’


  중국사서에 신라의 열전이 처음 입전된 것은 『梁書』 신라전이다. 521년 백제의 주선을 받아 남조 梁에 통교하며 전해진 정보가 수록된 것이다. 그러나 『양서』 신라전의 내용은 백제의 通譯 을 거쳐 이루어 졌고, 경우에 따라서는 백제에서 가공하여 전달된 측면도 엿보인다. 신라가 독 자적으로 중국과 통교하여 史書에 입전된 것은 『수서』 신라전이 처음이다. 진평왕대 빈번한 入 隋의 결과 전해진 정보에 기반한 것이다.


【사료 4】

① 新羅國, 在髙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 或稱斯羅, 魏將毌丘儉討髙麗破之, 奔沃沮. 其後復 歸故國, 留者遂爲新羅焉. 故其人雜有華夏髙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 其王本百 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 其國傳祚至金眞平....其先附庸於百濟, 後因百濟征髙麗, 髙麗人 不堪戎役, 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 (『隋書』 81, 新羅傳)

② 隋東藩風俗記云, 金姓相承三十餘代, 其先附庸於百濟. 征高驪, 驪人不堪役, 相率歸之, 遂 致强盛.(『翰苑』蕃夷部 新羅)

③ 至隋文帝時遣使来貢, 其王姓金, 名真平 隋東蕃風俗記云 金姓相承三十餘葉 文帝拜為樂浪 郡公新羅王其王至今亦姓金 其先附屬於百濟後因百濟征髙麗人不堪戎役相率歸之遂致强盛 因襲加羅任那諸國滅之 並三韓之地 (『通典』 185, 邊防 新羅傳)


  이 때문에 『수서』 신라전은 『양서』 신라전과는 전혀 다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수 서』의 내용은 『翰苑』 신라조와 盛唐때 나온 杜佑 『通典』 신라전에 인용된 「隋東藩風俗記」의 내용 과 대동소이하다. 隋가 주변 이민족의 최신 정세보고서라 할 『諸蕃風俗』의 하나로 작성된 것은 분명한 듯 하고, 이것이 『수서』 신라전의 원자료로 이용된 것이다. 『수서』 신라전은 모두 「隋東 藩風俗記」의 내용이라해도 틀리지 않다. 그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고, 신라의 입장이 잘 반영된 자료로 생각된다. 언급한대로 진평왕대 빈번한 신라 사절에 의해 전해진 정보에 의하였을 것 이다.6)


  【사료4】에 따르면 신라는 漢代 ‘樂浪之地’에 터를 잡고 있으며, 한때 백제에 附庸하였지만 점 차 강성해져 백제를 깨트리고 백제에 예속되어 있던 任那加羅의 여러나라를 정복하였으며, 겸 하여 “沃沮·不耐·韓獩之地”까지 아우르고 있다고 하였다. “沃沮·不耐·韓獩之地”가 신라 영토라는 기록은 진흥왕이 553년부터 568년까지 확보한 한강유역과 함경남도 황초령과 마운 령까지 순행한 영토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韓獩之地’는 신라가 새로 확보한 한강유역 을 말한다. 『冊府元龜』(100, 外臣部)에는 이 모두를 본래 ‘朝鮮之地’라 표현하였다.


  그런데 신라의 신영토는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고, 신라가 이를 빼앗자 치열한 분쟁이 있었음 은 다 아는 일이다. “沃沮·不耐·韓獩之地”로 표현되는 신영토는 진흥왕대 확보한 뒤 몇 차례 변동이 있었지만, 7세기 들어 隋가 고려와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급기야 전쟁에 돌입하던 틈을 타서 신라가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수당과의 외교무대에서 신라의 신영토에 대하여 고구려와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7)


【사료 5】

① 新羅國, 在髙麗東南, 居漢時樂浪之地....兼有沃沮不耐韓獩之地.(『隋書』 81, 新羅傳)

② 高驪記曰, 今高[驪]國兼有朝鮮·穢貊·沃沮之地也.(『翰苑』蕃夷部 高麗)


  【사료 5】는 “沃沮·不耐·韓獩之地”를 두고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의 영토로 주장하는 것이 사서에 그대로 남아있다. ①은 7세기 초 隋代에 사절에 의해 전해진 것이고, ②의 「高麗記」는 640년 당의 陳大德이 고구려에 사신 와서 傳聞한 내용이다. “沃沮·不耐·韓獩之地”가 자신의 소유임을 표명한 주장을 담고 있다.


  ‘韓獩之地’를 비롯한 옛 조선(樂浪)의 땅에 대한 영토 표방은 단지 정복지에 대한 소유권 주 장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신라가 고구려에 이어 韓獩之地와 함께 옛 朝鮮(樂浪)을 계승하 였음을 표명한 것이다. 이는 고조선→한군현→고구려를 이어 신라가 동방의 새로운 지배자임 을 자임한 동시에, 華夷論에 입각한 신라의 독자적 세계질서를 의미한다.


Ⅴ. 맺음말


  후한 말 ‘韓濊’의 출현으로부터 「광개토왕능비」의 ‘新來韓濊’그리고 『수서』에 신라가 표방한 ‘韓濊之地’까지 표현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삼국지』 한전의 ‘韓濊’는 일정 공간의 거주민 을 지칭하는데서 시작되었지만, ‘韓獩之地’라는 지역 개념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도 한반도 중부 지방의 전략적 가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東夷世界의 支配者라는 명분의 실제적 증표로 기능 하였다. 「광개토왕능비」와 『수서』 신라전의 ‘新來韓濊’와 ‘韓獩之地’의 획득은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는 7세기 중엽 ‘韓獩之地’에 대한 확고한 지배를 바탕으로 이 지역에 대한 신라의 공간인식을 연출한 듯하다. 곧 강원도 영서지역에 해당하는 “竹嶺以北 高峴(鐵嶺)以內”의 10郡 지역과 동해안의 영동지역을 합쳐, 圖上 ‘穢貊國’으로 간주한 듯하다.8)


〖보론 : ‘예맥’ 표기의 변화〗


  중국 주변 이민족 칭호의 하나인 濊와 貊은 중국 선진시기 고문헌에서 확인된다.9) 貊(貉)은 춘추전기 『詩經』(魯頌 閟宮)에 보이는 ‘淮夷蠻貊’이 처음이다. 같은 시기 청동 金文에도 맥의 군 장을 지칭하는 「貉子」銘이 보인다. 처음에는 방위 구분 없이 이민족의 범칭(胡貊·蠻貊·夷貊·越 貊 등)으로 쓰였지만, 戰國期에 들어 조와 연의 북방진출에 따라 새로운 이민족의 존재를 알게되면서 胡는 흉노의 專稱으로, 貊(貉)은 동북방 이민족(北貊)의 이름으로 고정되었다.10) 전한이 전 저술로 알려진 『爾雅』(釋地, 八狄) 疏에 인용된 후한대 李巡의 설에 北方五狄의 하나로 흉노 와 더불어 ‘穢貊’이 들어 있는 것은 그러한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11)


  반면 濊(穢)는 맥보다 훨씬 늦은 戰國末에 나온 『呂氏春秋』의 ‘夷穢’, 전한초의 작품으로 추정 되는 『逸周書』의 ‘穢人’이 전부일 정도로 제한적으로 확인되는데, 발해 동쪽의 주민집단을 가리 키는 구체성을 보이고 있다.12) 곧 夷穢의 경우, 그 위치를 북쪽 바닷가의 동쪽(‘北濱之東, 夷穢 之鄕’)이라 명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북쪽 바닷가란 渤海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전한이후 동북방에 대한 중국왕조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예맥에 대한 명칭과 표기도 달라진 다. 우선 濊(穢)와 貊(貉)이 결합한 濊貊(穢貉)이란 표현이 보편화되었다. 예와 맥 어느 하나를 쓰더라도 내용적으로는 예맥의 줄임말에 지나지 않았다. 『三國志』에 夫餘의 창고에 ‘濊王之印’ 이 남아있고, 그 王城을 ‘濊城’이라 불렀음에도 ‘蓋本濊貊之地’라 하거나, 濊傳에 시종 濊民·嶺 東濊·不耐濊侯(王)의 단칭만을 쓰고 있지만, 그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와 옥저의 지리기사에서 는 예를 모두 濊貊으로 표기하고 있음을 본다.13)


  물론 부여·동옥저·동예의 경우 濊가 더 많이 쓰였고, 고구려의 경우 貊의 사용 빈도가 높 다. 그렇다고 종족과 지역을 구분한 것이 아니었다. 부여의 ‘濊貊之地’나 고구려·옥저 남쪽으 로 ‘濊貊’과 접해 있다는 표현처럼 지명으로 한정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貊’字는 『한 서』왕망전의 ‘貊人犯法’이나, 『삼국지』동옥저전의 ‘夷貊所侵’처럼 蔑稱의 의미가 강하였다. 이런 이유로 예맥계 주민집단 스스로도 貊(貉)의 사용을 忌避했다는 견해도 있다.14) 이 때문에 한자 표기에서도 薉·穢·獩 보다는 ‘濊’字를 선호한 듯하다. 곧 진한대 ‘薉·穢’→ 위진대 ‘穢·獩· 濊’→ 남북조 이후 ‘濊’字로 변하였으며, 連稱으로 쓸 때도 穢貉·薉貉 → 獩貃→ 濊貊으로 변 화된 모습을 보인다.









그림1. 한군현의 변천(BC 108~AD 30) (千寬宇, 1972, 217쪽 圖18)


그림 2. 기원전 45년 ‘樂浪郡戶口簿’에 보이는 25개현의 구획

※ 위치비정이 가능한 縣名만 표기


그림 3-1. 3세기 전반의 濊系 文化圈

(김창석, 2008, 30쪽 그림10)

그림 3-2. 3세기 濊(영동예ㆍ영서예ㆍ예)의 활동범위

(김재홍, 2015, 114쪽 그림 1)


그림 4-1. 중도유형 및 마한계 취락분포도 (박경신, 2018, 51쪽 도면 3)


그림 4-2. 중부지역 낙랑(계)유물 분포도 (권도희, 2017, 141쪽 그림1)


그림 5-1. 광개토왕대 고구려의 남부영역

(장창은, 2014, 73쪽 지도 2)

그림 5-2. 장수왕대 고구려의 남부영역

(장창은, 2014, 101쪽 지도 3)


그림 6-1. 진흥왕대 신라의 영토확장

(千寬宇, 1973a, 224쪽 圖30)

그림 6-2. 685년 통일신라의 9州

(千寬宇, 1973b, 189쪽 圖39)



1) 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千寬宇,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2) 국사편찬위원회, 1987, 『中國正史朝鮮傳 譯註』 (一), 284〜285쪽.

   「桓帝·靈帝 末期에는 韓과 濊가 강성하여 (漢)의 郡·縣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니,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韓

    國으로 유입되었다. 建安 연간(AD.196~220)에 公孫康이 屯有縣 이남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帶方郡으로 만들

    고, 公孫模·張敞 등을 파견하여 漢의 遺民을 모아 군대를 일으켜서 韓과 濊를 정벌하자, 〔韓과 濊에 있던〕 옛      백성들 이 차츰 돌아오고, 이 뒤에 倭와 韓은 드디어 帶方에 복속되었다.」 

3) 「靈帝末, 韓濊 盛, 郡縣不能制, 百姓苦亂, 多流亡入韓者」 (『후한서』 85, 동이열전 한) 

4) 후한 들어 2세기 중반까지 황해도 지역에는 거의 낙랑고분(귀틀무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 군현

   의 지 배집단의 분묘가 다시 조영되는 것은 2세기 후반이다.(鄭昌熙, 2009, 「2〜4세기 黃海道地域 古墳 分布

   定型의 變 化와 意義」, 『嶺南考古學』 48, 영남고고학회, 5〜48쪽)

5) 王健群은 ‘舍 城韓穢’의 ‘韓穢’ 2字는 비면의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추가된 것이라 보았다.(王健群, 1985, 『廣

    開 土王碑硏究』, 역민사, 314쪽 주4)  

6) 李康來, 1998, 「7세기 이후 중국 사서에 나타난 韓國古代史像」, 『한국고대사연구』 14, 한국고대사학회, 212〜

   220쪽.

7) 「蓋蘇文謂玄奬曰 高麗新羅 怨隙已久 徃者隋室相侵 新羅乘 奪高麗五百里之地 城邑新羅皆據有之 自非反地還

    城 此兵恐未能已 玄奬曰 旣徃之事 焉可追論 蘇文竟不從」 (구당서 199上 고려전) 

8) 「東見倉海君...括地志云, 穢貊, 在 麗南新羅北, 東至大海, 西」 (『史記正義』55, 留侯世家)

9) 선진대 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예맥에 대한 논고로는 다음의 것이 유용하다. 吉本道雅, 2008, 「中國先秦時代の

    貊」, 『京都大學文學部硏究紀要』47, 京都大學文學部. 박대재, 2013, 『중국 고문헌에 나타난 고대 조선과 예

    맥』, 경인문화사. 

10) 吉本道雅, 2009, 「濊貊考」, 『京都大學文學部硏究紀要』48, 京都大學文學部, 1쪽.

11) 「九夷八狄七戎六蠻, 謂之四海者...狄者...其類冇五, 李廵云, 一曰月支·二曰穢貃·三曰匈奴·四曰單于·五曰白 屋,

      案李廵所注爾雅, 本謂之四海下更三句云, 八蠻在南方, 六戎在西方, 五狄在北方...」(『爾雅注疏』6, 釋地 野疏) 12) 박대재, 2013, 앞의 책, 199쪽. 

13) 「高句麗,..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東沃沮...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삼국지』 30, 동이전)

14) 吉本道雅, 2009, 위의 논문,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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