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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개성에 남아있는 고려 문화유산 (2)

선죽교와 성균관 & 사찰과 석탑 & 첨성대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이광표 (동아일보 논설위원)



4. 고려 선비의 정신, 선죽교와 성균관


1) 선죽교



선죽교



비극적인 사연이 담겨 있는 선죽교(善竹橋)도 빼놓을 수 없는 개성의 고려 문화유산이다. 고려의 명운이 다한 1392년, 고려의 충신인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년)는 이방원(李芳遠, 흣날의 조선 태종) 일파에 의해 이곳에서 무참하게 피살되었다. 선죽교는 개성 남문 동쪽 약 1km 지점에 위치한다.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 돌다리로, 현재 북한 국보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죽교의 이름은 원래 선지교였다. 그러나 정몽주가 죽고 난 뒤 그 자리에 참대나무가 자랐다고 해서 대나무 죽(竹)자를 넣어 선죽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에 대한 정몽주의 변함없는 절개를 기리기 위해 후대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선죽교에 아직까지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있고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선죽교에 빗물이 붉게 흐른다고 한다. 선죽교라는 명칭이나 핏물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 충신 정몽주의 붉고도 뜨거운 일편단심(一片丹心)을 기억하고픈 후대인들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선죽교는 1216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오며 1480년 이전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선죽교를 보면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조선 후기 1780년경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선죽교를 보호하기 위해 난간을 둘러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고 대신 그 옆에 새로운 돌다리를 세워 그곳으로 다니도록 했다고 한다. 선죽교 옆에는 선죽교라고 쓴 석비와 정몽주의 절개를 기리는 표충비가 세워져 있다. 이 선죽교 석비의 글씨는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韓石峯)이 쓴 것으로 전해온다.


2) 개성 성균관


개성시 부산동에는 성균관(成均館)이 있다. 성균관이라고 하면 서울 성균관대학교 경내에 있는 성균관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성균관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이었기에 서울 뿐 아니라 개성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북한 국보 제127호인 개성 성균관은 992년에 세운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관리 양성과 유교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다. 이곳이 처음부터 성균관 건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 건물이 처음 세워진 것은 11세기로 당시엔 고려 왕궁의 별궁인 대명궁으로 조성한 건물이었다. 대명궁은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하거나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089년 다른 곳에 있던 고려의 교육기관인 국자감이 이곳 대명궁으로 옮겨왔다. 국자감이란 귀족의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해 992년 세운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이후 국자감은 1298년 성균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304년에 건물을 늘려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모습을 일신하고 위용을 갖추었다. 그리곤 1308년 성균관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다. 개성에 있는 성균관은 고려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1342∼1398)과 같은 당대 최고의 신진 사대부 학자를 배출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수도 한양에 새로운 성균관을 만들자 개성의 성균관 건물은 지방의 유학 교육기관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다.



성균관 대성전


지금의 건물은 모두 조선시대 때인 1602년에서 1610년 사이에 옛 모습대로 다시 지은 것이다. 개성 성균관은 크게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한 강학(講學) 구역과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한 배향(配享) 구역으로 나뉜다. 성균관은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3칸의 명륜당이 나온다. 명륜당 건물은 단순하고 별다른 장식 없이 단출하면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명륜당 앞에는 유생들의 숙소였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좌우에 있다. 명륜당을 지나면 대성전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앞에는 선대 유학자들의 신위를 모셨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 앞에는 만월대 터에서 출토된 석조 용머리 조각과 수창궁 터에서 출토된 석조 용머리 조각을 배치해 놓았다.


북한은 1989년부터 개성 성균관을 개성 고려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려역사박물관은 모두 3개의 진열관으로 이뤄져 있다. 제1진열관에는 고려시대 개성의 옛 모습을 그린 지도와 만월대 모형, 만월대에서 출토된 막새들과 꽃무늬 벽돌, 철제투구와 갑옷, 철제 화살촉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진열관에는 만월대에서 출토된 금속활자를 비롯해 고려청자. 목판, 천문학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 중이다. 제3진열관에는 불일사 5층 석탑에서 나온 소형 금동탑, 적조사 철불 좌상, 고려 화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적조사 철불은 원래 개성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 회랑에 전시되었다가 다시 개성으로 옮겨진 불상으로, 고려시대 유행했던 철불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고려역사박물관에는 공민왕릉 모형도 마련해 놓았다.


고려역사박물관에는 야외 전시장도 있다. 여기엔 고려 개국사 석등(10세기), 불일사 5층 석탑(10세기), 현화사 7층 석탑(11세기), 현화사비(11세기) 등과 같은 석조물을 원래 위치에서 옮겨와 전시하고 있다.



5. 불교의 나라, 사찰과 석탑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은 고려를 불교의 나라로 천명했다. 불교진흥을 국가의 주요 방향으로 삼아 활발하게 불사(佛事)를 진행했다. 이에 힘입어 수도 개성에는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다. 영통사(靈通寺)를 비롯해 관음사(觀音寺), 불일사(佛日寺), 현화사(玄化寺), 개국사(開國寺), 화장사(華藏寺), 연복사(演福寺), 안화사(安和寺), 흥왕사(興王寺) 등등. 그러나 대부분 모두 사라지고 빈 터만 남아 있는 상태다. 다행히 영통사는 대한불교 천태종의 도움으로 2005년 건물들을 복원했다.


1) 영통사


개성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려 사찰 가운데 하나는 영통사(靈通寺)다. 이 사찰은 개성시의 북동쪽인 용흥리 오관산 남쪽 영통골에 있다. 고려 초기인 1027년에 창건된 영통사는 왕실과 이런저런 인연을 맺으면서 크게 번창했다. 여러 왕들이 자주 참배했고 각종 왕실 법회가 열릴 정도로 규모도 컸다. 또한 인연을 맺은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었다. 영통사는 고려 천태종의 시조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1055~1101년)이 화엄의 교리를 배우고 탐구해 천태종을 개창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통사는 조선시대 들어 16세기경 불에 타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영통사 5층 석탑(북한 국보 제133호), 영통사 서(西)3층 석탑, 영통사 동(東)3층 석탑, 영통사 대각국사비(북한 국보 제155호), 대각국사 승탑, 영통사 당간지주 등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2002년 11월 우리의 대한불교 천태종과 북한의 조선경제협력위원회가 함께 복원 사업을 시작하여 2005년 10월 영통사 전각의 복원 사업을 마무리했다.

좌-영통사 동(東)3층 석탑) 


영통사가 위치한 영통골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그린 산수화로도 우리에게 익숙한 곳이다. 경기도 안산에 주로 살던 강세황은 18세기 중반 당시 개성을 여행한 뒤 그 풍경을 화폭으로 옮겨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남겼다. 그 화첩에는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라는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데, 개성의 오관산 영통동(영통골)로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은 매우 특이하다. 영통골 입구의 커다란 바위덩어리 여러 개를 화면 한가운데에 과감하게 배치하고 원근에 따라 바위에 명암을 두어 처리함으로써 서양화법을 그림에 도입했다. 18세기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바위에 붙어 있는 초록빛 이끼를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당시 개성 영통골의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2) 영통사 대각국사비






영통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화유산으로는 고려 천태종의 시조인 대각국사 의천의 업적을 새긴 석비를 꼽을 수 있다. 이 석비는 의천이 입적하고 24년이 지난 1125년에 세워졌다. 높이 2.9m이며, 비석 앞면의 윗부분에 ‘증시(贈諡) 대각국사비명’이란 제목이 새겨져 있고 그 좌우에 봉황과 보상화문(寶相華文, 모란과 연꽃을 함께 넣은 문양)을 양각했다. 당대의 명문장가인 김부식(金富軾)이 비문을 지었고 글씨는 고려 전기에 유행하던 구양순체(歐陽詢體)로 되어 있다. 특히 봉황 무늬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고려시대 석조 미술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북한의 국보 제1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영통사 대각국사비)







3) 불일사 5층 석탑



불일사(佛日寺) 5층 석탑은 10세기 경에 세워진 개성의 대표적인 고려 석탑이다. 원래 개성시 판문군 보봉산 남쪽 기슭의 불일사 터에 있던 것을 1960년 지금의 장소인 개성 성균관의 고려역사박물관 야외전시장(내성동 공원)으로 옮겼다. 불일사는 고려 4대 임금인 광종이 951년 어머니를 위해 조성한 사찰이다. 불일사 5층 석탑 불일사 5층 석탑의 높이는 약 8m이다. 석탑의 1층 탑신에서는 작은 금동탑과 석탑, 사리함 등이 발견되었다. 이 탑은 단순 소박하지만 절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탑은 또 고구려의 길이 단위인 고구려 자를 사용해 작업을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250여 년이 지났지만 불일사 5층 석탑을 만들었던 고려 석공은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받아 돌을 다듬고 길이를 재고 돌을 쌓아 올려 탑을 세웠던 것이다. 고구려를 이어가고자 했던 고려인의 뜨거운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불일사 5층 석탑




4) 현화사 7층 석탑


현화사 7층 석탑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 영추산 밑의 현화사(玄化寺) 터에 있던 11세기 고려 석탑이다. 높이는 8.64m이다. 현재는 개성 성균관 고려역사박물관 야외전시장(내성동 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현화사가 창건된 시기를 정확히 단정하기 어렵지만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볼 때 1018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어 2년 뒤인 1020년에 이 탑이 세워졌다.


현화사 7층 석탑 탑신 



현화사 7층 석탑은 기단부가 특이하다. 기단부는 육면체 모양으로 작게 다음은 돌을 마치 벽돌처럼 쌓아 만들었다. 이런 모습은 전통 석탑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일단 지금의 모습을 보면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이 기단부가 고려 때 모습 그대로 인지 아니면 후대에 보수하면서 기단부만 새로 조성한 것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전체적으로 탑은 날렵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각 층의 탑신에는 불상과 연꽃을 정교하게 새겨 놓았다. 현재 현화사는 없어지고 이 탑과 현화사비, 당간지주(幢竿支柱) 등만이 남았다.



5) 개국사 석등


개국사(開國寺)는 935년 고려 초에 세운 사찰로 고려 10대 사찰의 하나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폐사(廢寺)로 변해버렸다. 고려 초기의 석등으로 원래 개성시 덕암리 개국사 터에 있었으나 지금은 개성 고려역사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 옮겨 놓았다. 이 석등은 높이 4m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6) 화장사(華藏寺) 승탑


화장사 지공선사 승탑



개성시 용흥동 보봉산 중턱의 화장사(華藏寺) 터에 있는 고려 말기의 승탑(僧塔)이다. 승탑은 스님들의 사리를 안치한 탑으로 부도(浮屠)라고 부르기도 한다. 1370년경 제작된 이 승탑의 높이는 1.94m이다. 이 승탑은 탑신 앞면에 지공정혜영조지탑(指空定慧靈照之塔)이라고 새겨져 있어 원나라 선승인 지공(指空)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보통의 승탑이 탑이나 석등 모양인 것과 달리 이 승탑은 독특하게 종 모양으로 되어 있다. 반구형(半球形)의 몸돌 위쪽에는 큼직하게 두 겹으로 연꽃잎을 새겼다. 조각이 섬세하고 전체적으로 세련된 아름다움을 잘 갖추었다. 파격적인 미(美)를 구현한 고려 석조불교미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6. 고려 과학의 흔적, 첨성대


첨성대(瞻星臺) 하면 우리는 경주에 있는 신라의 첨성대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개성에도 고려시대의 첨성대가 있다. 개성시 송학동 만월대 서쪽에 있는 고려 첨성대이다.


그러나 개성 첨성대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첨성대와 다르다. 개성 첨성대는 그 자체로 별을 관측하는 도구가 아니라 관측기구를 올려놓을 수 있는 첨성대의 받침대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인지 경주 첨성대에 비하면 왠지 엉성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첨성대


첨성대(북한 국보 제131호)는 고려시대 천문학의 발전 모습을 실물로 밝혀주는 귀중한 천문관측 시설이다. 이 첨성대는 고려 건국 직후 개성에 궁궐을 조성하면서 함께 세운 것으로 추청 된다. 주춧돌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ㅁ’자형 틀을 짠 다음 판석(板石)을 깔아 만든 형태로 되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잘 다듬은 화강암 5개를 기둥으로 세웠다. 동서남북에 맞게 4개를 세우고 한가운데데 다시 돌기둥 하나를 세웠다. 그리곤 기둥 위쪽에는 널찍한 판석을 깔아 평평한 공간을 만들어 그 위에 천문기기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만월대는 송악산 앞쪽으로 널찍하게 펼쳐진 공간에 조성된 고려의 왕궁이다. 남쪽으로 탁 트인 곳이어서 천문을 관측하기엔 제격인 공간이다. 게다가 왕궁을 조성할 때 지기(地氣)를 살리고 위엄을 부각시키기 위해 땅을 높게 다져서 건물을 지었다. 그곳에서 천문기기를 첨성대에 올려놓고 천문을 관측했으니, 만월대야말로 천문 관측에 적절한 장소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만월대라는 이름이 망월대(望月臺)라는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는 것을 보면, 고려인들이 천문관측의 장소로 이곳을 선택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천문대를 왕궁 바로 옆에 배치한 것은 고려 왕조가 천문관측을 그만큼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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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경기문화유산 학교

    발행/ 2018.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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