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개성에 남아있는 고려 문화유산 (3)

고려 나성과 연복사 종 & 개성상인들 & 개성의 문화유산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이광표 (동아일보 논설위원)



7. 고려 나성과 연복사 종

1) 개성 나성

서울에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이 있듯 고려시대의 개성에는 수도를 둘러쌌던 나성(羅城)이 있다. 나성은 도시의 외곽을 둘러싸는 성곽을 말한다. 개성 나성은 개성의 북쪽 송악산에서 남쪽의 용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리 조성한 고려 성곽이다.

고려는 1020년 강감찬 장군의 건의에 따라 나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1029년에 완공했다. 둘레는 약 23km다. 이는 서울의 한양도성(18km)보다 5km가 긴 것으로, 고려 나성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원래 동쪽에는 숭인문(崇仁門), 서쪽에는 선의문(宣義門), 남쪽에 회빈문(會賓門), 북쪽에 태화문(泰和門)이 있었지만 이 성문들은 모두 없어진 상태다.

개성에는 나성 외에 후고구려의 성을 이어 고려 초기 축조한 황성(皇城)이 있다. 후고구려 때 왕건이 송악산 남쪽에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았고 이 발어참성을 이용해 다시 쌓은 성곽이 황성이다. 이 황성은 1020년 나성을 축조할 때까지 고려 개성의 도성 역할을 했다.

2) 연복사 종

개성에는 조선초인 1393년 완성한 내성(內城)이 있다. 이 내성에는 조선시대 건축물인 남문이 있 는데 이 위치가 지금의 개성의 중심지역이다. 북한 사람들은 이 문을 남대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 서울로 치면 숭례문(崇禮門, 일명 남대문) 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남문에 고려시대 말기인 1342년에 주조한 연복사(演福寺) 종이 걸려 있다. 연복사라는 사찰은 고려 초에는 이름이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였으며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이 종은 조선시대 중기인 1563년에 연복사가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인근 남문으로 옮겨 남문의 누각에 걸려 있다. 높이는 3.24m, 아래쪽 입지름은 2m에 무게는 14톤이다. 그런데 이 종은 모습이 매우 특이하다. 우리나라 전통 종과 다른 중국 종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복사 종


우선 정상부를 보면.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가 두 마리의 용(雙龍)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음통(音筒)은 사라졌다. 우리 전통 종은 음통이 있고 용뉴는 한 마리 용(單龍)의 모습으로 되어 있다. 연복사 종은 몸통 중앙에는 가로로 여러 줄의 띠를 둘렀고 그 위아래의 공간도 사각형으로 나누어 그 안에 여러 불상과 문구를 새겨 넣었다. 우리의 전통 종은 몸통 연복사 종 가운데에 가로로 띠 줄을 새겨 넣지 않는다. 연복사 종은 아래쪽 입구의 선도 과도하게 물결치듯 마감했다. 우리 전통 종의 부드러운 선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물결의 위쪽에는 건·곤·감·이와 같은 주역의 팔괘(八卦)도 새겨 넣었고 용, 봉황, 기린과 같은 영험한 상상의 동물들도 표현했다.

연복사 종의 윗부분에는 연꽃 봉우리 대신에 삼존불을 새겼다. 우리 전통 종은 윗부분에 사각형의 공간 4개를 구획한 뒤 그 안에 연꽃 봉우리를 9개씩 새겨 넣었다. 이 연꽃 봉우리를 연뢰(蓮蕾)라고 사각형의 공간을 연곽(蓮廓)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우리 전통 종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연복사 종에는 이 연뢰와 연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종의 아랫부분의 사각형 공간에는 종의 제작 배경 등에 관한 글을 새겨 넣었다. 이 명문(銘文)은 고려 후기의 유학자 이곡(李穀)이 지었고 글씨는 성사달(成士達)이 썼다. 종을 만들게 된 과정과 원나라 황제를 축수하는 내용, 종을 제작한 원나라 장인의 이름과 시주자 등의 이름을 열거해 놓았다. 명문에 따르면, 연복사 종은 강공금강(姜公金剛)과 신후예(辛候裔)라는 중국 원나라 장인이 주조했다. 이들은 원 황제의 명을 받들어 금강산에서 종을 만들고 돌아가다 충목왕과 공주의 발원으로 이 종을 만들었다. 당시 고려에 계속되는 전란과 기근으로 종을 만들 주조 장인이 부족해 중국의 도움을 받게 되어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이런 연유로 고려 말기 연복사 종은 전체적인 형태나 무늬, 분위기에서 우리의 전통 종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중국 원나라의 간섭기에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제작한 종이어서 보는 이를 씁쓸하게 한다.


8. 고려 유산을 지켜낸 개성상인들

1) 박물관 맨 3인방

개성의 문화유산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개성상인들과 그들의 문화후원 정신이다. 개성상인들이 우리 문화유산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다. 일제강점기 개성지역에서 일제에 의한 문화유산 약탈은 극심했다, 특히 무덤을 도굴해 고려청자를 약탈해가는 일이 빈번했다. 야외에 있는 석탑을 해체해 일본으로 빼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개성의 문화유산을 한데 모아 보존하고 연구할 수 있는 박물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에 힘입어 1931년 개성부립박물관이 건립되었다. 박물관 건립과정에서 개성상인들을 중심으로 한 개성지역의 유지들이 적지 않은 건립비용을 부담했다. 그들의 기부가 없었다면 개성부립박물관은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33년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인 인천 출신의 고유섭(高裕燮, 1905∼1944년)이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고유섭의 영향을 받아 개성에서 미술사학자와 박물관맨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 1916~1984년), 동국대 총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을 지낸 불교미술사학자 황수영(黃壽永, 1918∼2011년), 이화여대 교수와 이화여대 박물관장을 지낸 불교미술사학자 진홍섭(秦弘燮, 1918~2010년)이 대표적이다. 이들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흔히 “개성 3인방”이라고 부른다.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 3인은 훗날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연구와 이해 보존 및 후학 양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우리 문화유산의 연구 보존에 한 평생을 바친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이 개성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어려서부터 개성인(開城人)으로서 고려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다. 개성 3인방은 개성과 고려의 전통문화유산에 관심 있는 개성상인들과 교유하면서 그들을 문화재 수집의 세계로 이끌기도 했다.

2) 수집가 3인방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존함으로써 우리 문화유산과 정신을 지켜내는데 헌신한 개성상인도 꼭 기억해야 한다.

1981년 2월, 서울 성북구 성북동 이홍근(李洪根, 1900~1980년)의 자택에선 유물 인수 및 반출 작업이 한창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원들은 유물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정성스레 포장한 뒤 트럭에 조심해서 옮겨 실었다. 이홍근이 세상을 떠난 지 넉 달. 그가 30년 넘게 수집해온 수천 점의 문화재 명품들이 그의 자택을 떠나 경복궁 내 국립중앙박물관(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으로 옮겨지는 상황이었다.



이홍근의 장남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1980년 12월과 1981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4,941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문화유산 기증이라는 것이 낯설던 시절, 아버지가 30여 년 간 모아온 고품격의 문화재를 송두리째 국가에 내놓은 것이다. 4,941점의 문화재는 질과 양에서 사람들의 상상을 압도했다. 게다가 유족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고고학과 미술사학 연구 발전 기금으로 은행 주식 7만여 주를 내놓았으니, 이홍근 컬렉션의 국립중앙박물관 기증은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놀라운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이홍근


개성에서 태어난 이홍근은 간이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곡물상회, 양조회사, 보험사 등을 이끌다 1960년 동원산업을 설립해 큰 돈을 벌었다. 이홍근은 1950년대 6․25전쟁 이후부터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수집을 시작했다.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우리 문화재가 방치되고 훼손되는 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강세황 作 <영통동구도> (18세기 후반) / 이홍근 컬렉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한 지 10년 정도 지난 1960년대부터 이홍근은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과 어울렸다.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수집품을 함께 감상하고 품평했고 전문 지식과 안목을 배우면서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다. 한 번은 이홍근이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수집 문화재는 단 한 점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세 분께서 앞으로 밥을 짓든 죽을 쑤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알아서 해주십쇼.” 평생 모은 문화유산 명품 4,9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하라는 유지를 남기고 1980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동양제철화학(현재의 OCI) 회장을 지난 이회림(李會林, 1917~2007)도 개성상인이다. 개성에서 태어난 이회림은 14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잡화도매상 사환 생활을 거쳐 사업을 시작했다.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동양제철화학 등 유수의 기업을 일궜다. 이회림은 1960년대 당대 최고의 컬렉터 이홍근의 집을 드나들면서 문화유산에 대한 안목과 열정을 키웠고 1970년대엔 동향 출신의 최순우와 활발하게 교유했다. 고향 개성 덕분에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된 이회림은 일본인들이 빼가는 우리 문화유산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고 6·25전쟁 때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그림과 고려청자를 구입하면서 수집의 길로 들어섰다.

이회림






이회림은 50여 년 동안 모은 문화유산 8,400여 점과 그것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던 인천 송암미술관을 통째로 인천시에 기증했다. 당시 기증품에는 2001년 4월, 서울옥션 미술품경매에서 7억 원에 낙찰 받았던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가 포함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7억 원은 당시 국내 미술품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미술품 경매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이 미약하던 시절이었기에 ‘고미술 7억 원 경매’는 세상의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4년 뒤 조건 없이 인천시에 기부함으로써 또 한 번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회림은 문화유산 기증에 관해 “개성상인의 신용의 실천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한 바 있다.







정선 作 <노송영지도> (1755) / 
이회림 컬렉션, 인천시립박물관 송암미술관 소장



1922년 개성에서 태어난 윤장섭(尹張燮, 1922~2016)은 개성상업학교 시절, 개성부립박물관장 고유섭의 특강을 듣고 우리 전통 미술에 대해 눈을 떴다. 그는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1970년대부터 고려청자 등 문화유산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특히 개성 출신의 최순우, 황수영과 교유를 하면서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배웠다. 해외로 유출되는 문화유산을 어떻게 하면 환수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유물을 수집할 때는 최순우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그려가면서까지 꼼꼼하게 유물 수집목록을 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윤장섭 



윤장섭은 1981년 사재를 출연해 성보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유물의 소유권을 재단으로 넘겼다. 지금은 서울 신림동과 도산대로에 호림박물관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윤장섭이 수집한 문화유산은 명품이 즐비하고 윤장섭이 설립한 호림박물관은 간송(澗松)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과 함께 국내 3대 사립박물관으로 꼽힌다.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과 이홍근, 이회림, 윤장섭. 이들은 우리시대 최고의 미술사학자이자 최고의 수집가들이다. 특히 이홍근, 이회림, 윤장섭 3인이 메세나 정신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수도 개성의 위대한 문화유산 전통을 어려서부터 체득했기 때문이다. 바로 고려 수도 개성의 DNA였다.


백자청화매화대나무늬항아리(국보 제222호, 15세기) / 윤장섭 컬렉션, 호림박물관 소장

9. 통일의 꿈, 개성의 고려 문화유산

개성에 있던 고려시대 석조물 가운데 개성을 떠나 서울에 있는 것들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현화사 석등, 남계원 7층 석탑(국보 제100호), 경천사 10층 석탑(국보 제86호)이 바로 그들이다. 현화사 석등과 남계원 7층 석탑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 전시되다가 분단으로 인해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이다. 개성시 부소산에 있던 경천사 10층 석탑은 1907년 일제에 의해 무단으로 해체되어 일본으로 약탈된 뒤 1919년 훼손된 채 국내로 돌아온 석탑이다. 이후 경복궁에 방치되다 1960년 보수를 거쳐 경복궁 야외에 전시되었으나 또다시 10년간 해체 보수·보존처리를 거쳐 2005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 전시 중이다. 보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실내로 옮겨 전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문화유산은 최대한 원래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그 문화유산의 의미와 가치,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경천사 10층 석탑, 현화사 석등, 남계원 7층 석탑은 통일이 되어 고려의 수도 개성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하고 기대해본다. 그것이 고려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좀 더 온전히 보존 전승하고 좀 더 제대로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렇듯 개성 지역에 전해오는 고려 문화유산은 통일시대를 이끌어갈 경기도의 소중한 문화자산이 아닐 수 없다.

2018년 9월 19일에 진행된 <경기문화유산학교> 3강 강연 모습


세부정보

  •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 2018.8.13

    기획/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편집/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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