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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문화재단

느리지만 큰 걸음으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이 글은 성남문화재단의 격월간 문화예술 매거진〈아트뷰〉10+11월호의 본문 내용입니다.

지난해 국내 음악계의 가장 큰 화제는 단연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이었다. 유서 깊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 최초의 한국인 우승자라는 빛나는 성과는 그동안 올곧게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온 선우예권의 묵묵한 행보가 빚어낸 결과다. 조급함 대신 차분히 음악의 본질을 향한 탐구를 지속하고 있는,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선우예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SunwooYekwon_ⓒJeremy Enlow The Cliburn_240346(rd)


“엊그제 막 베를린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탈리아 볼자노, 독일의 휴양지 슐로스엘마우, 스웨덴 헬싱보리에서 연주를 마치고 왔죠. 일정상 한 도시에 짧게 머물다 이동할 수밖에 없지만 각 나라, 각 도시에서 받는 영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중해요. 그런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다양한 감정과 영감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빡빡한 스케줄의 연속에서도, 선우예권의 이야기에서는 피곤함 대신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해졌다. 얼마 전 생애 처음으로 구입했다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도 며칠 전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해 “정말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는 말도 덧붙였다. 16세에 미국 유학을 떠나 줄곧 커티스와 줄리아드, 메네스 음대에서 공부했던 선우예권은 현재 하노버 국립 음대에서 베른츠 괴츠케를 사사하며 또 다른 음악적 영감을 충전하는 중이다.


“독일 쪽 작곡가들을 제가 특별히 더 좋아하기도 해서인지, 독일계 선생님께 배워보고 싶었어요. 괴츠케 선생님은 제가 2013년 센다이 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심사위원이셨는데,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코멘트가 기억에 남기도 했거든요. 참 세심하시고 제자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겠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죠.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후에는 스케줄이 많다 보니 직접 레슨을 받으며 조언을 구할 시간은 많지 않지만,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가끔은 녹음을 통해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죠.”


미국 유학 시절 세이무어 립킨과 로버트 맥도널드, 리처드 구드를 사사한 선우예권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 세미파이널 라운드에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연주할 당시 작고한 스승 립킨의 카덴차를 연주하며 스승을 향한 존경심을 담아내기도 했다. 세 스승에 대해 “정말 존경하고 배울 점이 많은 분들께 배웠다”고 회고하는 선우예권은 음악을 대하는 스승들의 태도, 그리고 작곡가들이 남긴 악보의 중요성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개성과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이긴 하지만, 단지 ‘다름’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곡가가 의도한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말 중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Simplicity is the ultimate sophistication’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모두가 다른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듯, 고유의 피아노 소리도 연주자마다 이미 다 다르거든요. 그 특정 음악의 본질 안에서 자유성을 찾아가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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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은 선우예권에게도,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도 기념비적인 터닝 포인트였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실력파 피아니스트지만 대중에게 조금은 낯설었던 그의 이름은 이를 계기로 눈부시게 각인되었다. 반 클라이번 이전에도 이미 7차례의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했던 선우예권이지만, 콩쿠르의 과정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연주자로서의 생존, 새로운 연주 기회를 잡기 위한 치열한 분투의 여정이었다.


“결국 긴장감이란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상황에서는 연습량의 문제보다도 음악을 생각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준비 과정에서 ‘정말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집중력이 음악으로 향해야 하죠. 그래야 무대에서도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하고, 온전히 음악 자체에 몰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뒤 선우예권의 연주 스케줄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급격히 빡빡해졌다. 쉼 없는 일정 탓에 콩쿠르 이전과는 또 다른 의미의 고생일 수 있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보람과 즐거움을 찾아가는 중이다.


“되도록 두 달 이상 집을 떠나지 않으려 해요. 두 달 동안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다가도, 단 며칠이라도 집에 돌아오면 그 자체로 재충전되는 느낌이거든요. 또 연주 여행 중에는 식습관 조절로 건강을 관리해요. 가능하면 탄수화물은 줄이고 과일과 채소, 건강한 음식들로 잘 챙겨 먹으려 하죠. 그러다 보니 운동을 따로 하지는 않지만 본의 아니게(웃음) 살이 조금 빠지기도 한 것 같습니다. 특별한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다기보다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좋아하는 맛집에 가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편이에요. 수프 종류를 좋아하는데, 베트남 쌀국수 집은 어느 나라에서도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어서 자주 가요. 지금은 바쁘다는 핑계로 요리를 한 지 오래되었지만, 미국 유학 시절에는 미역국, 콩나물국, 김치, 된장찌개 같은 음식도 자주 만들었고요. 친구들이 제가 끓인 찌개, 국들이 특별히 맛있다고 해서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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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기예프와 빚어낼 프로코피예프


선우예권은 11월 21일,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무대에 선다.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에서 선우예권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한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정밀함과 타악기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느린 악장을 들으면 잠시 또 다른 세상에 머무는 느낌이죠. 그 속에 담긴 그리움, 공허함, 슬픔의 정서는 슈베르트, 라흐마니노프의 감성과도 맞닿는 지점이 있어요.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3번은 역동성과 신비로운 색채들의 향연 속에 우수 짙은 감성과 냉소적인 위트가 특징인데요, 클래식 애호가가 아닐지라도 어렵지 않게 듣고 반응할 수 있는 곡이 아닐까 해요. 뮌헨 필하모닉, 게르기예프와의 협연은 처음이라 저도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선우예권은 2019년 1월에는 도쿄와 시즈오카, 나고야 등에서 일본 투어를 진행하고, 2월에는 홍콩 아트페스티벌에서 홍콩 데뷔 리사이틀 무대에 선다. 홍콩 리사이틀에서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D958,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라벨 라 발스, 아믈랭의 토카타를 준비하고 있다. 포메리지 무지칼리 오케스트라와의 베토벤 협주곡 4번, 로체스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 등 밀라노와 프랑크푸르트, 미국 곳곳에서의 협연 무대도 일정에 가득하다.


“바흐의 곡들, 특히 파르티타와 영국 모음곡, 프랑스 모음곡과 같은 작품을 많이 좋아하지만 아직 무대에서 들려드리기는 부담이 많이 되는 작곡가로 느껴져요. 좀 더 세월이 흐른 뒤 만년에 연주하고픈 레퍼토리로는 아마도 제가 살아가며 더 애착을 가지고 그리움을 느끼는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될 듯합니다. 어떤 곡들이 될지 저 역시 기다려지네요.”


글 남소연 성남문화재단 홍보미디어부 과장


성남문화재단〈아트뷰〉 10+11월호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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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소연 성남문화재단 홍보미디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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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성남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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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출범한 성남문화재단은 그동안 지역사회 속에서 펼치는 창의적 문화정책, 성남아트센터와 큐브미술관을 중심으로 선보이는 세계 정상의 예술 콘텐츠를 통해 새로운 복합문화공간의 모델을 제시해 왔습니다. 누구나 일상 속에서 문화예술을 즐기고 시민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도시, 바로 성남문화재단이 만들어갈 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