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멋과 풍류

문학-고전-운문 분야 『송강가사』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송강가사』

정철 지음, 김갑기 옮김, 지만지, 2012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멋과 풍류


이형대 - 고려대 국문과 교수


 



김갑기 선생이 옮긴 『송강가사』는 딱 한 손에 쥘 수 있어 들고 다니기에 좋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 실린 정철의 옛노래가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정철의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과 씨름해본 경험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낯선 어휘들과 다양한 고사들로 암기의 압박에 시달렸던 기억이 새삼 떠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어와 고사가 익숙해지면 정철의 작품은 새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작품에 담긴 체험의 진중함과 호방한 필치, 낭만적인 상상력과 호탕한 풍류의 세계가 오롯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경지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독자들은 옛글이라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방법은 눈에 익숙해질 때까지 틈나는 대로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휴대가 편한 이 책의 장점은 분명하다.


정철의 옛노래를 수록한 문헌은 대부분 그의 사후에 엮은 것이다. 이 문헌들은 필사되거나 목판으로 간행되어 전하는데, 엮은이의 책은 정철의 5대손인 정관하라는 사람이 성주목사를 지내던 영조 23년(1747)에 간행한 성주본 『송강가사』를 저본으로 하고 있다. 성주본 『송강가사』는 상하권으로 나뉘어 있다. 상권에는 정철의 가사 4편과 「장진주사」가, 하권에는 ‘단가(短歌)’라는 제목 아래 시조 79수가 실려 있다. 사려 깊은 독자들은 이즈음에서 의문이 생길 법하다. 책 제목은 분명 『송강가사』인데, 왜 가사작품뿐만 아니라, 「장진주사」와 같은 사설시조 그리고 79수의 시조작품이 실려 있는가? 정답은 가사라는 개념의 의미 범주가 정철의 시대와 지금 이 시대에 현저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가사를 4음보격 4행 이상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특정한 역사적 장르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고 있지만, 정철의 시대에는 우리말로 이루어진 노래 가사를 가사라고 일컬었다.


그렇다면 이 성주본 『송강가사』와 이를 토대로 엮은 김갑기 선생의 『송강가사』는 별다른 차이가 없을까? 작품의 수록 순서에 큰 차이가 있다. 김갑기 선생의 『송강가사』는 저본의 상권까지는 작품을 그대로 수록했지만 하권인 시조 작품은 8개의 주제 항목을 설정하여 주제에 따라 작품을 재배치했다. 아마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듯하다. 그러나 지나친 배려는 오히려 상대방의 부담감을 가중시킬 수 있듯이, 엮은이의 이 책은 원전의 흐름을 왜곡한 면모도 발견된다. 정철의 시조 중에는 문답형 시조가 여럿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예를 들면 술과의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진 4수의 작품을 들 수 있다.


첫 번째 작품은 작자가 술에 건네는 말이다. 10년 동안 너를 좇느라 허송세월했으니 이제는 절교하겠다며 금주의 의지를 밝힌 것이다. 두 번째 작품은 술의 답가이다. 당신이 좋아하여 나도 따른 것뿐인데 이제 와서 내 탓만 한다면 사귐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세 번째 작품은 술의 반격에 놀란 작자의 반성과 은근한 애정을 술에게 드러낸 내용이다. 지금껏 험한 일과 궂은일을 너로 인해 다 잊었는데 너 없이는 못 살겠다고 한다. 네 번째 작품은 술의 답변이다. 비록 백 년을 살더라도 덧없는 것이 인생인데 무슨 거창한 일을 하겠노라고 내가 권하는 잔을 덜 먹으려 하느냐고 가볍게 타박하는 내용이다. 선조 임금이 정철의 과음을 염려하여 특별히 은잔 하나를 하사하고는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라고 명령하자, 집으로 돌아와 망치로 은잔을 두드려 펴서 최대한 크게 만들어 한 잔씩 마셨던 정철이고 보면, 이 작품들은 작자의 술에 대한 지독한 사랑을 해학적으로 펼쳐낸 멋진 노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김갑기 선생은 이 작품들을 각기 ‘별리’, ‘자성’, ‘풍자’, ‘풍류·기호’의 항목 아래 뿔뿔이 흩어버렸으니, 노래들이 본래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낯선 이웃들 사이에서 초라하게 서 있는 형국이다. 이쯤 되면 독자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차라리 실수라고 인정해야 할 듯하다.


정철의 작품에서 술의 모티프는 그가 남긴 가사, 사설시조, 시조 작품에서 두루 드러나듯이 그의 삶은 술과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다. 당쟁기라는 험난한 시대에 벼슬길에서 진퇴를 거듭했던 그에게 술은 일종의 안식처였으리라 여겨진다. 부조리한 정치 현실에서 입은 상처를 달래고 쌓인 울분을 삭일 수 있는 수단이었으며, 때로는 호방한 풍류와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일종의 촉매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술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에서도 가벼운 개인적 기호나 취향의 차원을 넘어서서 굴곡진 삶의 무게와 경험적 인식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정철의 작품은 윤선도의 노래에 비해 매우 역동적이며 빠른 리듬감을 자아낸다. 어느 연구자의 관찰에 따르면 실제로 정철은 동사를 즐겨 활용하며 단문의 간결한 문체 시학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덧붙이면 광대하게 뻗어 나가는 자유로운 상상력과 특유의 감각적 이미지 활용도 그의 노래를 절창이라고 인정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작품 하나를 예로 들어본다. 역시 문답체 시조인데, 작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학(鶴)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소망과 포부를 드러낸 작품이다.



먼저 작자는 학에게 묻는다. 본래는 푸른 하늘 구름 밖의 높이 뜬 학이었는데, 어찌하여 인간 세상에 내려와 긴 깃이 다 떨어지도록 날아갈 줄 모르느냐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고한 선비의 기품과 자유로운 정신의 본향을 멀리한 채, 무슨 일로 세속 세계에 추락하여 비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느냐는 반성적 질문이다. 정치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정계의 높은 지위에서 물러나 낙향한 처지에 대한 질타다. 이에 대한 학의 대답은 이렇다. “댱지치 다 디게야 ᄂᆞᆯ애ᄅᆞᆯ 고텨 드러/ 청천(靑天) 구름 속에 ᄯᅥ 오ᄅᆞᆫ마리/ 싀원코 훤츨ᄒᆞᆫ 세계(世界)를 다시 보고 말와라.”


학은 다시 힘차게 비상한다. 긴 깃이 다 떨어지도록 사력을 다해 날갯짓하여 푸른 하늘 구름 속으로 날아오른다. 수직 상승의 역동적 이미지가 시각적으로 펼쳐진다. 온 힘을 다해 비상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시원하고 훤칠한 세계를 다시 보겠다는 의지의 표상이다. 다시 말하자면 본연의 도덕적 정감의 회복이자, 덕치로 표현되는 이상적 정치질서의 실현에 대한 염원이다. 역사적인 눈으로 보면 서인의 영수 노릇을 했던 정철의 정치적 행위는 다각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당대에서도 그의 행위는 숱한 시비를 불러왔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조선 사대부 본연의 포부가 흔들림 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우리는 이 작은 한 권의 책에서 수시로 확인할 수 있다.


정철의 인생 역정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그의 사회적 자아는 영광과 수난의 반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조적 자아는 항상 형형한 눈빛으로 사물을 투시하고 삶을 성찰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빚어냈으니, 그 보석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만 『송강가사』는 후대에 편찬되었기에 정철의 작품이 아닌 김인후나 송순의 작품들이 몇 편 섞여 있다. 김갑기 선생은 굳이 이를 분별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놓은 듯하다. 일반적으로 고전 작품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작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상황이나 작자의 처지 등 컨텍스트에 대한 공부도 필요한데, 아래의 참고도서를 곁들이면 정철의 노래를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고집불통 송강평전』

박영주 지음, 고요아침, 2003


『송강가사』

정철 지음, 정재호·장정수 옮김, 신구문화사, 2006


『윤선도 시조집』

윤선도 지음, 김용찬 옮김, 지만지, 2016





이형대 - 고려대 국문과 교수


고려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치고, 현재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고전시가를 가르치고 있다. 스승·선후배 학자 및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국고시조와 근대시조, 잡가, 신민요, 창가 등의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대규모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2012년에는 중·고등학생들이 우리의 옛 노래인 향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신라인의 마음 신라인의 노래󰡕를 지었다. 현재 한국시가학회와 한민족문화학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국내외의 교육자 및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국고전시가의 멋과 아름다움을 공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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