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지모신의 상상력과 해한(解恨)의 교향악

문학-현대-산문 분야 『토지』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토지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2012







지모신의 상상력과 해한(解恨)의 교향악


우찬제 -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소설이란 집 짓는 것과는 달라요. 소설이란 삶과 생명의 문제이며, 삶이 지속되는 한 추구해야 할 무엇이지요.” 박경리가 한 말이다. 그는 필생의 대작 『토지』와 더불어 우리 문학사에서 단연 장엄한 산맥을 형성한 작가이다. 인생 전체를 걸고 소설로, 문학으로 지을 수 있는 가장 찬연한 생명의 금자탑을 완성해냈다. 1969년 9월부터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대하 장편 『토지』는 25년 만인 1994년 8월 15일 전체 5부 20권으로 탈고했다.


소설 『토지』는 실로 거대한 땅이다. 힘차게 솟아오른 큰 산이 있고 유장하게 흐르는 강이 있는가 하면, 표표 탕탕한 격류가 있고 세월의 벼랑에 새겨진 역사의 족적이 있다. 무엇보다 『토지』에는 민족의 삶과 운명, 한이 서려 있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생명의 벼리가 깃들어 있으며 웅숭깊은 휴머니즘이 있다. 또 그것을 섬세하면서도 웅장하게 다루어가는 지모신(地母神)의 상상력이 있고, 만화경적이면서도 교향악적인 수사학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하여 소설 『토지』는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바탕으로 역사적․인문적 상상력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빚어진 현대의 살아 있는 서사시라 할 만하다.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도 하기 전에…”로 시작하는 『토지』는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구한말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 우리 근대사의 운명과 근대인의 영혼에 도전한 역사적인 소설이다. 집필 25년 동안 작가는 50여 년에 걸친 스토리 시간(비운의 근대사)을 옹골차게 감당해내면서 동시에 1970~1980년대의 현실(비운의 당대사)을 다부지게 버텨왔다.


소설 『토지』의 줄거리는 쉽사리 요약되지 않는다. 워낙 양적으로 방대하기도 하려니와, 어느 특정 인물(예컨대 주인공)을 중심으로 서술된 소설이 아니라 수많은 인물의 의식과 행적이 종횡으로 겹쳐지고 짜인 소설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소설 전체의 분위기만이라도 훑어본다는 생각에서 간략한 󰡔토지󰡕의 경계를 둘러보자면 이렇다.


1~3부까지는 주로 최참판댁의 4대에 걸친 가족사의 운명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여러 인물의 초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 안에서 최참판댁의 1대인 윤씨 부인은 구한말 세대를 대표한다. 대지주이자 양반으로서 권위를 온전히 지니고 있다. 2대는 최치수와 별당아씨, 김환, 이동진, 용이, 월선, 임이네, 혜관 스님 등과 같은 식민지 초기 세대로서, 봉건적 인습의 굴레와 새로운 현실 사이에서 첨예한 갈등을 겪는다. 3대는 이 소설의 주축을 이루는 최서희와 길상으로 대표되는 세대이다. 이상현, 송장환, 임명빈, 임명희, 조용하, 이홍, 정석, 송관수, 김강쇠, 장연학, 봉선이(기화), 등등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식민지 시대 지식인과 민중의 삶의 방향에 대한 다양한 모색을 보여준다. 이들의 자식 세대로서 4대에 해당되는 최환국, 최윤국, 이순철, 송영광, 이양현, 김휘, 상의 등등은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운명, 현실과 이념, 나날의 삶과 근원적인 삶, 빈부의 갈등과 충돌을 겪으며, 심화된 인식의 지평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4부에서부터는 작가의 시선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다. 작가는 어느덧 민족의 대지 곳곳에 두루 자신의 눈빛을 투사하여, 정한과 생명사상, 휴머니즘과 민족주의 등의 문제를 깊이 있게 형상화한다. 제5부에서 그것은 더욱 심화된다. 1940~1945년까지를 시간 배경으로 하여 작가는 암흑기 민족의 운명과 인간의 개성적 국면들을 묘사한다. 일제가 곧 패망하리라는 희망과 일제의 최후 발악을 견뎌야 하는 절망이 교차되는 가운데, 독립자금 강탈 사건은 실패로 돌아가고, 송관수는 만주에서 돌연히 죽게 된다. 이에 길상은 자신의 회한 어린 과거를 정리하면서, 마지막 원력(願力)을 모아 도솔암에 관음 탱화를 그리고, 그동안 몸담아 오던 동학당 모임을 해체한다. 또한 5부에서 작가는 일본에 대한 면밀한 탐색과 민족주의, 가족주의, 개인주의, 사회주의, 허무주의 등 이념형에 대하여 대화로 풀어내는 한편 문화와 예술에 대한 사념까지 보여주면서 복잡한 실타래를 형성해낸다.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면서 길상은 예비 검속되고, 윤국은 학병으로 입대한다. 그 마지막 어둠의 터널 끝에서 서희는 해방의 소리를 들으며 ‘빛’을 본다.


실로 이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많고 그만큼 사건도 많다. 겁탈당하고, 불륜 행각으로 도망치고, 병들어 죽고, 총 맞아 죽고, 고문당하고, 싸우고, 의병을 일으키고, 독립운동을 하고, 쫓고, 쫓기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하는 등등 수많은 행위가 겹겹이 중첩되면서 기기묘묘한 사건들을 연출해낸다. 이런 사건들이 파노라마처럼 얽혀 있는 이 소설의 겉 그림은 한마디로 갈등의 그림이며, 정한의 그림자이고, 욕망의 풍경첩이다. 대부분 어두운 암채색 바탕 위에서 일렁이는 역동의 궤적이며 정한과 수난과 초극의 흔적들로 불거져 있다. 이런 겉 그림의 심층에서 작가는 우리 민족의 한(恨)의 속 무늬를 어루만지며 동시에 한을 풀고,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相生)의 지평을 모색한다. 이를 위해 한없는 연민의 정서와 큰 슬픔을 포괄하는 큰 자비의 이념형을 제시한다.


“만물이 본시 혼자인데 기쁨이란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네. (중략) 부처는 대자대비라 하였고 예수는 사랑이라 하였고 공자는 인이라 했느니라. 세 가지 중에는 대자대비가 으뜸이라. 큰 슬픔 없이 사랑도 인도 자비도 있을 수 있겠느냐? 어찌하여 대비라 하였는고. 공이요 무이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육신으로 진실로 빈자이니 쉬어갈 고개가 대자요 사랑이요 인이라. 쉬어갈 고개도 없는 저 안일지옥의 무리들이 어찌하여 사람이며 생명이겠는가.”


박경리의 『토지』는 민족의 땅이요, 역사의 땅이다. 소유의 땅이며 또한 존재의 땅이다. 한의 땅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생명의 모태 공간 같은 상징적인 땅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가장 기름진 인문적 지혜와 충분히 넉넉한 지모신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진정성 있는 문학의 땅이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큰 슬픔에 대한 큰 연민과 큰 자비로 생명의 창조적이고 근원적인 벼리를 추구하고자 한 것이 인상적이다. 소설 집필을 시작한 1960년대 말 이래 1970~1980년대는 군부 독재와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적 가치와 영혼이 왜소화 일로에 있던 시기였다. 말하자면 큰 슬픔의 시간대였던 터이다. 이런 시기에 더 큰 슬픔의 시기였던 구한말에서 해방에 이르기까지를 이야기의 시간으로 취하여, 작가는 인간적 가치와 영혼의 왜소화에 대항하는 큰 형식으로 거대한 문학의 땅을 일구었다. 요컨대 박경리의 『토지』는 우리 근대사 100년과 저간의 민족적, 인간적 운명의 사슬과 숨결을 유장한 크기와 넓이로 탐색하면서 의미 있는 서사시적 세계를 보여준 역작이다. 특히 그동안 한국인이 지키고자 했던 인간적 가치와 생명의 미학에 대한 고구와 상상적 승화는 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정신사적 가치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시장과 전장

박경리 지음, 마로니에북스, 2013


혼불

최명희 지음, 매안, 2009


꿈엔들 잊힐리야

박완서 지음, 세계사, 2004






우찬제 - 서강대 국문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팔봉비평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소천이헌구비평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욕망의 시학』『상처와 상징』 『불안의 수사학』 『나무의 수사학』 『애도의 심연』과 공역서 『서사학강의』 편저 『오정희 깊이 읽기』, 공편저 『한국문학선집: 소설2』 『4.19와 모더니티』 등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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